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와 전남의 4·19혁명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4·19의 직접적 ‘뇌관’은 김주열이었다. 1차 마산의거가 터지고 한 달 동안 김주열은 실종 상태였다. 그가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경남 마산 앞바다에 떠오른 그 순간, 개벽이 시작됐다. 하나의 죽음에서 모두의 삶이 피어난 것인데, 당시 김주열은 마산상업고등학교 1학년이었다. 

4·19혁명은 세계 혁명사에도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만큼 독특한 특징 하나를 가지고 있다. 어린 학생들이 중심에 서서 이룩한 최초의 혁명이라는 것이다. 뇌관도 고등학생 김주열이었지만 혁명을 이끈 지도부도 고등학생들이었다. 특히 광주와 전남의 4·19는 고등학생들이 선두에 서 많은 시민들의 집단행동을 이끌어냈다.

4·19희생자들을 분향하고 있는 광주 4·19혁명기념관<br>
4·19희생자들을 분향하고 있는 광주 4·19혁명기념관

 

아이고 아이고 민주주의가 죽었네

4·19의 발단은 3·15부정선거다. 그 선거가 열리던 날, 광주는 이미 움직였다. 1960년 3월 15일 오후 12시 45분, 전국에서 한창 선거를 진행하고 있던 그 순간, 광주 금남로에서 장송곡이 울려 퍼졌다. ‘아이고, 아이고 민주주의가 죽었네!’ 죽은 민주주의를 슬퍼하며 수많은 시민들이 가두시위에 나섰다. 경찰은 시위대를 무차별 폭행했다. 3·15부정선거에 반대하는 전국 최초의 시위, 4·19혁명은 그렇게 광주에서 시작됐다.

민주주의 장송시위를 무자비하게 진압하는 경찰을 보고 가장 분개한 사람들은 광주․전남의 고등학생들이었다. 특히 광주고등학교 학생들은 4월 초부터 대규모 학생 시위를 계획하고, 경찰의 눈을 피해 광주 곳곳에 ‘정의의 투사 학생들은 모두 궐기하자!’라는 벽보를 붙였다.

광주의 4월 19일 시위를 주도한 것도 광주고 학생들이었다. 광주고 학생 150명이 시위대를 이뤄 금남로로 진출했고, 광주농고 학생들이 시위에 동참했다. 뒤이어 광주여고 학생들이 교문을 나왔고, 광주공고·광주상고·숭일고·조대부고 학생들이 집단적으로 시위에 동참하면서 결국 2만 명의 광주시민을 금남로에 집결시켰다.

고등학생들이 이끄는 광주의 시위대는 충장로와 금남로 일대를 행진하면서 이승만 정권의 하수인이던 파출소를 공격했다. 경찰의 발포에도 시위대 맨 앞에 섰던 고등학생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광주 시위가 격해지자 계엄군은 10대의 장갑차를 동원해 시위대를 막아섰다. 4월 19일, 광주의 하루는 역사였고, 주인은 고등학생들이었다.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한복판, 광주 금남로. 이곳 금남로 공원에는 학생독립운동, 3·15, 4·19혁명, 5·18민주항쟁과 6월민주항쟁의 중심지였음을 기리는 기념비들이 모여 있다.<br><br>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한복판, 광주 금남로. 이곳 금남로 공원에는 학생독립운동, 3·15, 4·19혁명, 5·18민주항쟁과 6월민주항쟁의 중심지였음을 기리는 기념비들이 모여 있다.
 

 

시간과 세대를 건너 유전되는 힘

전남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목포의 경우 처음 시위는 민주당 당원들이 주도했다. 그러나 시위대의 규모가 비약적으로 커진 시기는 고등학생들의 조직적인 참여가 시작된 이후였다. 

목포고와 목포여고, 목포상업고등학교(현 목상고) 학생들이 연합 시위대를 결성해 유달산 아래 달성국민학교에 모였다. 이때 모인 학생 시위대의 규모는 500명에 달했다. 특히 26일 서울 시위에서 사망한 고등학생 김부련의 시신이 목포역에 도착하면서 학생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목포역 앞에 2만 명의 시위 군중들이 몰렸는데, 그 중심에 고등학생들이 있었다.

순천도 학생들이 시위를 이끌었다. 경찰의 감시를 피해 순천 매산동 뒷산에 학생 대표들이 모였다. 순천사범학교 학생들을 필두로 순천고, 순천여고, 순천농고, 매산고 학생 20명이 조직적인 시위를 기획했고, 4월 27일 순천 중앙로에 모인 시위대는 1,500명에 달했다.

