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객 날 것과 익은 것의 아찔한 경계꼬막 꼬막은 꼴시늉말 같다. 글자 모양이 비슷한 ‘꼬박꼬박’이라는 의태어가 떠오른다. 삶은 꼬막 까기와 먹기 사이에는 일대일의 함수관계가 성립한다. 한 개를 먹으려면 한 개를 까야 하고, 양껏 즐기기 위해서는 한참 동안 껍데기를 꼬박꼬박 까는 정성을 들여야 한다.꼬막 음식은 대체로 손이 많이 간다. 양념꼬막이 대표적이다. 껍데기 반을 떼어낸 다음 꼬막 하나하나 위에 꼬박꼬박 양념장을 얹어야 한다. 노동집약이란 단어를 처음 알았을 때 가장 먼저 떠올린 음식이 바로 양념꼬막이었다.꼬막은 소리시늉말 같
맛객서울 것들은 모르는 싱싱한 바다의 맛 삼치 25년 전 즈음이었던가. 내일보다 오늘이 더 불안했던 나날들이었다. 불안은 몸도 마음도 갉았다. 늘 허기졌고, 잠도 부족했다. 호주머니 사정도 궁하던 때라 좋아하던 생선회를 배부르게 먹어보는 게 소원이었다.수험으로 인생역전(?)을 꿈꿨던 우리 다섯. 잠시나마 현실에서 벗어나 보자고 누군가가 제안했다. 다섯 중 한 명의 고향이 고흥 외나로도였다. 우리는 아는 이에게 소형차를 빌려 그이의 시골집으로 1박2일 나들이를 떠났다. 4시간 걸릴 정도로 광주에서 외나로도는 멀었다. 고흥에 도착하자
맛객쌉쌀달큼한 갯벌 위의 푸른 융단감태 아내는 어릴 적 감태를 먹어본 적이 없다고 했다. 스무살 이전까지 나도 매생이를 본 기억조차 없다. 부모님 모두 고흥이 고향인 아내는, 설날이면 김이 포슬포슬한 매생이 떡국을 후후 불어가며 먹었단다. 목포에서 나고 자란 나는, 찬바람 쌩쌩한 겨울이면 솥에 갓 쪄낸 밤고구마에 국물이 뚝뚝 흐르는 감태지를 올려 먹었다.1970~80년대 전남 서쪽과 동쪽 가장자리의 겨울철 음식 먹는 풍경이 이렇게 달랐다. 요새는 보관기술이 좋아 여름에도 감태와 매생이를 맛볼 수 있지만. 그 시절 장흥과 완도 등 전
맛객맛을 완성하는 마법의 가루젠피 찬바람이 살랑 불어오면 추어탕이 당긴다. 여름 내내 더위와 실랑이를 벌인 몸이 보상을 바라는 것이다. 뚝배기 위로 펄펄 김을 뿜어내는 추어탕에 들깻가루 서너 스푼을 푼다. 세 숟가락 정도의 국물로 입과 혀, 위를 적신 다음, 공깃밥 절반을 만다. 후후 불어가며 먹다 보면, 어느새 이마에서 머리까지 땀구멍이 활짝 열린다.식탁 한쪽에 놓인 종지 뚜껑을 열자 흑갈색 가루가 진한 향을 풍긴다. 남은 국물에 이 가루 한 스푼을 넣으면 마법이 일어난다. 들깻가루를 넣어 되직하던 국물이 깔끔해지고, 톡 쏘면서도
맛객현묘한 맛과 멋전복어릴 적 살던 목포 집에는 외가 쪽으로 제법 먼 촌수의 삼촌이 세 들어 살았다. 집 마당을 작업실로 삼은 삼촌의 일은 특별했다. 삼촌은 작업대 선반 위에 기다란 나무판 등을 놓고 온통 새까맣게 칠을 했다. 칠이 마르면 사포로 문지르고 다시 칠하기를 수차례. 그렇게 매끄러워진 나무의 검은 표면은 햇빛을 굴절시켜 오묘한 느낌을 줬다. 칠이 끝나면, 삼촌은 매끄러운 돌로 조개껍데기들의 표면을 갈기 시작했다. 오색五色 빛깔의 반반한 표면을 얻을 때까지 연마는 이어졌다. 그렇게 얻은 조각에 먹지를 대고 여러 문양을 그려
맛객 바다의 진액 담아조기, 새로워지다 보리굴비 “서울에서는 이 맛을 찾을 수 없더라고.” 옆 식탁의 이야기가 들렸다. 오전 11시, 이른 점심이어서인지 식당 손님은 내 일행을 포함해 딱 두 팀 뿐. 곁눈질로 소리가 나는 쪽을 훑었다. 초로의 부부가 보리굴비 정식을 먹고 있었다.가게가 조용해 본의 아니게 그 부부의 말을 더 들을 수 있었다. 남편은 ‘데스크’ ‘마감’ 등의 단어를 써가며 오래전 떠들썩했던 유명 가수의 스캔들을 들먹였다. 언론사에서 일한 적이 있는 모양이다. 부인은 두 손 엄지와 검지로 윤기 흐르는 굴비를 먹기 좋은
맛객구황救荒에서 하지夏至로감자 마크 와트니는 모래폭풍에서 조난된다. 날카로운 것에 아래 복부를 찔려 몸 상태도 심상찮다. 재난을 맞은 장소는 화성火星, Mars이다. 설상가상, 그가 죽은 줄 알고 있는 화성 탐사 동료들은 고향별 지구地球, Earth로 귀환 중이다.와트니는 천재 식물학자이면서 낙천주의자다. 화성 기지로 돌아와 대충 상처를 수습한다. 곧이어 생존 모드에 들어간다. 구조가 올 때까지는 어림잡아 4년. 68일치 식량으로 그때까지 버텨야 한다.2015년 개봉한 리들리 스콧 감독, 맷 데이먼 주연의 영화 의 초반부다.
