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객_ 보리굴비

맛객

 

바다의 진액 담아
조기, 새로워지다

 

보리굴비

 

“서울에서는 이 맛을 찾을 수 없더라고.” 옆 식탁의 이야기가 들렸다. 오전 11시, 이른 점심이어서인지 식당 손님은 내 일행을 포함해 딱 두 팀 뿐. 곁눈질로 소리가 나는 쪽을 훑었다. 초로의 부부가 보리굴비 정식을 먹고 있었다.

가게가 조용해 본의 아니게 그 부부의 말을 더 들을 수 있었다. 남편은 ‘데스크’ ‘마감’ 등의 단어를 써가며 오래전 떠들썩했던 유명 가수의 스캔들을 들먹였다. 언론사에서 일한 적이 있는 모양이다. 부인은 두 손 엄지와 검지로 윤기 흐르는 굴비를 먹기 좋은 크기로 찢으며 남편과 말을 주거니 받거니 했다. 서울 말씨를 쓰는 부부의 한가로운 식사 시간이었다. 

언론사에서 일하는 사람, 특히 기자는 남의 이야기를 듣는 직업이다. 들었던 수많은 이야기 중에서 일부를 추려서 기록한다. 이야기에 밥과 술이 곁들여지면 대체로 마음이 풀리고, 대화가 잘 된다. 기자들이 취재원과 밥 먹고 술 마실 일이 잦은 이유다. 지역 맛집을 꿰고 있는 기자가 많은 것도 이 때문일 터.

그 남편도 젊었을 때 그런 기자 중에서 한 사람이 아니었을까. 그는 수많은 맛집에서 무수한 성찬을 먹어본 사람처럼 말했다. 그런 그가 ‘서울에서는 찾을 수 없는 이 맛’을 위해 아내까지 동반해 전라도를 찾았나 보다.

보리굴비


굴비는 조기로 만든다. 조기는 고등어와 갈치 다음으로 한국인의 식탁에 많이 오르는 생선이다.

조기를 오래 보관하기 위해 말려서 만든 보존식품이 굴비다. 영광 법성포 사람들은 ‘섶간’이라고 불리는 전통 방식으로 조기에 염장을 한다. 조기의 아가미를 벌려 1년 이상 간수를 뺀 영광산 천일염을 층층이 쌓아 몸 전체에 간이 배게 한다. 말은 쉽지만 전문가의 손재주가 필요한 작업이다. 이런 간잡이가 굴비의 맛을 결정한다.

간이 잘 밴 조기는 친환경 노끈에 엮여 한두 차례 씻겨진다. 이후 건조 과정에 들어가 3~4개월 동안 습도가 적당한 법성포의 해풍과 양질의 햇볕을 받는다. 잘 말린 굴비를 봄에 거둬들여 도정하기 전의 (영광 사람들 말로) ‘자갈 같은’ 보리 속에 파묻어 놓으면 보리굴비가 된다. 남획으로 개체수가 줄어든 조기를 대신해 부세로 만든 보리굴비도 요즘은 많다.

굴비 한 상


전문 식당이 아니더라도 간편하게 보리굴비를 즐길 수 있다. 딱딱한 보리굴비를 나무 방망이로 두드려 살점을 추려낸다. 쌀뜨물 또는 밀가루나 녹차가루를 푼 물에 30분 정도 담가뒀다가 비늘과 지느러미를 손질하고 찜솥에서 15분 정도 쪄내면 좋다. 최근엔 전자레인지에 넣고 5분 정도 돌려서 먹는 진공포장 제품도 시중에 많다. 대개의 식도락가들은 시원한 녹차물을 준비해 놓고 보리굴비를 기다린다.

이른 더위에 땀을 많이 흘려 지친 날, 식당에서 보리굴비를 먹었다. 살집 한 점을 입에 넣자 짠내와 비린내, 오래 숙성된 것이 풍기는 특유의 맛이 동시에 났다. 수분을 빼고 난 바다의 진액만 남은 게 이런 맛일까. 꾸덕꾸덕한 살집을 20~30차례 씹자 금세 단맛으로 바뀌었다. 굴비를 삼키자 땀과 함께 빠져나간 전해질이 순식간에 몸에 채워지는 듯했다. 몸의 세포 모두가 깨어났다.

몸은 기를 얻었지만 짭짤해진 입맛이 아쉬울 무렵, 차가운 녹차밥을 한술 뜨자 몸 전체가 시원해졌다. 보리굴비와 녹차밥은 환상의 궁합이었다. 맛도 빼어나지만 몸을 깨우고 식혀주는 보양의 신세계를 선사했다.

전라도를 찾은 부부는 내 일행보다 먼저 식사를 마치고 자리를 떴다. 식당을 나설 때 부부가 물린 상이 눈에 들어왔다. 보리굴비는 알뜰하게 발려 있었다. ‘이 맛’을 찾은 남편의 이번 전라도 여행은 분명 실했을 것 같다. 전라도의 보리굴비가 두 사람의 거뜬한 여름나기에 보탬이 되길. 

글·사진 노해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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