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편제의 고장 전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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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남도소리가 싫다
서편제의 고장 전남

 

영화 <서편제>(1993년·임권택)가 한국사회를 세차게 흔들었다. 판소리를 찾고, 그 의미를 재평가하는 작업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신문기사, 방송보도, 평론 등 <서편제>를 언급한 매체들은 영화 속 판소리를 ‘판소리’ 혹은 ‘남도소리’라고 말했다. 그런데 ‘남도소리’의 ‘남도’가 어느 지역, 어느 문화권을 지시하는지는 누구도 말하지 않았다.

<서편제>의 ‘남도소리’는 전라도 소리이다. ‘판소리=전라도 소리’라고 규정하는 것은 조심스럽지만, ‘판소리≒전라도 소리’는 가능하다. 판소리는 전라도에서 출발했고, 전국으로 확장되었으며, 다시 전라도에서 체계를 갖춰 지금껏 전승되고 있다. 전라도가 판소리의 기원과 확산의 핵심 문화권이라는 점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다. 그럼에도 두산백과는 판소리를 모호하게 설명한다.

보성군 회천면 득음정과 득음폭포. 송계 정응민 명창의 문하생들이 소리공부를 하던 곳이라고
한다.(ⓒ보성군)

1964년 12월 24일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로 지정되었으며, 2003년 11월 7일 유네스코 ‘인류구전 및 세계무형유산걸작’으로 선정되어 세계무형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판소리는 조선 중기 이후 남도지방 특유의 곡조를 토대로 발달한, 광대 한 명이 고수 한 명의 장단에 맞추어 일정한 내용을 육성과 몸짓을 곁들여 창극조로 두서너 시간에 걸쳐 부르는 민속예술 형태의 한 갈래이다. 남도의 향토적인 선율을 토대로 진양조·중모리·자진모리·휘모리·엇모리·엇중모리 등 일곱 가지 장단에 따라 변화시키고…(중략)…. 원래 판소리는 중부지방 이남에서 발달하였고, 광대도 전라도 무인巫人 출신이 많았으며 신재효 이후 근 1세기에 걸쳐 연창되어 왔다.(강조는 글쓴이)

이 설명에서 도대체 ‘남도지방’, ‘중부지방 이남’이 어디인지 알 수가 없다. 문장의 형식논리로 접근할 경우 두산백과의 판소리 설명은 ‘남도지방=중부지방 이남=전라도’이다. ‘광대도 전라도 무인출신이 많았으며’의 ‘도’를 통해 남도지방과 중부지방 이남과 전라도가 같은 공간임을 드러내고 있다. 그런데 남도지방, 중부지방 이남, 전라도를 흩트려 배치함으로써 판소리에 대한 전라도의 기여도는 ‘무인 출신 광대가 많았다’ 정도로 한정시키는 효과를 낸다. 두산백과의 서술방식에서 교묘한 전라도 배제를 느낀다.

보성 판소리성지에 있는 판소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기념비

<서편제> 판소리는 전남 소리

<서편제> 붐이 일어났을 때 나는 ‘남도’가 어디인지 몰랐다. 막연하게 전라남도와 경상남도를 아우르는 영역으로 추정했다. 내가 여러 방면으로 무지한 건 사실이지만 ‘남도’를 잘 모르는 건 내 무지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누구라도 알 수 있는 ‘전라도’를 놔두고 ‘남도’라고 말해야 하는 절박한 이유가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남도는 기껏해야 방향을 지시할 뿐이다. 충청, 경상, 전라는 모두 ‘남도’와 ‘북도’를 쌍으로 거느리고 있다. ‘남도소리’의 ‘남도’가 이 세 행정구역의 어느 ‘남도’를 지시하는지 헷갈리는 것은 내 무지의 문제가 아니다.

판소리를 ‘남도소리’라고 부름으로써 가장 피해를 입은 지역은 전라북도이다. 판소리의 정착과 보급, 그리고 확산에 가장 많이 기여한 지역은 전라북도이다. 1940년에 조선일보가 간행한 <조선창극사>(정로식, 동문선)는 88명의 판소리 명창을 소개하고 있는데, 절반 가깝게 전북 출신이다. 판소리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동리 신재효이다. 판소리 여섯마당을 정리했고, 인물·사설·득음·너름새라는 4대 법례를 마련했으며, 당대 소리꾼들의 든든한 후원자였다. 신재효의 활동 근거지는 전북 고창이었다. 조선 후기에 시작되었다가 일제시대에 끊긴 전주대사습놀이를 1970년대 초반에 부활시킨 지역도 전북이다. 2001년부터 매년 열리고 있는 전주세계소리축제는 판소리를 중심으로 전 세계의 음악을 아우르고 있다. 그럼에도 ‘북도소리’라는 말은 없다.