으드득. 입안에서 뭔가가 무너져 내렸다. ‘악’ 소리가 절로 났고, 찔끔 눈물도 흘렀다. 해감이 덜된 바지락에 남아 있던 모래알이 어금니 골 사이에 끼었고, 그걸 씹는 순간 치아의 신경이 꽉 눌렸나 보다. 치료할 때가 왔구나 싶었다. 바로 치과 진료를 예약했다. 정약전은 에서 바지락을 ‘천합淺蛤’, 속명 ‘반질악盤質岳’으로 기록했다. 껍데기 바깥쪽 무늬를 ‘곱고 가늘게 짠 삼베細布, 세포’로 묘사하고, ‘살이 실하고 맛이 좋다’고 적었다. 천합을 풀면 ‘물 얕은淺 곳의 대합조개蛤’라는 의미이다. 물이 들고나는 갯벌에 사는
10여 년 전, 한 달에 두 번꼴로 토요일 아침이면 지리산 노고단에 오르곤 했다. 구례 화엄사 입구에 차를 주차한 다음, 버스를 타고 성삼재 휴게소까지 갔다. 해발 1,090m인 이 휴게소에서 1,507m의 노고단까지 약 3km 거리를 등반하는 데는 왕복 2시간이 걸렸다.아이들도 어려움 없이 오를 수 있는 코스였지만, 등산로를 힘겹게 더듬다 보면 몸이 먼저 깨어났다. 도시살이로 어긋난 몸 여기저기 뼈마디가 뚜두둑 다시 제자리를 찾아가는 듯했다. 무엇보다 주말 첫날의 반나절이 알차게 채워졌다는 생각에 마음이 든든했다.몸도 마음도 충만
해마다 가을걷이가 끝날 즈음이면 어머니는 내게 차를 대라고 하셨다. 함께 차를 타고 간 곳은 면 소재지에 있는 정미소. 거기 주인은 어머니와 내게 가볍게 인사를 건넨 다음, 한쪽에 따로 빼놓은 20㎏들이 쌀 대여섯 포대 무더기를 가리켰다. 도정을 갓 마친 햅쌀을 차에 싣고 와 집 안에 부린 나는, 어머니에게 볼멘소리를 하기 일쑤였다. 왜 이렇게 한꺼번에 많은 쌀을 사시느냐, 필요할 때 한 포대씩 구입하시면 되지 않느냐, 금방 눅눅해지고 벌레도 끓는데 일부러 묵혀서 드시고 싶으시냐, 등등 항의성 말을 쏟아냈다. 매년 이어지는 아들의
저녁으로 조개찜을 먹기로 했다. 초겨울 찬 바람은 조개를 먹을 때가 됐다는 신호였다. 집안일로 최근 몸과 마음 고생이 많은 아내의 기분도 새로운 음식으로 풀어주고 싶었다. 동네 음식점에서 3단 조개찜을 시켰다. 지난 겨울 이후 처음으로 조개를 대하는 시간이었다.찜기 맨 위쪽 뚜껑을 열자 가리비 모둠이 나왔다. 수증기에 익혀진 가리비의 속은 아직 철이 이른 듯 씨알이 엄지손톱보다 작았다. 둘이 천천히 먹는 데도 가리비 한 판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둘째 단에는 모시조개가 들어 있었다. 특유의 쫀득함은 반가웠지만, 신선함이 조금 아쉬웠다
식탁 가운데 휴대용 가스버너가 놓인다. 그 위에 (대체로) 어두운 색의 코팅 냄비(또는 팬)가 올려진다. 버너에 불을 당기자 곧 냄비의 투명 유리 뚜껑 안쪽으로 뿌옇게 김이 서린다. 툭툭, 냄비 안에서 제법 둔탁한 소리가 나기 시작하더니 2~3분 정도 요란하다.똑똑, 김이 물방울을 이뤄 아래로 떨어지고, 냄비 내부의 모습이 조금씩 드러난다. 알루미늄 호일 위의 소금밭이 하얗다. 거기서 허리를 잔뜩 움츠린 채 익어가는 씨알 굵은 새우들이 발갛다. 식탁에 앉은 이들의 눈은 냄비에 고정, 입보다 먼저 눈이 새우를 탐하고 있다. 한해 이맘
“살아있는 걸 먹고 싶다고 했다.” 오대수는 15년 동안 사설 감옥에 갇혀있다 풀려난다. 갇힌 이유도 풀려난 연유도 모른 채. 일식집에 가서 ‘살아있는 것’을 찾는다. 요리사인 미도는 접시에 산낙지를 내온다.휴대폰이 울리고, 그 유명한 대사 “누구냐 넌” 등등의 대화가 이어진다. 통화에서 속 시원한 답을 듣지 못한 오대수는 더 화가 난다. 분풀이로 한 손으로 산낙지를 움켜쥐고 입으로 머리를 뜯어내 잘근잘근 씹는다. 분이 덜 풀린 듯 손에 남아있던 낙지 몸통과 다리를 통째로 입에 욱여넣는다.박찬욱 감독의 영화 의 한 장면이
