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 속 전남_ 1894년 동학농민혁명과 장흥 

◈ 관련 교과서 
- 초등학교 5학년 2학기 사회 
- 중학교 역사 
- 고등학교 한국 사(금성, 비상, 미래엔, 지학사, 천재 외) 

1894년 12월말 장흥 남쪽 끝 해안가, 덕도의 밤, 소년 뱃사공이 어둠 속에 돛단배를 띄웠다. 사흘 동안 500명 이상을 실어 날랐다. 일본 군에 맞서다 바다까지 내몰린 장흥 동학농민군이었다. 공주 우금치전투의 패배로부터 40여 일, 동학 지도자 전봉준이 체포된 지 보름이 지난 때였다. 모두가 끝났다고 할 때 장흥 농민군은 끝까지 싸웠다. 덕도의 밤이 동학농민혁명의 대단원이었다.

2년 후 장흥의 섬들이 완도로 편입됐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는 장흥의 3개 면이 보성 관할로 넘어갔다. 일제는 저항의 힘이 거셌던 장흥을 조각내고 싶었다. 지금 회진면 덕도는 간척이 되어 육지가 됐다. 최후의 농민군이 건넌 바다 위에 대교가 가로지른다. 갑오년 덕도의 밤으로부터 126년이 흘렀다. 

일본군에 맞서다 장흥 동학농민군은 덕도까지 내몰렸다.

시대정신을 이끈 가장 낮은 자들 
갑오년 동학농민혁명은 한국사의 가장 찬란한 장면 중 하나다. 오랜 억압과 수탈에 시달려온 민중이 역사 변혁의 주체로 나섰다. 동학 농민군이 내건 반봉건·반외세는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정신이었다. 그 무렵 세계는 시민혁명 과 근대화를 향한 여정에 있었다. 신분제가 무너지고 공화정이 들어섰다. 동학농민군의 반봉건(보국안민)·반외세(척양척왜)는 신분제 타파와 공화정 수립의 다른 표현이었다. 지배층은 시대정신의 한 조각도 붙들지 못했다. 안으로 썩고 밖으로 열강에 휘둘리고 빌붙었다. 가장 착취당했던 농민이 일어나 새로운 세상을 열 수 밖에 없었다. 

1894년 한 해 동안 전국 각지에서 300만 명 이상이 참여했다. 전라도가 항쟁의 중심지였다. 농업국가 조선에서 전라도는 나라 재정의 절대적 기반이었다. 그만큼 탐관오리의 수탈이 심했다. 1월 전북 고부(현재 고창·정읍·부안 접 경지역) 봉기가 시작이었고, 12월 15일 장흥 석대들 전투가 마지막이었다. 

전봉준이 지휘하는 농민군은 전라도 각지를 점령했다. 전투는 조직적이고 지속적이었다. 전봉준 본진과 각 지역 농민군은 긴밀히 연대하고 분업했다. 수만 명의 농민군이 들판을 행군하면 마을마다 먹을 것을 내주고 격려했다. 농민군은 무기며 행색이며 보잘 것이 없었지만 각 고을 관아들은 속수무책 무너졌다. 농민들의 분노와 기세가 그만큼 드높았고, 지배층은 그만큼 썩어있었다. 4월 27일, 농민군은 파죽지세로 전라도의 중심지 전주성까지 점령했다. 

농민들의 분노가 동학의 사상과 조직에 융합됐다. 1860년대 창시된 동학은 인내천(人乃天), 사람이 곧 하늘임을 천명했다. 동학의 평등사상은 신분제의 질곡에 시달린 농민들에게 특히 울림이 컸다. 동학은 전국으로 급속히 전파됐다. 접·포(교구 단위), 접주·대접주(관리자) 등 동학의 포교 체계는 곧바로 군대처럼 운용될 수 있었다. 혁명 지도자들은 동학의 체계를 잘 활용했다. 항쟁의 에너지와 종교사상 및 조직의 결합이 무명옷과 짚신에 죽창뿐인 농민군을 최강으로 만들었다. 

가을 들어 전세가 꺾이고 말았다. 농민군은 한양으로 진격하려다 11월 9일 공주 우금치에서 대패했다. 무능한 조선왕조가 마침내 일본군을 앞세워 자기 백성을 살육했다. 일본은 조선 침략의 기회를 노려왔다. 갑오년 봄, 농민군 진압을 명분으로 조선에 들어온 일본과 청나라는 서로 전쟁을 벌였고, 일본이 승리했다. 일본은 친일정권을 세운 후 아예 노골적으로 조선을 먹으려 들었다. 우리 땅에서 무슨 짓들이냐, 외세는 물러가라. 농민군이 가을 2차 기포 에 나선 이유였다.
(*기포: 동학의 조직인 포를 중심으로 봉기 하던 일)

연합토벌군은 일본군, 조선 정부군, 각 지역 민보군으로 구성됐다. 이름만 연합군일 뿐 일본이 지휘했다. 2차 기포는 사실상 일제와의 전쟁이었다. 온갖 신식무기로 무장한 토벌군에 맞서기는 역부족이었다.(예컨대 분당 400발이 발사 되는 개틀링 기관총이 이 때 등장했다.) 가을, 전라도 들녘과 산기슭은 농민의 시신으로 뒤덮였다. 전봉준은 12월 2일 체포돼 이듬해 봄 처형됐다. 농민군, 농민군 가족, 농민군에 밥을 해준 사람 등등 ‘감히 지배층에 도전한’ 죄로 수많은 사람들이 끌려가 죽임을 당했다. 접주들의 마을 은 불에 타고 쑥대밭이 됐다. 일제는 10여 년 후 조선의 외교권을 빼앗고 그 5년 후에는 아예 식민지로 병합해버렸다. 

