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땅의 운명을 닮은 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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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땅의 운명을 닮은 천재
  • 전남교육소식
  • 승인 2022.05.11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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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전남] 해태 타이거즈와 이종범

1980년 5월 2일,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대회 결승전. 서울 동대문운동장에 입장한 두 고교팀은 광주일고와 광주상고였다.

시국은 한없이 어지러웠다. 그 시국의 한복판에 김대중과 전라도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이 시기 고교야구를 중계하는 흑백TV 화면에 ‘광주’라는 글자가 겹으로 등장하는 모양새는 묘한 느낌을 주었다.

축제의 끝에 살육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아무도 예감하지 못했다. 신군부의 총칼이 사회운동 세력의 턱밑까지 근접했다고는 느꼈지만, 그토록 많은 피를 뿌리고, 그토록 처참한 죽음을 몰고 올지는 감히 상상하지 못했다. 그해 5월, 동대문야구장 그라운드에는 광주·전남만 우뚝 서 있었다. 같은 해 5월 18일 한국민주주의의 그라운드에도 광주와 전남만 남게 되었다.

1983년 해태 타이거즈 우승 사진(출처 KBO온라인뮤지엄)

 

1980년 5월의 피도, 1987년 6월의 함성도 ‘민주정권’을 만들지 못했다. 정치적인 의미에서 전라도는 늘 패배했다. 그 패배의 텅 빈 심연을 놀랍게도 해태 타이거즈가 메워주었다. 해태 타이거즈는 한국 프로야구사(1983~) 첫 15년 동안 무려 아홉 번이나 우승했다. 전라도 사람들이 ‘전라도’를 마음껏 내세울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 해태 타이거즈 경기가 벌어지고 있는 야구장이었다. 그곳에서 해태는 늘 이겼지만, 졌다고 해서 고개를 숙이지는 않았다. 해태 타이거즈 선수들 사이에서는 아웃되고 난 뒤 고개를 숙이면 벌금을 내는 내부 규율까지 있었다. 게임의 룰만 공정하다면 가장 가난한 도시도 1등을 할 수 있다는 자부심 같은 게 충만했다.

비슷한 시기에 삼성 라이온즈는 항상 강자였지만, 해태가 없어지기 전까지, 한 번도 한국시리즈 우승 트로피를 쥐지 못했다주). 해태가 없어진(2001) 그 이듬해에 마침내 삼성은 한국시리즈 우승(2002)을 차지했는데 감독은 김응룡이었고, 코치진 대다수가 해태 출신들이었다. 이때의 우승팀을 ‘삼성 라이거즈’라고 한들 결코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후 선동열 감독이 두 번의 우승을 보태 21세기 첫 10년, 삼성이 기록한 총 세 번의 우승은 김응룡과 선동열 감독이 함께 일군 것이었다. 그러니까 2010년까지, 비록 해태는 없어졌지만 해태의 영향력이 여전히 프로야구 판을 떠돌아 다녔었다.

KBO온라인뮤지엄에서 전시된 한국시리즈 역대 우승 사진. 화면에 보이는 10개 중 6개가 해태 타이거즈의 것이다. 해태
타이거즈는 1983, 1986, 1987, 1988, 1989, 1991, 1993, 1996, 1997년 총 9번을 우승
했다. 창단 후 해체될 때까지 단 15년간. 사진을 크게 보실 분은 홈페이지(http://
onlinemuseum.koreabaseball.com/)에서 확인하시길.

 

“투수는 선동열 타자는 이승엽 야구는 이종범”

해태라는 팀만큼 이종범은 한국프로야구사에서 특별했다. 홈런만 잘 쳐도, 도루만 잘해도, 수비만 탁월해도, 단타만 잘 쳐 내도, 그러니까 한 가지만 잘해도 프로야구판을 너끈히 지킬 수 있을 터인데 이종범은 이 모든 것을 다 잘했다. 그것도 아주 탁월하게, 충분히, 화려하게 잘했다.

