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제동원 피해자 돕는 이국언 씨

사람

 

부끄러워 시작한 일, 14년째

일제강제동원 피해자 돕는 이국언 씨

 

55세. (사)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이사장. 고향 영암에서 중학교까지 마쳤다. 광주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서 정치외교학을 전공했다. 오마이뉴스, 시민의소리 기자로 활동했다. 2009년 3월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을 결성해 피해자들의 일본정부 소송을 지원하고, 2021년 (사)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으로 재창립했다.

일제강점기 때 국내외 강제동원 피해자 규모는 매우 크다. 이중 일본으로 동원된 여자 근로정신대는 최소 1,700여 명 이상이다. 광주·전남에서는 미쓰비시중공업(나고야)에 약 150여 명이며, 후지코시(도야마)는 정확한 인원을 알수 없다. 미쓰비시중공업 사업장의 경우 최대 규모의 인력착취와 인권유린이 벌어진 현장이다. 여자 근로정신대 피해사례는 비교적 관심의 사각지대에 있었다. 광주 시민모임의 지원활동과 함께 우리 사회에 널리 알려진 셈이다.

이국언 이사장은 2021년 광복회로부터 ‘역사정의실천 시민운동가상’을, 2023년에 5·18 들불열사기념사업회로부터 ‘들불상’을 받았다.

 

■ 지난 1년간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이하 시민모임)은 유독 큰 시련을 겪었다. 어떤 상황이었나.

2018년 미쓰비시 등 일본 기업들을 상대로 낸 ‘강제동원 피해 소송’이 대법원에서 승소했다. 그런데 5년째가 되도록 일본 기업들은 판결을 따르기는커녕 사죄 한 마디 없다. 일본 정부의 방해 때문이다. 기나긴 법정 투쟁 끝에 일본 기업 특별현금화명령에 관한 최종 판결을 남겨둔 상황이었다. 그런데 한국 정부가 지난 3월 소위 ‘강제동원 해법’이란 걸 발표했다. 정부가 일본 대신 피해자들에게 ‘판결금’을 주겠다는 것인데, 이는 일본 피고 기업의 책임을 피해국인 우리가 대신하겠다는 것이다. 해법이 아니라 굴욕이다.

정부가 그렇게 밀어붙이는데 강제동원 피해자들과 시민사회가 막아내기란 정말 쉽지 않다. 2018년 승소한 피해자 열다섯 분 중에서 열한 분이 결국은 정부안을 수용하셨다. 개인적인 사정도 있고, 오랜 싸움에 지칠 대로 지치셨다. 끝까지 반대하시는 네 분과 투쟁을 함께하고 있다. 얼마 전엔 왜곡보도 사건도 있었다. 지난 1년은 가장 숨 가쁘고, 가슴이 턱턱 막히는 시간이었다. 역사 정의가 이렇게까지 물구나무 설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 최근 ‘역사정의를 위한 시민모금운동’을 진행 중이다.

네 분은 양금덕 할머니(93세), 이춘식 할아버지(99세), 나머지는 유족이다. 고령의 피해자들은 병마와도 싸우고 있다. 정부 배상금 사건 후, 시민들과 격려금을 모아 피해자들의 투쟁을 돕자고 의견이 모였다. 우리 시민모임을 중심으로 여러 시민사회단체가 모여 ‘한일역사정의평화행동’을 발족하고, 6월부터 모금을 진행했다. 10억 원을 모아보자 시작했지만, 사실 실현가능하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런데 시민들의 화답이 뜨거웠다. 한 달 반 만에 5억 원 정도 모금돼, 8·15 때 각각 1억 원씩 지급해드렸다.(9월에 6억 원을 돌파했다.)

■ 기자를 관두고 피해자 지원활동을 시작한 계기는.

기자 시절 ‘낯짝이 서지 않는’ 순간들을 줄줄이 겪었다. 2003년 이금주 태평양전쟁희생자 광주유족회장님을 처음 만났다. 강제동원 피해 어르신들이 청와대로 상경 시위하러 가시던 길이었다. 당시 나는 ‘일제강점기 문제’에 대해 무지했다.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벌이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일본 시민단체들이 돕고 있었다. 그들은 자국에서 ‘그리 좋으면 한국 가서 살라’는 비난을 받으면서도, 자비를 들여 지원하고 있었다. 뒤통수를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일본은 가해자, 우리는 피해자’라는 이분법적인 구도가 깨지고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 강제동원 사례 중 근로정신대 피해자 지원에 주력한 이유는.

