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김철 선생

상해임시정부 청사·김철선생기념관을 중심으로 왼쪽 소나무가 단심송, 오른쪽이 김철 선생 생가다.<br>
상해임시정부 청사·김철선생기념관을 중심으로 왼쪽 소나무가 단심송, 오른쪽이 김철 선생 생가다.

영화 <암살>을 다시 꺼내 보며 ‘빚감정’이 떠올랐다. 마침내 해방이 오고, 김구와 김원봉이 마주 앉는다. 김원봉이 마치 저승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처럼 낮게 말한다. “해방이죠, 하지만 너무 많이 죽었습니다. 최수봉, 나석주, 황덕삼, 추상욱…, 사람들한테 잊혀지겠지요? 미안합니다.” 무장독립투쟁의 모든 시간을 압축하고 있는 듯한 그 말에 대한 김구의 화답은 이러했다. “내가 오히려 미안해, 미안합니다.” 더이상 어떤 말도 필요해 보이지 않았다.

‘빚감정’의 근저엔 망각이 자리 잡고 있다. 시간의 더께 속에서 김원봉의 말은 사실이 됐다. 오직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기꺼이 내놓았던 무수한 우국지사들이 사람들한테서 아주 잊혀졌다. 몇몇 지도자들의 이름만 역사의 가장자리에 남았을 뿐이다.

허한 시간과 기억투쟁의 의미를 떠올리며 함평 신광면에 간다. 거기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청사’가 있다. 중국 상해에 있는 것을 재현해 놓은 곳이지만 품고 있는 공간의 의미는 실제 임시정부청사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 비좁은 건물에서 나라의 독립이 시작됐다. 거기서 자신의 안위를 포기하고, 삶을 저당 잡혀 나라에 바친 사람들이 없었다면, 조국의 해방은 영영 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상해임시정부 청사 벽에 걸려있는 우국지사들. 왼쪽 두 번째줄 두 번째 분이 김철 선생이다.
상해임시정부 청사 벽에 걸려있는 우국지사들. 왼쪽 두 번째줄 두 번째 분이 김철 선생이다.

 

상해 ‘푸칭리 4호 청사’ 함평에 재현

올해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1주년이 되는 해이다. 1920년 4월 11일 상해임시정부는 대한민국을 수립하고, 국민이 주권을 가진 민주공화국임을 선포했다. 함평 상해임시정부 역사관은 2009년 6월에 문을 열었다. 1926년 6월부터 1932년 5월까지 임시정부청사로 가장 오래 사용되었던 상해 ‘푸칭리 4호 청사’를 모델로 만들었다.

공간 재현에 공을 들인 흔적이 돋보인다. 3층 규모의 외관뿐만 아니라 내부의 김구 선생 집무실·정부 집무실·회의실·화장실을 똑같이 재현했고, 책상과 의자까지 중국 현지에서 직접 제작 조달했다. 100년 전 실제 썼던 물건 그대로다. 청사 어디에선가 김구 선생이 맑은 웃음을 지으며 튀어 나올 것 같다.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 회의실. 오른쪽 맨 앞에 군무장 김철 선생의 자리가 있다.

함평에 상해임시정부를 재현한 것은 일강 김철 선생과 관련이 깊다. 임시정부 청사는 김철 기념관과 몸을 잇대고 있다. 김철 선생은 1886년 함평 구봉마을에서 태어나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에 한 획을 그었다. 일본 메이지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천석꾼의 재산을 모두 팔아 중국으로 망명했다. 그는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위원과 군무장을 지냈다. 궁핍한 상해임시정부의 건물 임대료를 부담한 것도 김철 선생이었다.

김철 선생은 김구 선생과 함께 1932년 윤봉길 의거를 주도했고, 그 사건으로 임시정부는 상해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2년 뒤 김철 선생은 항저우 임시정부에서 과로에 의한 급성폐렴으로 순국했다. 그의 나이, 48세였다.

