젠피

맛객

맛을 완성하는 마법의 가루

젠피

 

찬바람이 살랑 불어오면 추어탕이 당긴다. 여름 내내 더위와 실랑이를 벌인 몸이 보상을 바라는 것이다. 뚝배기 위로 펄펄 김을 뿜어내는 추어탕에 들깻가루 서너 스푼을 푼다. 세 숟가락 정도의 국물로 입과 혀, 위를 적신 다음, 공깃밥 절반을 만다. 후후 불어가며 먹다 보면, 어느새 이마에서 머리까지 땀구멍이 활짝 열린다.

식탁 한쪽에 놓인 종지 뚜껑을 열자 흑갈색 가루가 진한 향을 풍긴다. 남은 국물에 이 가루 한 스푼을 넣으면 마법이 일어난다. 들깻가루를 넣어 되직하던 국물이 깔끔해지고, 톡 쏘면서도 그 끝은 레몬처럼 상큼한 새로운 추어탕이 탄생한다. 여기에 나머지 공깃밥 절반을 넣으면, 추어탕 먹기 2라운드가 시작된다.

어느 집 담장 위에서 말려지는 중인 젠피 열매
어느 집 담장 위에서 말려지는 중인 젠피 열매

전라도 사람들은 이 마법의 가루를 ‘젠피’라 부른다. 서울에서는 ‘초피’, 경상도에서는 ‘제피’, 북한에서는 ‘조피’로 불린다. 젠피는 젠피나무 열매의 껍질을 말려 빻은 천연 향신료다. 생선의 비린내를 잘 잡아줘 예부터 추어탕과 매운탕에 빠지지 않고 들어갔다.

전라도 동부권역 사람들은 젠피를 훨씬 더 자주 사용한다. 구례에서 자란 지인은, 어릴 적부터 어머니의 음식에는 젠피가 빠지지 않았다고 했다. 그중 최고의 짝꿍을 김치로 꼽았다. 젠피김치는 입안을 얼얼하게 하는 알싸한 맛이 일품이다, 젠피가 빠진 김치는 김치가 아니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봄이나 여름에 딴 젠피나무 어린잎은 삼겹살을 먹을 때 필수 쌈 재료였고, 민물고기로 끓인 탕은 젠피와 함께 차려졌고, 밥상 한켠은 늘 젠피가루 종지가 차지했다고 덧붙였다. 그에게 젠피는 음식의 빈틈을 꽉 채워 완성해주는 향신료이자 고향의 맛 그 자체였다. 광양·순천·여수 등에 사는 사람들의 식탁도 대체로 비슷하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젠피는 깊은 향과 ‘쎄한’ 맛만큼이나 약성도 강하다. <동의보감>은 ‘맵고 독이 있으며, 속을 따뜻하게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따뜻한 약재인 젠피가 몸에서 차가운 기운을 몰아내 냉증을 개선하고, 위장 건강과 통증 완화에도 효과가 좋다고 했다. 특히 강한 살균작용으로 벌레독·생선독을 없앤다. 공산품으로는 모기기피제의 원료로도 쓰이고 있다.

몸에 이롭고 맛과 향이 좋다고 남용하면 몸을 해칠 수도 있다. 젠피나 젠피나무 잎의 마취성분이 중독을 일으키기도 하기 때문에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조선시대에는 이 마취성분이 사회문제로까지 비화됐다. 지리산 주변 백성들이 젠피열매와 잎을 찧은 다음 시냇물에 풀어놓아 물고기를 잡았고, 이를 금지해야 한다는 상소 등이 보인다.

지리산권 사람들의 주된 향신료

일본에서도 최고급품으로 쳐줘

 

최근 젠피 넣은 빵, 육포 등 출시

화장품과 약품 원료로서도 각광

젠피 
잎사귀가 자글자글한 젠피나무. 잎사귀 모양이 경상도 지역의 '산초' 나무와 다르다고.

이르면 5월부터 따는 젠피 열매는 가을 밤이 나올 무렵까지 수확할 수 있다. 지리산 주변은 예부터 젠피의 고장으로 유명했다. 지금도 늦여름이면 젠피를 사러 구례를 찾는 일본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강한 신맛이 나는 지리산 젠피를 최고급품으로 쳐주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광양도 젠피의 주산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화장품과 약품의 원료로도 사용되면서 수확하는 족족 팔려 나간단다. 덕분에 가격도 2배로 껑충 뛰었다는 뉴스도 있었다.

구례의 한 빵집에서는 젠피가 들어간 수제햄빵을 판다. 은은한 향으로 젠피가 낯선 사람들에게 입문용으로 손색이 없다는 평가다. 용방면 청년농업인은 젠피를 활용한 초피맛 간장, 초피 시즈닝, 초피 육포 등을 상품화해 요즘 젊은 세대의 입맛과 취향을 겨냥했다. 곡성군에서 열린 ‘아이스크림 페스티벌’에서 유명 셰프가 젠피 아이스크림을 선보였다고도 한다.(그 맛이 궁금하지만 맛볼 수 없어 아쉽다.)

젠피는 귀한 몸이 돼가고 있다. 먹음직한 젠피 음식도 쌓여간다. 올해 김장에는 구례 사람들처럼 젠피를 넣어 더 따뜻하게 겨울을 나볼까.

*‌젠피는 ‘초피’의 전라도말입니다. 기사에서는 지역말을 그대로 살려 초피 대신 ‘젠피’로 썼습니다.

글 노해경

저작권자 © 전남교육소식 함께꿈꾸는미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