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지락

으드득. 입안에서 뭔가가 무너져 내렸다. ‘악’ 소리가 절로 났고, 찔끔 눈물도 흘렀다. 해감이 덜된 바지락에 남아 있던 모래알이 어금니 골 사이에 끼었고, 그걸 씹는 순간 치아의 신경이 꽉 눌렸나 보다. 치료할 때가 왔구나 싶었다. 바로 치과 진료를 예약했다. 

정약전은 <자산어보>에서 바지락을 ‘천합淺蛤’, 속명 ‘반질악盤質岳’으로 기록했다. 껍데기 바깥쪽 무늬를 ‘곱고 가늘게 짠 삼베細布, 세포’로 묘사하고, ‘살이 실하고 맛이 좋다’고 적었다. 천합을 풀면 ‘물 얕은淺 곳의 대합조개蛤’라는 의미이다. 물이 들고나는 갯벌에 사는 바지락의 생태에서 비롯된 말인 듯하다. 깊은 바닷속 모래바닥에서 사는 놈들도 있으니 이는 절반 정도만 맞는 말일 성싶다.

바지락국

반질악은 바지락의 전라도 말 ‘반지락’과 연결된다. 흑산도 사람들의 말에 귀 기울였던 약전은, 소리가 비슷한 한자를 찾아냈을 것이다. 두 단어의 형태나 발음의 유사성에서 조선 후기 실학자의 실사구시가 엿보인다. 

돌이켜보니 어릴 적 내게도 반지락만 있었다. 반지락무침, 반지락젓 등등. 그래서일까. 지금도 “반지락” 해야 느낌이 온다. “바지락”은 속된 말로 ‘맥아리’가 없다. 바지락보다 반질악이 더 친근할 정도다.

반지락 말고도 지역에 따라 바지락은 빤지락, 바지라기, 반지래기 등의 이름으로도 불린다. 모두 반지락을 바락바락 씻을 때 나는 소리에서 비롯됐단다. 그 근거가 두텁지는 않지만 더 나은 설명도 찾기 어렵다. 소리나 모양처럼 직관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어떤 이름의 뿌리를 찾으면 쉽게 부정하기 어려워진다.

1912년부터 양식했다는 바지락은 예부터 어디서든 쉽게 많이 구할 수 있는 식재료였다. 국내 조개 소비량의 20% 가량을 바지락이 담당한다는 최근 통계도 있다. 한국인이 가장 많이 먹는 조개라고 한다. 흔하다고 가치가 덜한  것은 아니다. 바지락은 미네랄이 풍부해서 빈혈을 예방하고,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춘다. 간을 지켜주는 음식으로도 사람들의 사랑이 깊다. 

바지락

바지락 요리의 대세는 칼국수다. 바지락과 밀가루는 천생연분이다. 칼국수의 전분기가 약간 풀어진, 뜨끈한 바지락 국물은 속을 개운하게 풀어준다. 한두 숟가락 떠먹다가 그릇째 국물을 들이키면 ‘캬’ 소리가 절로 난다. 달래진 속에 칼국수 면발 몇 가락을 넣으면 든든함도 더해진다. 작용반작용으로 이마에 땀이 맺히고, 지난밤 술에 시달린 몸은 가벼워진다.

7~8월 산란기를 앞둔 봄철, 바지락은 몸에 양분을 쌓고 살집을 불린다. 바지락을 주재료로 만든 탕이나 찜, 무침을 먹기 좋은 시기가 바로 지금이다. 솥에 바지락과 물을 넣고 한소끔 끓이다가 청양고추와 대파만 송송 썰어 넣어도 완벽한 탕이 된다. 적절하게 간이 된 뽀얀 국물은 시원한 감칠맛이 넘친다. 하나씩 까먹는 바지락의 살은 달짝지근하면서도 씹는 맛이 옹골차다.

최근 젊은이들에게 바지락찜이 인기라고 한다. 프라이팬에 마늘과 올리브유, 버터 등을 넣고 바지락을 볶아낸 찜 요리다. 온라인 조리법대로 요리를 해보니 자박한 국물은 묵직하고, 바지락살의 풍미는 깊다. 술안주로 딱이다. 상대적으로 시원한 맛은 약간 아쉽다. 한쪽이 차면 다른 한쪽이 비는 맞바꾸기trade off는 진리인가 보다.

바지락찜과 바지락초무침

치과의사는 어금니에 특별한 이상이 없다고 했다. 큰 고통에 비하면 다소 허무한 진료였다. 고통 경험은 치과에서 얻지 못한 답을 다른 곳에서 찾게 만들었다. 온라인 검색창에 ‘해감’을 입력하고 몇 시간 동안 수십 건을 훑었다.

결론은 이렇다. 물 1리터당 천일염 2숟가락과 식초 약간을 푼다. 여기에 바지락을 넣고 숟가락을 담근 다음 어둡게 만들어준다. 5~6시간 이상 충분한 시간을 기다린다. 해감 뒤 잘 익힌 탱탱한 바지락살과 맑고 뜨끈한 젖빛 국물은 봄날이라면 그 무엇도 감당해내게 하는 맛이다.

글 사진 노해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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