“이종범이 홈런까지?” 라는 의문을 품을 수 있겠다. 1997년에 홈런왕은 32개를 때려낸 이승엽이었는데 같은 해 이종범은 30개를 기록하며 막판까지 이승엽과 경쟁했다. 거의 4할에 가까운 타율을 유지하고, 부지런히 2루를 훔치면서, 유격수 수비까지 소화한 선수가 30개의 공을 담장 너머로 넘겨 버린 것이다. 그래서 이종범은 바람의 아들이었고, 야구 천재였으며, 그라운드의 신이었다. 김응룡 감독이 말했다. “투수는 선동열, 타자는 이승엽, 야구는 이종범”이라고.

바람의 아들, 이종범 ⓒ뉴시스

광주일고 3학년 이종범은 가고 싶은 대학을 골라서 갈 수 있었다. 이종범의 선택은 의외였다. 야구 명문이라 할 수 있는 고려대를 버리고 건국대를 선택했다.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건국대 구장의 잘 정비된 잔디 때문이었다. 당시 잔디구장은 흔하지 않았고, 있더라도 관리가 엉망이었다. 잔디구장에서 실력을 다듬어야 미래가 있다고 보았다. 또 하나는 상대적으로 성적이 낮은 야구 친구 두 명을 ‘옵션’으로 대학에 입학시키기 위해서였다. 

1990년대 어느 5월에 <월간 말>지가 5·18에 대해 이종범에게 물었다. 1970년생 이종범이 대답했다. “나이를 좀 더 먹었다면 나도 형들처럼 총을 들었을 것이다.” 어느 스포츠신문이 이종범에게 스타를 갈망하는 청소년들의 태도를 어떻게 보냐고 질문했다. 스타 이종범은 대답했다. “스타든 무엇이든 자기 몸으로 땀 흘려 이루는 게 중요하다.” 이종범에 대한 당대 광주사람들의 애정이 각별할 수밖에 없는 이유들이다. 그는 영리했을 뿐 아니라 친구들을 챙겼고, 광주사람이란 걸 자랑스럽게 여겼으며, 생각까지 바른 선수였다.

1997년 한국시리즈 MVP를 차지한 이후 이종범은 일본으로 건너갔다. 한 해 전에 선동열이 일본에 먼저 가 있었다. “동열이도 없고 종범이도 떠나버린” 이때부터 해태는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실상은 더 큰 흐름이 있었다. 대기업만이 살아 남을 수 있었던 ‘IMF시대’가 온 것이다. 가난한 기업 해태는 더 이상 승리하지 못했다. 부자 기업 삼성의 시대가 이때부터 시작됐다. 역설적으로, 해태가 마지막 우승을 했던 해에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로 전라도 출신 김대중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한국에서 데뷔 이후 5년 동안 이종범의 성적은 평균 타율 3할3푼1리, 713안타, 106홈런, 310도루였다. 지금까지 이 기록은 깨지지 않고 있다. 이종범이 일본에서 올린 성적은 초라했다. 4년 동안 평균 타율 2할6푼1리, 286안타, 27홈런, 53도루였다. 보통의 선수라면 ‘괜찮은’ 기록이지만 이종범이기 때문에 초라했다. 일본 주니치에서 존재감을 막 드러내던 때에 팔꿈치에 공을 맞고 뼈가 부서지면서 이종범은 내리막길을 걸었다.

이종범은 현역 선수로 타이거즈의 10번째 우승을 맛보았다. 기아 타이거즈는 이종범의 등번호 7번을 영구결번으로 정했다.

 

가장 약한 자들의 영웅

2001년 8월 이종범은 광주로 복귀했다. 당시 타이거즈는 ‘해태’가 아니고 ‘기아’였다. 팬들은 변함없이 이종범을 지지했다. 타이거즈의 암흑기 내내, 그리고 그 이후까지 이종범은 ‘유틸리티 플레이어’였다. 투수를 제외하고는 모든 수비 포지션을 소화했다. 타순도 들쑥날쑥이었다. 화려한 경력을 지닌 최고참 선수가 연습이 끝나면 함께 공을 주웠다. 2할대 초반의 타율에 도루 기록은 없는 채로 대주자, 대수비로 뛰기까지 했다.