4·19는 고등학생들이 중심에 서서 이룩한 혁명이다. 사진은 학교 뒤편 판자울을 밀치고 나오는 광주여고생들. 광주 4·19혁명기념관 전시사진<br>
4·19는 고등학생들이 중심에 서서 이룩한 혁명이다. 사진은 학교 뒤편 판자울을 밀치고 나오는 광주여고생들. 광주 4·19혁명기념관 전시사진

1960년, 광주와 전남의 4월은 전국 어느 지역보다 뜨거웠다. 4·19혁명 당시 경찰의 총에 희생된 사람은 모두 185명이었다. 이 중 광주와 전남 출신은 24명으로 전체의 13%이다. 광주와 전남의 인구 비율이 전국의 8%를 넘지 않았던 것을 감안했을 때 매우 많은 희생자를 낳은 셈이다. 

4·19혁명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광주와 전남은 미완의 4·19혁명을 완성하기 위해 싸움을 이어나갔다. 1980년 오월 금남로에 꽃잎처럼 피를 뿌렸고, 1987년 유월 민주항쟁의 복판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2017년 촛불을 들고 기어이 민중들의 혁명을 완성했다. 광주와 전남, 땅의 힘은 시간과 세대를 건너다니며 유전되는 것이 분명했다.

 

처음 성공한 민중들의 혁명, 4·19

4·19혁명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었다. 성공한 민중들의 혁명, 이 나라 역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조선의 무수한 민란들은 모조리 실패했다. 동학군과 구한말의 의병들도 분연히 떨쳐 일어났지만 처참하게 무너졌다. 모두 눈보라 몰아치는 산하에 시뻘건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4·19혁명을 돌아보면 역사는 그냥 시간의 나열이 아니다. 모든 시간은 분절되는 것이 아니고, 긴 흐름 안에서 서로 복잡하게 연결된다. 과거와 현재, 미래는 서로 거대한 덩어리로 연결돼 있고, 흐름 안에서 서로 인과관계를 갖는다. 실패했던 그 무수한 혁명들이 모여 4·19라는 하나의 성공을 쓴 것이다.

‘피의 화요일’, 독재에 항거한 수많은 시민들이 거리에서 쓰러졌다. 경찰의 총격에도 시민들의 대오는 물러서지 않았다. 계엄령을 내려도 소용이 없었다. 사람이 죽을수록 더 많은 시위대가 모였다. 서울, 부산, 마산, 광주, 목포가 모두 같았다.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오래 참은 분노를 표출했던 시민들은 죽음이 두렵지 않았다.

목포 달맞이공원에 있는 4·19민주혁명기념비(왼쪽)<br>광주공원 안에 있는 4·19의거 희생영령 추모비(오른쪽)<br>
목포 달맞이공원에 있는 4·19민주혁명기념비(왼쪽)
광주공원 안에 있는 4·19의거 희생영령 추모비(오른쪽)

특히 4월 25일, 서울에서의 시위는 폭발적이었다. 8만 명의 시위 군중이 모여 ‘이승만 퇴진’을 외쳤다. 밤이 깊어도 시민들은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고, 26일 아침까지 시위를 이어나갔다. 그리고 오전 10시 30분, 이승만 대통령의 사임 성명이 계엄군의 마이크를 통해 시위 군중에게 전달됐다. 위대한 승리였다.

4·19혁명 때 국가폭력에 희생된 사람은 186명이었다. 적지 않은 숫자였다. 모두가 민중이었고, 권력자는 없었다. 학생들이 가장 많았으며 일반 시민도 적지 않았다. 그중 94명은 하층 노동자이거나 직업도 없는 도시의 빈민들이었다. 모든 혁명은 피를 먹고 자란다. 4·19혁명도 다르지 않았다. 민중들의 피로 혁명을 완성했다.

4·19혁명은 승리했지만 ‘미완’이었다. 사실 이승만의 하야를 이끌어낸 건 민중들의 시위보다 미국의 개입이 훨씬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 미국은 이승만 정권의 정치적 사용가치를 딱 거기까지로 판단하고, 이승만의 사퇴를 직접적으로 요구했다. 미국이 등을 돌리니 이승만은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었다. 4·19, 그 위대한 민중들의 승리는 불과 1년 뒤 5·16 군사쿠데타로 무너졌다. 그때 미국은 박정희의 손을 들어줬다. 

그리하여 시인 신동엽은 서늘한 잠언의 문장을 후세에 남겼다.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東學年)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했다.

서울 강북구 수유동 4·19민주묘지(ⓒ국립4·19민주묘지)
서울 강북구 수유동 4·19민주묘지(ⓒ국립4·19민주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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