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무호남 시무국가

키워드 전남

 

싸움의 해석, 혹은 해석의 싸움

약무호남 시무국가

해남과 진도 사이 좁은 바닷길, 울돌목에서는 매년 명량해전의 승리를 기념하는 축제가 열린다. ⓒ해남군
해남과 진도 사이 좁은 바닷길, 울돌목에서는 매년 명량해전의 승리를 기념하는 축제가 열린다. ⓒ해남군

이순신 장군이 12척의 배로 300여 척의 왜군을 격파했다. 해남과 진도 사이의 바다 물길에서 벌어진 명량대첩이다. 영화 <명량>이 잘 보여주었듯이, 이 해전은 민․관 합작품, 곧 전라도 사람들과 이순신이 함께 일군 승리였다. 그런데 대다수 역사 서술은 이순신 장군 단 한 명의 리더십으로 해전의 승리를 설명한다. 잘못이다. 바닷물에서 일어나는 거품 하나까지도 설명할 수 있는 전라도 서남해안 사람들의 ‘참여’가 없었다면, 이순신이 그처럼 과감하고 정밀한 작전을 세울 수 있었을까.

이 대목에서 이순신이 쓴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만약 호남이 없다면 국가도 없다”는 이 말 속 ‘호남’을 호남의 공간으로 제한하는 의견이 있다. 이순신이 언급한 ‘호남’의 의미가 나라의 식량창고이자 한양으로 접근하는 필수 뱃길로서 호남땅과 그 물길의 전략적 중요성을 강조했다는 해석이다. 호남‘사람’들의 역할을 인정하지 않는 입장이다. 명량대첩(1597)보다 대략 4년 전인 1593년에 작성된 글이어서 ‘호남민의 역할’이 담겨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문장 자체에만 의존하는 평면적인 해석이다. 옳지 않다.

호남의 곡창지대를 왜군이 일부러 비켜간 것은 아니었다. 임란 초기, 왜군은 파죽지세로 조선땅을 유린했다. 이 같은 일방적인 전세의 흐름에 반격의 발판을 마련한 주체는 호남의병이었다. 충남 금산의 이치전투부터 두 번에 걸친 진주성 전투 등, 승리했거나, 졌더라도 왜군에 의미 있는 타격을 입힌 숱한 육지전에서 주력부대는 호남의병이었다.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를 안고 남강으로 뛰어내린 논개조차도 호남의병장 최경회의 부인이었다. 최경회는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성의 함락을 피할 수 없게 되자 남강으로 투신해 죽음으로 치욕을 지킨 인물이었다. 논개는 지아비 최경회에게 가고자 했고, 그 길에 철천지 원수의 죽음을 동반시켰다. 

전략적 요충지로서 호남은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수많은 민초들과 의로운 선비들이 죽음으로 지켜 만든 임란 최후의 보루가 호남이었다. 호남의 육로를 지켰기 때문에 왜군은 바닷길을 택했고, 구조적으로 바다에서 충무공의 승리가 가능한 환경이 조성됐다. ‘약무호남 시무국가’가 형식 문맥으로는 호남의 지리적 중요성에 한정되지만, 전쟁의 큰 흐름에서는 그 땅을 지킨 사람들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에 다름 아니다.

명량해전은 민․관합작품, 곧 전라도 사람들과 이순신이 함께 일군승리다. 영화 '명량' 스틸컷 중.
명량해전은 민․관합작품, 곧 전라도 사람들과 이순신이 함께 일군승리다. 영화 '명량' 스틸컷 중.

 

한국사회의 ‘특별한’ 관심

 

전라도 사람들의 명백한 역할조차도 긴 설명이 필요하니, 피곤한 일이다. 이렇듯 전라도는 늘 ‘해석’의 싸움에 시달려 왔다. 근거 없이 전라도를 폄훼하는 나쁜 말들을 뒤집어야 했고, 그나마 전라도를 좋게 말하는 텍스트는 ‘그렇지 않다’는 다른 해석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해야만 했다.

우리나라 민주주의 발전에 가장 크게 기여한 지역은 전라도이다. 이 진술은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 한편으로 전라도는 ‘영․호남 지역감정’의 한 축으로 폄훼된다. 수많은 희생을 치르면서 민주화 세력을 후원했고, 스스로 민주화 세력의 일원이었던 전라도 사람들을 ‘망국적 지역감정’의 발원 주체로 보는 시각이다. 결국 민주화를 위한 참여와 희생이 지역감정 때문이라는 희한한 논리가 도출된다.

참으로 어이없는, 이 같은 논리의 이면에는 전라도가 한국사회에서 ‘특별한’ 관심을 받고 있다는 역설의 의미가 놓여 있다. 조금 적극적으로 해석한다면, 더 나은 한국사회로 나아가는 데 매우 중요한 키값keycode을 ‘전라도’가 지니고 있다는 뜻도 된다. 그것이 개념이든 지역이든 사람이든 그 모든 ‘전라도’를 대하는 우리들의 태도에 한국사회 미래의 양상이 달라질 수 있다는 전망이 가능하다.

