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과 한국영화

 

04
거기, 사람이 있었네
한국전쟁과 한국영화

 

한국영화데이타베이스KMDB에서 한국전쟁을 키워드로 검색하면 100편 가까운 영화가 나온다. 첫 영화는 <오랑캐의 발자취>(1951·윤봉춘)로 기록되어 있는데, 한국전쟁 중에 영화가 만들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국전 이후 곧바로 만들어진 <피아골>(1955·이강천)은 빨치산을 인간적으로 그렸다는 이유로 우여곡절을 겪었다. 이는 이후 만들어진 영화들이 반공에 더 철두철미하도록 압박했다.

군사쿠데타로 권력을 쥔 박정희는 공산주의 정당인 남로당 출신이었다. 그 경력을 지우기 위한 몸부림이었던지 박정희 정권은 반공을 국시로 삼았고, 반공주의와 반공 정책을 대대적으로 펼쳤다. 우리의 일상을 지배해 온 ‘반공’의 출발이 이즈음부터였다. 영화는 반공 의식을 강화시킬 수 있는 효과적인 수단 중 하나였기에 박정희 정권은 반공영화를 만들도록 종용했다. 긴 시간 동안 한국전쟁을 다룬 한국영화는 예외 없이 ‘반공영화’였다. 한참 시간이 흐른 후에야 ‘반공영화’를 극복하기 위한 영화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웰컴 투 동막골>(2005·박광현)은 이념의 폐해를 다룬다. 좌左가 무엇이며 우右가 무엇인지 모르는 동막골에서 이념은 ‘쓰잘데기’가 없다. 이념의 무균지대인 동막골에선 총이 내려지고, 이념의 긴장이 풀리며, 이념의 노예들인 어제의 적들이 우리들의 형과 아우로 거듭난다. 이 영화는, 사람이 배를 곯지 않도록 하는 것이 이상적 세계의 기본임을 은근슬쩍 내비친다. 인민군 대장이 마을 촌장에게 묻는다. “고함 한 번 지르디 않구 부락민을 휘어잡을 수 있는 비결이 머이여?” 촌장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답한다. “머를 마이 멕에이지 머.”

<은마는 오지 않는다>(1991·장길수) 또한 ‘반공’과는 다른 맥락으로  한국전쟁에 접근한다. 전쟁이 한창일 즈음 강원도 춘천 인근의 작은 마을에 미군들이 들어온다. 과부인 언례(이혜숙)가 미군 2명에게 윤간을 당한다. 이 일은 곧 소문이 나고 마을 사람들은 언례가 당한 일에 대해 처음엔 분노와 동정을 느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언례는 따돌림을 당한다. 과부로 아이들을 키우는 여인에게 전쟁은 참혹함 그 자체다. 전쟁은 모두의 비극이지만, 여성에게 더 큰 비극을 가져다준다고 이 영화는 말하고 있다.

<고지전>(2011·장훈)은 반전反戰 영화의 걸작이다. 이전까지의 전쟁영화들이 형제애, 전우애 등 인간적인 면도 영화 속에 녹여내고 있는 반면, <고지전>은 휴머니즘적인 요소를 일체 배제 한다. 포항 전투에서 신일영(이제훈)은 다수의 아군을 죽여 다수의 아군을 살렸다. 살기 위한 선택이었다. 이는 기존의 역사에 허구를 가미한 것인데, 감독의 분명한 의도가 읽히는 대목이다. 그렇게 전장의 인간은 전쟁을 겪으며 파괴되어간다. 동료들을 죽이고 살아남은 군인들이 전쟁 이전의 인간으로 되돌아가기는 어렵다. 미쳐버리거나, 약에 의지하거나, 인간성이 상실된 채 살아야 한다. 전쟁에서 손목이 잘린 어린 소녀가 김수혁(고수) 중위에게 묻는다. 어른이 되면 팔이 다시 자라느냐고, 이에 수혁은 그럴 리가 없다고 말해버린다. <고지전>의 ‘전쟁’은 정말 잔인하다.

한국전쟁 72주년인데 여전히 휴전 상태인 한반도는 전쟁의 긴장을 안고 살아간다. 북한은 도발을 멈추지 않고 있다. 남한에서는 북한과의 전쟁을 불사하겠다는 서늘한 말이 넘친다. 전쟁이 모두에게 씻을 수 없는 고통을 남긴다는 것을 무시하고 하는 소리다.

전쟁의 가르침은 평화라 했다. 보복이나 응징이 아니라는 이야기일 것이다. 평화의 주체는 사람이다. 소개한 세 영화가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  
 

글 조대영(광주 동구 인문학당 프로그램 디렉터)

저작권자 © 전남교육소식 함께꿈꾸는미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