김철 기념관 옆에는 단심송丹心松이 외롭게 서 있다. 선생이 망명하고, 남편의 독립운동에 짐이 되기 싫어 그의 아내 김해김씨는 이 소나무에 목을 매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나라 잃은 백성에게 독립은 그렇게 뼈에 사무치는 투쟁이었다.

김철선생기념관 입구에는 독립신문(1920.1.10.)에 실린 김철 선생의 말이 있다.
김철선생기념관 입구에는 독립신문(1920.1.10.)에 실린 김철 선생의 말이 있다.

 

임시정부의 희망, 윤봉길 의거

상해임시정부는 늘 가난했다. 상해에서만 청사를 최소 12번 이상 옮겼는데, 가장 큰 이유가 돈이 없어서였다. 임대료를 내지 못해 숱하게 소송이 걸리기도 했다. 1920년 상해임시정부에 관여했던 우국지사가 1,000명에 가까웠지만 1930년에는 몇 십 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 사이 일본은 상해사변을 일으켰고, 전쟁의 승리로 상해를 ‘접수’했다. 상해임시정부는 존폐의 기로에 놓였다.

상해에서만 청사를 최소 12번 이상 옮겼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가난이 큰 이유였다.

김구 선생은 강한 돌파구를 고민했고, 그 방법은 일본 요인에 대한 ‘암살’이었다. 1932년 4월 29일, 김구 선생의 지령을 받은 윤봉길은 도시락과 물통 모양의 폭탄을 들고 상해 홍구공원으로 향했다. 그날 홍구공원에서는 일본군 1만 명, 상해 거주 일본인 1만 명이 모여 천황의 생일과 상해사변의 승전 축하행사를 열고 있었다.

행사의 중앙 단상에는 거물들이 도열해 있었다. 사라카와 대장, 노무라 해군 총사령관, 우에다 중장, 시게노쓰 주중공사, 기와바타 일본거류민단장, 무라이 상해 총영사 등이었다. 윤봉길은 오전 11시 40분 물통 모양의 폭탄을 단상에 던졌고, 곧바로 폭발했다. 시라카와 대장과 가와바타 거류민단장은 사망했다. 노무라 중장은 실명했고, 우에다 중장과 시게미쓰 공사는 다리가 잘려나갔다. 무라이 총영사도 중상을 입었다.

윤봉길 의거는 대한민국의 존재를 세계에 알렸다. 세계 유력 신문들이 앞 다퉈 보도했고, 나라 잃은 백성들은 잠시 살아있음을 느꼈다. 상해임시정부는 곧바로 문을 닫았다. 일제는 김구 선생을 잡기 위해 혈안이었다. 당시 일제가 김구 선생을 잡기 위해 내건 현상금은 60만원,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230억 원이었다.

함평 상해임시정부 청사에 재현된 김구 선생 집무실
함평 상해임시정부 청사에 재현된 김구 선생 집무실

그렇게 상해임시정부 시대는 막을 내렸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임시정부는 더욱 힘을 받았다. 중국 국민당의 장제스는 윤봉길 의거를 두고, “70만 중국군이 못한 일을 한국의 한 사내가 해냈다”며 임시정부를 금전적으로 돕기 시작했다. 일제의 이간책으로 조선인을 싫어했던 중국인들의 인식도 하루아침에 달라졌다. 상해를 떠난 임시정부는 일제의 감시를 피해 난징, 창사, 광저우, 구이양 등을 옮겨 다니다가 1940년 충칭에 마지막 거처를 잡았고 거기서 해방을 맞았다.

영화 <암살>에서 “(일본군) 몇 명 죽인다고 해방이 되냐?”는 질문에 안옥윤은 이렇게 답한다. “그렇지만 알려 줘야지, 우린 계속 싸우고 있다고…” 안옥윤의, 윤봉길의, 김구의, 모든 우국지사들의, 같은 답으로 우리는 해방을 맞았다.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은 그들의 목숨 값으로 받은 선물이다.

글 한경숙 사진 장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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