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계

나는 식물계의 ‘다 있소’

 

익어가는 벼
익어가는 벼

쌀은 지구 인구의 절반을 먹여 살린다. 벼는 쌀을 열매로 맺는 식물이다. 볏과학명 (Poaceae) 식물이 대체로 식량이나 사료로 쓰인다. 벼, 밀, 옥수수 등 세계 3대 곡물을 포함해 보리, 귀리, 피, 수수, 기장 등 인류의 식량자원들이 모두 볏과 식물이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잔디, 억새, 갈대, 강아지풀, 대나무, 그리고 대다수 ‘잡초’들이 볏과 식물로 분류된다. “볏과 식물은 식물 중에서 가장 진화한 형태”*라는 게 학계의 정설이다. 그만큼 볏과 식물의 생존 전략이 빼어나다는 증거다. 무슨 수를 쓰는 것일까. *이나가키 히데히로, <식물학 수업> 78쪽.

 

먹혔어도 살아있는 이유

 

초여름 벼꽃이 떨어지고 나락이 달렸다.
초여름 벼꽃이 떨어지고 나락이 달렸다.

식물은 줄기와 잎으로 구성된다. 줄기는 가로로 몸집을 불리거나 세로로 키를 키워 성장을 책임진다. 잎은 줄기 끝에 달려 성장에 필요한 광합성을 함으로써 영양을 담당한다.

성장점이 ‘낮다’는 게 볏과 식물의 가장 큰 특징이다. 대개 식물의 성장점은 줄기 끝에 있다. 그 끝에서 새로운 세포를 만들며 위로 뻗어나간다. 이런 경우 초식동물에게 줄기 끝을 먹히면 성장점도 잃게 되어 타격이 크다. 그래서 볏과 식물은 성장점을 낮추는 방향으로 진화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논에서 자라는 벼를 살펴보자. 논바닥에서 뻗어 나오는 건 ‘잎’이다. 줄기는 지면에 거의 맞닿아 있다. 소나 말 등 초식 동물에게 먹혀도 잎만 잘려나갈 뿐이므로 성장점은 타격을 받지 않는다.

이러한 생존 전략에 문제가 없는 건 아니다. 키를 높이 키우기 어렵고, 나무처럼 가지를 풍성하게 뻗어 아름드리 복잡한 구조를 만들기 불가능하다. 숲에서 생존하기는 어려울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초원이나 개활지, 물가 같은 곳에서는 볏과 식물의 경쟁력이 높다.

키 크기와 몸집을 포기하는 대신, 볏과 식물은 밑동에서 줄기를 여러 개로 갈라지게 하여(분열) 성장점의 수를 늘린다. 두툼한 ‘포기’ 형태를 만드는 방식이다. 낫으로 벼를 벨 때 손에 잡히는 ‘한 포기’의 벼에 여러 ‘줄기들’(정확히 줄기는 아니고 잎이다)이 몰려 있는 이유다.

 

벼의 쓰임은 무한대

 

가을이 되면 벼의 고개는 점점 무거워진다.
가을이 되면 벼의 고개는 점점 무거워진다.

볏과 식물의 잎은 도저히 먹을 수 없을 만큼 거칠고 질기다. 게다가 섬유질이 많아 소화하기도 어렵고, 영양분도 적다. 자기 몸을 지키기 위해 동물의 먹이로는 적합하지 않게 진화한 것이다. 벼의 이러한 특질은 농본사회 고유의 생활문화를 창조했다. 벼가 인간에게 제공하는 것은 쌀만이 아니다. 짚신, 소쿠리, 삼태기, 덕석, 가마니, 새끼, 초가지붕, 이엉, 도롱이 등은 모두 짚으로 만든 생활용품이다.

짚은, 쉽게 말해 ‘낙엽화’한 벼이다. 질기고 뻣뻣한 특성 때문에 짚은 낙엽화한 후에도 형태와 질감을 유지한다. 그 성질을 이용해 농본사회에서는 생활에 필요한 각종 물품들을 짚으로 만들었다. 그러고도 남은 짚은 두 가지로 더 쓰였다.