판소리성지 내 정응민 명창 생가와 득음문
판소리성지 내 정응민 명창 생가와 득음문

소리꾼의 출신지, 활동영역, 창법 등에 따라 판소리는 동편제와 서편제, 중고제로 갈래를 친다. 동편제는 전북, 서편제는 전남, 중고제는 경기남부와 충청도를 기반 삼았다는 게 통설이다. 이러한 구분법이 다소 억지스럽다는 비판이 있으나 기초적인 접근방식으로 쓸모가 없는 것은 아니다. ‘판소리≒전라도 소리’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이며, 경기·충청과 전남의 중간 지역으로서 전북의 지리적 위상, 거기에 당시 한양 다음 가는 도시로서 전주의 역할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전북 지역 사람들이 자기 고장을 ‘소리의 본고장’이라고 일컫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북도소리’라는 말은 없다.

오정해의 목소리가 영화 전반을 떠도는 <서편제> 속 판소리를 ‘전남 소리’라고 한다면 어긋나지는 않는다. 흔히 하는 말로 애절하고 슬프면서도 부드러운 계면성음, 곧 서편제의 창법이 영화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편제류가 성행했던 곳이 해남-영암-장흥-보성 등 전라남도 남쪽 해안가 지방이니 ‘전라남도 소리’라 해도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영화 원작이 전남 장흥 해안가 출신 이청준 작가의 작품이고, 소리꾼 오정해가 전남 목포 태생, 감독이 전남 장성 출신의 임권택이란 걸 감안하면 ‘전라남도 소리’는 더 확실해진다. 판소리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소리꾼으로 꼽히는 임방울은 전남 광산군 출신이기도 하다.

유채꽃이 만발한 장흥군 선학동. 이 마을은 영화 <서편제>의 원작인 이청준 소설 <선학동 나그네>의 배경지다.

‘남도소리’가 싫은 이유

신문이나 방송 같은 광주·전남지역 대중매체들이 ‘전통’이나 ‘향토’ 관련 기획물을 내놓을 때 거개의 내용이 ‘전남’을 담기 마련이다. 이 경우에도 지역매체들이 하나같이 채택하는 언어는 ‘남도’이다. 가령 ‘남도의 맛과 멋’, ‘남도의 길’, ‘남도의 명소’, ‘남도의 얼굴사진 공모전’ 같은 식이다. 전라도 권역 내에서 유통되는 표기여서 이때 ‘남도’는 ‘전라남도’의 다른 말로 쉽게 이해한다. 이 쉬움은, 그러나 어른들에게만 그러할 뿐이다. 자라나는 아이들에게는 광주나 전라가 더 익숙하다. 그들에게 ‘남도’는 헷갈리는 말이다. 광주권역 대중매체들이 ‘남도’ 운운하는 것에서 내가 읽는 것은 ‘전라’를 배제하는 내부검열이다.

보성군에서는 매년 서편제보성소리축제가 열린다. 사진은 제23회 서편제보성소리축제(ⓒ보성군)

네이버 국어사전은 남도소리를 ‘남도잡가(전라도와 경상도 지방의 잡가)’라고 설명한다. 괄호 안의 내용까지 네이버 국어사전 그대로다. 네이버 국어사전은 판소리를 전라도와 경상도 지방의 소리로 규정한 셈이다. <에센스국어사전 제6판>은 남도를 ‘경기도 이남에 있는 땅. 곧 충청도․경상도․전라도․제주도를 통틀어 이르는 말’로 풀이한다. 이 사전의 어법을 적용하면 남도소리는 경기 이남 전체의 소리가 된다. 이 사전에는 남도민요 항목이 있는데 “전라도와 경상도 지방의 민요를 통틀어 이르는 말”로 적어 놓았다. 이렇듯, 전라도 말을 쓰는 언어 대중에게도, 사전과 같은 지식체계에도 ‘남도소리’의 ‘남도’는 명확하지 않다. 이런저런 사전들의 어법에 따르면 판소리나 남도소리는 결코 전라도 소리가 아니게 된다.

‘판소리≒전라도소리’이다. 영화 <서편제> 등에서 판소리를 ‘남도소리’라고 부르면서 ‘전라도’는 은폐되었다. 전라도 안팎의 말쟁이, 대중매체, 학자연하는 이들 조차 ‘전라’보다 ‘남도’를 즐겨 쓴다. 그래서 나는 ‘남도소리’, ‘남도음식’, ‘남도사람’ 같은 말들이 싫다. 전라도 소리, 전라도 음식, 전라도 사람으로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데도 말하지 못하는 비겁함이 엿보여서이다. 전라도의 멋진 판소리를 듣고, 전라도의 맛있는 음식을 먹고, 좋은 전라도 사람을 만나고 나서는 ‘남도소리’, ‘남도음식’, ‘남도사람’라고 말하는 내부의 자기검열, 외지 호사가들의 위선이 짜증나기도 해서 나는 ‘남도’가 싫다. 
 

이정우 사진 장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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