한때 팀 전력의 절반을 차지했던 그가 대주자나 대수비로 그라운드에 투입되는 장면은 차라리 숭고해 보였다. 존재 자체로 팀의 중심 역할을 하면서 내리막길을 관리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박수칠 때 떠나지 않고 최하층 선수생활까지를 자발적으로 경험한 야구 천재였다. 잘 나가던 시절에는 붙박이 유격수로 그라운드를 지배했다. 전성기가 지난 이후에는 팀의 ‘구멍’을 메우면서 ‘타이거즈’를 지켰다. 마침내 2009년, 이종범은 현역 선수로서 타이거즈 V10의 영광까지 누렸다. 죽으나 사나 뛰었기 때문에 맛볼 수 있었던 승리였다. 이종범이기 때문에 가능했고, 그래서 이종범이었다.

이종범은 늘 창조적인 야구를 꿈꿨다. 머리를 앞세우는 슬라이딩을 하면서 포수 가랑이 사이로 팔을 뻗어 아웃타이밍에 홈을 터치해 득점을 올렸다. 한 손을 축으로 삼아 시계바늘처럼 둥글게 돌면서 발끝으로 2루를 훔치기도 했다. 타자가 친 뜬공을 잡지도 못했는데 거짓 송구 동작을 해 3루에서 홈으로 택업 하려던 주자를 묶어 두기도 했다. 그냥 잘했던 게 아니라 화려하게 잘했고, 놀랍게 잘했고, 상상 그 이상으로 잘했다. 그리고 크게 실패했다. 타이거즈 복귀 이후 대략 10년에 걸친 이종범의 선수생활은 그다지 화려하지 않았다. 그가 ‘이종범’이 아니었다면 이미 오래 전에 선수 생활을 접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계속 뛰어야 한다는 팬들의 요구, 전라도 사람들의 암묵적인 지지, 그리고 선수 자신의 의지가 43세의 현역 선수를 가능케 했다.

2012년 4월 이종범이 은퇴를 발표했다. 해태 타이거즈의 마지막 흔적이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시대 뒤편으로 이미 사라져버린 해태 타이거즈가 이종범을 통해 지속적으로 환기되었다는 게 옳은 진단일 것이다. 해태 타이거즈를 놓치고 싶지 않은 전라도 사람들의 욕망이 이종범을 오랫동안 그라운드에 묶어 두었다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그 욕망, 그 바람은 무엇일까.

이종범의 은퇴를 아쉬워하며 팬들이 경향신문에 낸 헌정 광고 ⓒ기아 타이거즈

대다수 전라도 사람들은 타이거즈 최고의 선수로 이종범을 꼽는다. 선동열, 김성한, 이순철 등 타이거즈 왕조의 스타들이 즐비한데도 이종범을 뽑는 데 주저함이 없다. 탁월하게 잘해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못했다는 것도 이종범을 뽑는 이유가 된다. 무엇보다도 타이거즈의 암흑기를 견뎌냈다는 점에서 연대나 공감 같은 정서를 이종범에게서 느낀다.

전라도는 상처가 많은 곳이다. 상처뿐인 영광도 싫지만, 상처 없는 영광도 높이 치지 않는다. 전라도는 ‘상처가 있는 영광’에 동질감을 느끼는 정서가 강하다. 말하자면 상처도 없이 얻은 영광은, 어딘가 모르게 찜찜하다. 영광의 완성도가 낮은 것만 같다. 전라도 사람들의 경험상 영광이란 그처럼 간단히 올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광주는, 그리고 전라도는 늘 그렇게 경험해 왔다. 화려했던 옛 시절, 끝없는 추락, 눈물겨운 부활의 몸짓……. 전라도의 역사적 경험, 타이거즈와 이종범의 야구 인생은 그 골격에서 포개졌다. 전라도 사람들이 이종범을 타이거즈 최고의 선수로 꼽는 속내는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이종범은 자신이 나고 자란 땅의 운명을 닮은 야구천재였다. 야구평론가 김은식의 말을 빌리면, 해태 타이거즈와 이종범은 “가장 약한 자들의 영웅이자, 패자들의 사랑을 받는 승자”였던 것이다. 

주) 1985년 삼성은 전기와 후기 모두에서 1등을 해버려 한국시리즈가 열리지 않았다. (당시 한국시리즈는 전기 우승팀과 후기 우승팀이 격돌하는 잔치였다.) 하지만 이 ‘우승’은 진정한 우승으로 치지 않는다. 한국시리즈처럼 일곱 번 싸워 승리를 가리는 단기전은 ‘해봐야 아는’ 게임이기 때문이다.
 

이정우 사진 기아타이거즈, 뉴시스, KB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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