취재를 계속하던 중 근로정신대 할머니들을 뵙게 됐다. 이분들은 강제동원의 피해와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일본군 위안부’라는 오해까지 받으며 살아오셨다. 명예회복이나 배상은 두 번째 문제고, 해방된 조국에서조차 숨어 살고 계셨다. 여자근로정신대 문제가 우리 사회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때다. 2007년 양금덕 할머니가 일본과 소송 중이었는데, 일본고등재판소에서 열린 2심 재판에 동행 취재를 했다. 재판부는 불과 1~2분 만에 기각 선고를 하고 도망치듯 나가버렸다. 피해자분들의 눈빛이 절망적이었다. 대법원에서 뒤집힐 가능성이 거의 없어 보였지만, 이대로 끝낼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사 한 줄 보태는 정도로는 안되겠다 싶어 기자를 그만 뒀다. 2009년 3월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을 만들었다.

결성 이후 어떤 활동을 펼쳤나. 굵직한 일들을 꼽아 달라.

그해 9월 미쓰비시자동차가 광주시청 앞에 자동차 전시장을 개장했다. 그 앞에서 릴레이 1인시위를 시작했다. 캠페인과 불매운동을 겸해 10개월 동안 208회를 했다. 시민들의 참여가 상당했고, 근로정신대 문제를 널리 알린 계기가 됐다.

그러다 일본 후생노동성이 양금덕 할머니에게 후생연금 탈퇴수당 99엔을 지급한 치욕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우리는 미쓰비시 사죄와 배상을 촉구하는 서명운동을 벌였는데, 무려 13만 5천 명이 참여했다. 서명운동 이후 미쓰비시중공업과 처음으로 협상장이 열렸다. 해방 이후 최초의 일이었다. 공식적으로 16차례 협상을 벌였으나, 미쓰비시 측이 무성의해 큰 성과는 없었다. 우리는 광주지방법원에 양금덕 할머니의 소송을 제기하고, 미쓰비시를 상대로 변호인단을 꾸렸다. 싸움의 무대와 전략을 법원으로 옮긴 것이다. 9년 후인 2018년 11월 대법원의 최종 승소를 끌어냈다.

■ 시민모임이 주로 하는 역할은 무엇인가.

먼저 피해자 진상규명과 인권회복, 사죄와 배상 소송 등을 지원하고 있다. 강제동원 피해자분들이 많이 돌아가셔서 올해 1월 기준 전국에 1,268명 정도만 생존해 계신다. 피해자 없는 시대가 곧 도래한다. 역사적 사실과 증언들을 후세대에 알리는 일이 절실하다. 승리의 역사든 치욕의 역사든 잘 기록해야 한다. 수년 전부터 강제동원 역사관 건립을 고민하고 있다. 시민들과 함께 십시일반으로 만들 생각도 했는데 이게 쉬운 일이 아니다. 역사관 건립의 필요성을 광주시에 제안하고 있다. 전라남도와 같이 협의해서 공간을 마련해도 좋겠다. 광주·전남 근로정신대 여성 피해자들을 지원하는 조례 제정에도 힘을 보탰다. 이후 서울, 경기, 인천, 전북, 경남 등 7곳에 조례가 만들어졌다.

■ 광주시의 친일 지명을 변경한 성과도 냈다.

시민모임은 친일청산, 역사 바로 세우기 작업을 추진하고 있다. 젊은 세대들과 역사기행, 현장답사 등도 진행해 왔다. 해남 옥매광산, 목포 고하도 등 광주·전남에 일제강점기의 아픈 현장들이 여럿 있다. 몇 년 전 광주 화정동에 친일파 김백일의 이름을 딴 지명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후배가 마을소식지 작업을 하다가 발굴했다. 사실 확인을 위해 국방부와 육군본부 몇 군데에 질의를 했고, 최종 확인했다. 개명의 필요성을 지역사회에 제기했다. 이후 백일로, 백일어린이공원, 백일초는 각각 학생독립로, 학생독립어린이공원, 성진초로 개명됐다. ‘성진’은 광주학생항일운동 비밀조직 ‘성진회’에서 따왔다.