어김없이 모싯잎은 무성했다. 예닐곱 해 전이었을까. 어머니는 모시풀 몇 줄기를 시골집 담장 밖에 옮겨 심었다. 들녘 논두렁에 당신 허리 높이로 자란 녀석들이었다. 새 터로 이사 온 모시풀은 이내 군락을 이뤘다. 올 추석에도 어머니는 이 모싯잎을 햅쌀과 빻아 송편을 빚겠지. 어머니가 사는 함평 집 옆으로는 4차선 도로가 지나간다. 이 신작로와 함께 모시풀은 시골집의 붙박이 풍경이다. 이태 전 여름에 보니 모시풀 한 무더기가 싹둑 잘려나가 있었다. 추석도 한참 남은 때였는데. 그 이유를 묻자, 어머니는 남에게 베어 줬다고 했다. “짠하
어머니는 작은 게 반찬을 자주 내놓으셨다. 간장에 조리거나 고춧가루 양념을 버무린 것들이었다. 내 고향 목포 사람들은 이 게를 ‘뻘게’라 불렀다. 갯벌에서 잡아온다고 그리 불렀던 것 같다. 칠게란 단어를 얼마 전 처음 들어봤다. 온몸에 갯벌을 뭍히고 다녀서 칠칠맞다고, 칠월에 맛있다고 칠게라는 이야기가 인터넷에서 검색됐다. 뻘게와 칠게 사이를 오가던 시선이 ‘화랑해’ ‘서렁기*’에서 멈췄다.에서 칠게는 ‘화랑해花郞蟹’다. ‘해’는 게의 한자다. ‘화랑’은 당시 남자아이를 부르는 말이라고 한다. 칠게가 집게발을 펼치고 기어
죽순竹筍은 조연이다. 잡채, 고등어조림, 된장찌개, 골뱅이무침 같은 요리에 더해진다. 죽순이 주인 음식은 손에 꼽을 정도다. 하지만 죽순 없는 오뉴월 식탁은 섭섭할 것 같다. 서걱거리는 식감과 슴슴한 맛이 활력을 돋우기 때문이다. 요즘 말로 죽순은 ‘맛깔나는 조연Scene Stealer’이다. 어린 시절 입이 짧았다. 일 년 중 요맘때 밥상에 오른 죽순나물엔 젓가락 한번 대지 않았다. 그 서걱거림과 슴슴함을 싫어했다. 봄과 여름 사이 먹을 시기도 짧아 익숙해질 틈도 없었다. 어머니도 자식이 외면하는 음식을 좀처럼 식탁에 올리지 않았
#장면 하나. 시아버지는 매실나무 2,000그루를 심었다. 섬진강이 내려다보이는 백운산 자락 언덕이었다. 해마다 여름이면 매실을 따고 달여 농축액인 고膏를 만들었다. 가끔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얀 급체 환자가 아랫마을에서 올라왔다. 시아버지는 따뜻한 물에 그 고를 풀어 마시게 했다. 아픈 이의 얼굴엔 곧 핏기가 돌았다. 약도 병원도 아득했던 시절, 시아버지의 고는 마을의 비상구급약이었다. #장면 둘. 며느리는 부산 국제시장에서 이 언덕으로 스물셋에 시집왔다. 끝없는 밭일에 한숨이 절로 났다. 좋은 계절, 예쁜 섬진강이 부아를 돋웠다.
푸석푸석한 마른 풀들 사이로 파란 새순이 얼굴을 내민다. 하루가 멀다면서 온갖 푸른 것들이 하늘의 별처럼 들판 위에 다투어 뜬다. 봄이다. 이즈음 사람들은 봄나물을 캐려고 산으로 들로 나간다.나물은 먹을 게 없어 채취하는 구황식물이 아니다. 산야(山野)의 풀들을 깊게 이해한 바탕 위에 형성된 맛, 향, 건강의 문화가 나물이다. 조리법을 보면 서양의 ‘샐러드’ 따위와는 차원이 다르다는 점도 확인된다.무치고 데치고 삶고 볶고 버무리고 덖는다. 이처럼 다양한 동사(動詞)를 거느리는 식물조리법은 나물이 유일할 것이다. 김치와 국으로 만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