하나는 소의 먹이이다. 작두로 잘게 썬 다음 가마솥에 넣고 끓인다. 끓이면서 소금도 첨가한다. 녹색 풀이 숨어버린 동절기 동안 소는 토막낸 짚으로 끓인 ‘쇠죽’을 먹으며 외양간에서 겨울을 났다. 뜨끈한 쇠죽물은 겨울 찬바람에 거죽처럼 ‘튼’ 손등을 치료하는 데도 유용하다. 쇠죽은 ‘여물’이라고도 부른다.

봄, 벼를 삼고 있는 농부
봄, 벼를 삼고 있는 농부

또 하나는 거름이다. 재래식 농법으로 농사를 짓던 때, 논의 어느 자리에는 어김없이 산더미처럼 짚더미가 쌓여 있었다. 여기에 ‘합수’(오줌과 똥이 섞인 인간의 배설물을 지칭하는 전라도 사투리)를 부어 거름으로 만들었다. 봄이 오면 이 거름을 논에 고루 뿌린 다음 쟁기질로 흙과 섞어 한 해 농사를 준비했다.

이 외에도 짚의 쓰임은 다양하다. 메주를 띄울 때 메주걸이로 쓰이는 ‘끈’이 지푸라기 묶음이다. 짚의 낱개가 지푸라기이다. 지푸라기는 메주를 발효시키는 데 필요한 균류들의 서식처 역할을 한다. 겨울철에는 나무줄기에 짚을 둘러 기생충을 ‘꼬드기는’ 덫으로 사용한다. 원예농업에서는 뿌리 보온, 벌레 및 유해균 유인을 목적으로 땅바닥에 짚을 고루 깔기도 한다. 비닐류의 끈을 사용해 굴비를 엮더라도 한가닥 지푸라기를 함께 꼬아준다. 굴비의 숙성에 유효한 균류들을 붙들어 두기 위해서다.

벼가 만들어내는 또 하나의 부산물은 ‘왕겨’이다. 쌀의 껍질이라고 보면 된다. 왕겨의 쓰임 또한 여럿이다. 난방연료, 퇴비, 축산시설의 깔개, 싹이 트는 식물의 보온재, 잡초 억제 등 다양한 용도로 쓰인다.

 

생존을 위한 공존

 

우리네 삶과 생활 곳곳에서 벼의 존재감은 묵직하다.

벼에서 쌀을 털어내고 나면 짚과 왕겨가 남는다. 짚을 모아 놓으면 짚단이 되고, 분리하면 지푸라기가 된다. 쌀은 밥이 되고, 짚은 생활용품, 혹은 거름으로 인간의 삶을 도왔다. 쌀의 껍질인 왕겨도 짚 못지않게 인간의 삶 깊숙이 들어와 제 몫을 다했다. 우리네 삶과 생활의 곳곳에서 벼의 존재감은 묵직했다.

초식동물에게 먹히지 않기 위한 생존전략 때문에 벼는 그토록 다양하게 쓰일 수 있었다. 벼는 인간의 필요에 호응함으로써 다른 풀과 경쟁하지 않고 자신의 유전자를 보존해 온 것이다. 인간을 활용해 경쟁자를 제거하는 전략이다. 이 같은 특질을 진화론에서는 ‘인위선택’(artificial selection)이라 한다. 인간의 필요에 따른 ‘선택’이지만 결과적으로 선택된 자연물에게도 나쁘지 않다. 인간과 자연의 공존 방식 중 하나가 인위선택인 셈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벼이다.

살아남고자 하는 풀의 전략에서 문화의 맹아가 형성된다는 점을 벼를 통해 확인한다. 생태환경과 인간의 삶이, 한 포기의 풀과 인류의 생존이 결코 둘이 아니라는 가르침이다.

이정우 사진 오종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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