장흥이 쏘아 올린 2차 농민전쟁 
‘공주 우금치의 눈물’은 좌절의 상징이자 동 학혁명의 마지막처럼 알려졌다. 하지만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다. 2차 전쟁이 활활 타올랐다. 바로 장흥을 중심으로 한 전남 서남부에서 였다. 장흥 농민군은 갑오년 초부터 전봉준 본진과 함께 봉기했고, 특히 4월 23일 장성 황룡강 전투에서 눈부신 활약을 했다. 장흥 대접주 이방언 장군이 ‘장태’를 무기로 삼아 승리를 거뒀다. 황룡강의 대승은 5일 후 전주성 점령의 도약대가 되었다. 

1차 기포와 2차 기포 사이에 눈부신 농민자치 시기가 있었다. 농민군은 전주성 점령 후 5월 7일 정부 측과 화약을 맺었다. 농민군이 요구한 폐정개혁안을 정부 측이 실천한다는 합의였다. 부당한 잡세의 폐지, 부정한 관리 처벌, 인재 등용, 토지제 개혁, 신분제 철폐 등 폐정개혁안에 담겨 있었던 새 시대의 명령을 조선의 권력자 들이 실천했다면 우리의 20세기는 얼마나 밝게 열렸을까. 

전주화약의 실현가능성이 크지 않다는 걸 농민군도 알았다. 전봉준은 현명한 전략가였다. 소요 진압을 명분으로 청군과 일본군이 조선땅에 진주하자 이들을 내몰기 위해 전투 대신 협상을 택한 것이다. 그는 농민군의 마음도 잘 알았다. 농민은 땅과 한 몸인 존재였다. 불패의 전사들이지만 이미 마음은 모내기철을 맞은 고향의 논밭에 가 있었다. 비록 지주와 관리에게 소출을 몽땅 빼앗기고 말지라도, 농민은 땅을 일굴 때 자기 자신이었다. 전봉준은 농민군들을 귀향시켰다.

용맹했던 장흥 접주들 중 최후가 알려지지 않은 구교철 대접주의 가묘

돌아온 농민들은 농사를 지으며 집강소를 설치했다. 전주화약의 개혁안을 자기 지역에서 힘껏 실천했다. 전라도 거의 모든 고을인 53개현에 집강소가 설치됐다. 집강소는 우리 역사에 서 민중이 직접 자치와 개혁을 실천한 놀라운 사건이었다. 이른바 ‘파리꼬뮨’ 보다 훨씬 체계적이고 문명화된 ‘자치정부’ 성격이었다. 장흥에 제일 먼저 집강소를 설치한 곳은 이사경 접주의 마을인 용반리 자라번지였다. 이방언 대접주의 마을 묵촌에도 설치됐다. 부정한 지주와 관리들이 끌려와 징벌을 받았다. 주민들은 집강소로 찾아와 억울한 사연들을 풀어놓았다. 

장흥 농민군의 지도자들은 양반·지주이면서도 조선사회에 비판적인 개혁가들이었다. 동학의 교리 유무상자(有無相資, 가진자와 없는자가 서로 돕는다)를 실천하며 가진 것을 기꺼이 내놓았다. 당시 57세였던 이방언 대접주는 장흥 농민들의 존경을 받는 정신적 지도자였고, 이인환 대접주는 전술에 능한 군사적 지도자였다. 비판적 지주층과 농민들의 합심, 문과 무의 결합이 장흥 농민군을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농민군을 기리는 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탑

흥은 전남 서남부의 큰 고을이었다. 조선 정부의 입장에서는 중요한 관리기관들이, 농민에게는 수탈기관들이 몰려 있었다. 장흥부와 벽사역은 ‘나랏님 말씀’을 앞세워 농민들을 착취했다. 이웃한 강진의 병영은 국토방위를 맡은 육군 지휘부이건만 그 무렵엔 주민을 탄압하는 괴물이었다. 전북에 고부가 있다면 전남에 장흥이 있었다. 심한 수탈이 강한 저항을 일으켰다.

9월, 동학농민군이 2차 기포를 일으키며 집결할 때 장흥은 병력을 나눴다. 일부는 전봉준 본진으로 합류했고 대부분은 장흥 현지를 지켰다. 장흥·강진의 지배층이 단합해 잔류농민군 토벌계획을 세웠기 때문이다.