1·2차 세계대전 시기 유대인의 처지가 유럽사회의 위선과 정직의 키값을 쥐고 있었고, 흑인을 중심으로 한 유색인종의 삶에 미국사회 진보의 키값이 담겨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유대인과 흑인은 인종주의의 피해자들이다. 논리보다는 힘으로, 사실보다는 편견으로, 사랑보다는 증오로, 전라도 폄훼를 일삼는 짓은 인종주의에 다름 아니다. 모든 인종주의가 그러하듯, 전라도 인종주의 또한 근거없는 편견과 폭력적인 차별로 이어진다.

1980년 오월, 광주항쟁 당시 시민군들에게 밥을 해주는 광주 여성들과 민주화를 위해 횃불을 든 광주 시민들('5·18 열흘간의 항쟁' 중, 5·18기념재단 발행)
1980년 오월, 광주항쟁 당시 시민군들에게 밥을 해주는 광주 여성들과 민주화를 위해 횃불을 든 광주 시민들('5·18 열흘간의 항쟁' 중, 5·18기념재단 발행)

 

편견의 폭력이 향하는 곳

서울 어느 식당이나 술집에서 전라도 사람이 모여 술을 마시거나 밥을 먹는다. “하여간 전라도 새끼들은… 어쩌구 저쩌구…” 전라도를 비하하는 노골적인 말들이 옆 테이블에서 흘러나온다. 듣고 있던 누군가가 곧바로 항의한다. “그러는 지비(당신)들은 어느 도 새끼들이요? 사람들이 챙피한 줄 아씨요.” 느즈막이 서울로 이주한 후배의 외할머니가 실제로 이렇게 항의했다. 비슷한 상황에서 서울에서 작은 식당을 하는, 내가 아는 전라도 출신 주인은 이렇게 말하곤 했다. “여보씨요, 손님! 내가 전라도 사람이요, 당신 같은 사람들한테는 밥 안 폴랑께 그냥 가씨요, 가! 글고 다시는 오지 마씨요.”

항의를 받은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종종 싸움이 일어나는 경우도 있지만 열에 아홉은 물러선다. 이러한 경험을 전해주는 전라도 사람들은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그들은 왜 비하했고, 항의를 받자 왜 순순히 물러섰을까. 근거를 특정하기는 어렵다. 분명한 것은, 말해도 위험하지 않으니까 말했고, 항의하니까 물러났다는 점이다. 편견이라 하더라도 발화자 스스로는 정견이라는 확신을 갖기 마련이다. 저절로 포기하는 편견은 없다.

편견의 대상은 예외 없이 소수자이거나 약자이다. 편견의 폭력을 휘둘러도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피해가 없으니까 그렇게 몰염치한 짓을 부끄러움도 없이 저지른다. 예컨대 어느 술집에서 마동석이 전라도 사투리를 쓰면서 껄껄거리고 있다면, 전라도 폄훼의 말들은 결코 나오지 않을 것이다. 편견의 폭력이 비열한 이유는, 그 폭력이 강자에게는 결코 향하지 않기 때문이다.

편견과 차별이 분명한 형태로만 유통되는 것은 아니다. 사회적 지탄을 피해 은밀하고 모호한 형태로, 때로는 떳떳한 윤리적 색채를 띠면서 사람들 사이를 파고든다. ‘약무호남 시무국가’ 속 호남에서 호남사람을 제외시키고,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얼렁뚱땅 지역감정에 포개려는 시도가 그런 사례들이다. 그럴듯해서 속기 쉽다. 학문으로 포장하고 정치적 올바름으로 위장한다는 점에서 술자리의 전라도 폄훼보다 더 위험하다.


역사의 수레바퀴를 움직여온 호남

올해 봄 초입에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전라도는 다른 지역과 크게 차이 나는 선택을 했다. 이 같은 선택은 역사 속에서 수없이 반복되어 왔다. 그때마다 ‘지역감정 투표’라는 엉뚱한 평가가 뒤따랐다. 

하지만 이번 선택에서 그런 말은 나오지 않았다. 세상이 조금은 달라졌다는 사실을 느낀다. 그래도 만족할 수는 없다. 전라도의 선택이 옳고 정의롭다는 긍정적인 평가도 나오지 않았다. 평가 또한 해석이다. 싸움을 해석하고, 해석을 놓고 싸우는 작업을 멈출 수 없는 이유다.

전라도는 강자와 싸우는 약자다. 12척의 배로 300척의 왜군에 맞섰고, 헬리콥터와 탱크로 중무장한 계엄군에 맨몸으로 부딪쳤다. 부분적으로 승리했고, 여러 차례 패배했다. 오늘의 패배는 다음 승리의 밑거름으로 작용했다. 그렇게 조금씩 역사의 수레바퀴를 움직여 왔다. ‘약무호남 시무국가’는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유효하다. 

 

글 이정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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