주변인들이 ‘이국언은 끌텅을 판다’고들 하더라.

나는 힘이 없으니까 한 놈만 팬다.(웃음)

■ 14년간의 활동을 지탱해준 힘들은.

힘의 원천이 여럿이다. 먼저 회원들이다. 각자 바쁜 생활에도 시민모임 활동에 마음과 시간을 내주신다. (김정은 사무처장_시민모임에서 활동하던 청소년들이 사회인이 되어 다시 찾아오거나, 첫 급여를 받았다고 후원 신청하러 온다. 기자가 되어 인사하러 오기도 한다. 그럴 때 정말 뿌듯하고, 우리가 좀더 잘해야겠다는 다짐도 한다.)

그 다음은, 어디에도 의지할 데 없는 피해자들의 눈물이다. 일본으로 끌려갈 당시 13~15살 아이들이었다. 광주·전남에서 강제동원된 분들이 미쓰비시공장에만 150명 정도. 이중 소송에 나선 분들은 8명이다. 소송에 도저히 못 나서시는 분들의 심정을 이해한다.

일본인 활동가들도 나를 움직이는 힘이다. 농담으로, 내가 왜 하필 저 사람들을 만나서 이 고생을 하나, 하면서 웃곤 한다. 일본인들이 저렇게 열성적인데, 피해 당사국의 시민인 나는 더 열심히 하지 않을 수 없다.

20년 전 소송지원 일본인 규모가 무려 1천 명이었다. 특히 다카하시 마코토(81) 공동대표는 당시 세계사를 가르치던 고교 교사였다. 자신의 모국이 조선 아이들에게 가혹 행위를 하고, 이를 부인하는 행태가 교사로서 양심에 걸려 활동에 나섰다고 했다. 전라도에서 끌려간 아이들 중 6명이 지진 때 작업장에서 압사했는데, 이들의 죽음을 숨긴 일본의 행태에 특히 분노했다. 그 분은 2017년에 광주 명예시민증을 받으셨다.

전남 학생들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관련 책은.

피해자 이상업 님이 쓴 수기 <사지를 넘어 귀향까지>를 권한다. 열다섯 살에 미쓰비시 탄광에 끌려가 수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셨고, 광복 후 33년간 초등교사로 재직하셨다. 청소년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생각에 쓰신 생생한 수기다. 이금주 회장님의 평전 <어디에도 없는 나라>도 권한다.

시민모임이 지난 8월 ‘광복 78주년, 일제강제동원 피해자 구술 사진전’을 열었는데 그때 영암여고 학생 4명이 찾아왔다. 전남교육청 주최 ‘전남 청소년 역사탐구대회’에 나간다고 했다. 주제를 ‘전남 근로정신대 실상과 해결방안’으로 잡았다고, 내게 이것저것을 물었다. 반갑고 기특했다. 그 대회에서 그 팀이 대상을 탔다는 연락을 받았다.(관련글 48쪽) 기뻤다. 다음 포털에 ‘일제 강제동원 시민모임’ 카페가 있다. 거기서 자료와 최근 상황을 볼 수 있으니, 마음껏 활용하면 좋겠다. 궁금한 점이 있으면 사무실로 언제든 전화주셔도 좋다.

사회활동가가 되고 싶은 학생들에게 필요한 것은.

사람은 누구나 어려움에 처할 수 있고, 외롭고 힘겨울 때가 있다. 그럴 때 누군가가 말을 잘 들어주고 손을 잡아주면 그 사람은 큰 힘을 얻어 다시 일어설 수 있다. 나라를 위해 큰일을 도모하자는 식의 제안이 아니다. 내 주변의 친구, 이웃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는 공감의 태도를 길러보면 좋겠다. 공감의 힘들이 모일 때 우리 사회가 더 밝고 좋은 방향으로 갈 수 있지 않을까.

 

정리 이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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