본진은 우금치에서 대패하며 흩어졌지만 장흥은 대승을 이어나갔다. 인근 강진, 보성, 화 순 등의 농민군도 모여들었다. 전남 서남부 농민군은 이방언과 이인환 장군 등을 앞세우고 12월 들어 장녕성(장흥읍성), 벽사역, 강진현, 강진병영을 차례로 점령했다. 4연승이었다. 본진이 아닌 지역에서 일어난 최후이자 최대의 전투이었다. 


최후, 최대의 자존심 
농민군 본진을 무너뜨린 연합토벌군이 속 속 장흥으로 들어왔다. 12월 15일, 농민군 3만여 명이 장흥 석대들에 집결했다. 산기슭의 농민군이 들판으로 내려선 순간 총탄이 쏟아졌다. 사방을 둘러싼 신무기 앞에 도리가 없었다. 눈물을 머금고 흩어졌다. 자울재를 넘어 관산읍으로 넘어간 농민군은 거기서도 전투를 벌였다. 바닷가 덕도까지 몰렸다. 더 이상 갈 곳이 없었다. 새 세상의 꿈도 벼랑에 몰렸다. 

피의 보복이 뒤따랐다. 동학농민혁명 직후 장흥에서만 2천여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석대들 인근 공동묘지를 이장할 때 무연고 묘소들이 우수수 발견됐다. 그 옛날 농민군이 많이 묻혔노라고 어르신들이 증언했다. 

동학농민혁명은 가장 처절하고도 자랑스러운 한국사 중 하나다. 장흥은 그 혁명을 완성시켰다. 패배로 보였을 때 더욱 대규모로 집결해 끝까지 싸우며 농민혁명의 자존심을 지켰다. 그들의 함성은 이후 부침을 겪으며 조선 근대화의 나침반이 됐다. 

전투의 현장이었던 석대들 한쪽에는 장흥 동학농민혁명기념관이 2015년 문을 열었다. 전시관에는 농민군 희생자 2천여 명 가운데 신원이 규명된 460여 명의 이름이 적혀 있다. 석대들을 내려다보는 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탑은 1992년에 건립됐다. 

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관에 적혀있는 농민군 희생자 이름

과연, 갑오농민혁명은 덕도 바닷가에서 끝이 난 것일까? 장흥 부산면 용반리 이사경 접주의 마을은 270여 가구였다. 이중 농민군이 500여 명이었으니 각 가정에서 2명 가량이 농민군으로 나선 셈이다. 사실상 모든 주민이 농민군이었다. 위험을 무릅쓰고 배를 띄운 소년 뱃사공도 농민군이다. 앞장선 전사는 쓰러졌지만 살아남은 자는 이를 악물었으리라. 잔혹한 보복 속에서도 농민들은 잊지 않았다. 통한의 밤을 견디며 아이에게 들려준 갑오년 이야기는 역사의 구비마다 새로운 ‘동학군’을 길러냈다. 구한 말 항일의병으로, 일제강점기 민족운동으로, 해방기 새나라 건설운동으로, 분단시대 통일운동과 반독재 민주화운동으로…. 갑오년 반봉건·반외세의 함성은 그 원형이 됐다. 

소리 없는 통곡 속에 바다를 건넌 농민군은 동학의 마지막 장면이 아니다. 동학농민혁명은 한국 사회변혁운동 1백년의 물길을 이끈, 밑강물이었다. 
 

◈ 후예들이 만든 집체예술품 ‘죽창가’

해남 출신 전남대학생 김남주와 이강은 1972년 박정희의 유신독재 선포 직후 답답한 마음을 달래러 전북 동학혁명지로 떠난다. 젊을 적 전봉준 장군에게 밥을 해준 94세 할머니로부터 농민군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뻥 뚫린다. 광주로 돌아온 둘은 첫 유신반대 유인물 배포 사건을 일으키며 구속된다. 이후 이강은 민주화운동가가, 김남주는 시인이 된다. 바로 1980~90년대 한국의 대표 민중시인 김남주다. 군사독재에 저항하다 수감된 김남주는 옥중에서 동학농민군의 기개를 담은 시를 쓴다. 1984년, 강진 출신 화가 김경주가 그 시에 곡을 만들어 붙인다. 노래는 삽시간에 전라도를 넘어 전국 민주시민들의 애창곡이 되고, ‘죽창가’라 불리게 된다. 1987년, 목포 출신 조선대 미대생 이상호는 ‘죽창가’ 속 동 학농민군을 판화로 그린다. 강렬한 농민군 이미지가 6월항쟁 시위대의 깃발마다 새겨져 나부낀다. 6월항쟁은 오랜 군사독재를 마침내 끌어내린다. 2019년, 동학농민혁명을 재현한 TV드라마 ‘녹두꽃’이 방영된다. 광주 출신 피디는 전봉준의 마지막 장면에 ‘죽창가’를 들려준다. 2020년 전남·광주의 한 고등학생이 TV를 보며 전율한다. 농민군의 함성이 계속 이어진다. 

글 이혜영  사진 장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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