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객] 더덕

10여 년 전, 한 달에 두 번꼴로 토요일 아침이면 지리산 노고단에 오르곤 했다. 구례 화엄사 입구에 차를 주차한 다음, 버스를 타고 성삼재 휴게소까지 갔다. 해발 1,090m인 이 휴게소에서 1,507m의 노고단까지 약 3km 거리를 등반하는 데는 왕복 2시간이 걸렸다.

아이들도 어려움 없이 오를 수 있는 코스였지만, 등산로를 힘겹게 더듬다 보면 몸이 먼저 깨어났다. 도시살이로 어긋난 몸 여기저기 뼈마디가 뚜두둑 다시 제자리를 찾아가는 듯했다. 무엇보다 주말 첫날의 반나절이 알차게 채워졌다는 생각에 마음이 든든했다.

몸도 마음도 충만한 주말의 시작은 가끔 무산됐다. 화엄사 입구 화엄탐방지원센터 가까이에 있는 한 음식점 때문이었다. 이 ‘점방’은 함께 할 서너 명의 산행 일행을 만나는 곳이었다. 아침 요깃거리로 빈속을 달래는 베이스캠프이기도 했다. 우리는 이 가게에서 늘 두 가지 음식, 더덕구이와 동동주를 먹었다.

더덕 ⓒ클립아트코리아
더덕 ⓒ클립아트코리아

이 집 두 음식의 조합은 특별했다. 동동주 한 모금으로 입을 적시고 더덕구이 한 점을 씹으면 쌉쌀함이 먼저 혀를 감쌌다. 그것도 잠시, 달콤함이 입안 가득 퍼졌다. 탁주와 구이를 함께 삼키면 기분 좋은 향과 맛이 목구멍을 타고 온몸으로 퍼졌다.

더덕은 ‘산에서 나는 고기’로 불린다. 살강살강 씹히는 식감에서 비롯된 말인가 보다. 육식을 금하는 절집에서 이 말이 나왔다는 사실이 재미있다. 사찰에서 더덕은 고기의 대체재였는지도 모르겠다. 주로 산에서 나던 더덕은 이제 노지에서도 대량으로 재배된다. 몇 해 전 농촌진흥청은 국내 산채 중 더덕이 재배면적 1위라는 통계를 내기도 했다.

한방에서 더덕은 양유근羊乳根이다. 뿌리를 자르면 양의 젖과 비슷한 액체가 나온다는 뜻을 담고 있다. 열을 내리고 독을 없애는 청열해독淸熱解毒의 약재로 면역력에 좋고, 폐는 맑게 기관지는 튼튼하게 만든다고 한다.

무엇보다 알칼리성 식품인 더덕은 고기의 산성 성분을 중화해 고기와 궁합이 좋다고 한다. 찬바람이 매섭던 며칠 전 저녁, 고추장 양념을 바른 더덕과 삼겹살, 닭갈비를 참숯에 구웠다. 더덕이 더해진 고기는 담백했고, 숯에 구워진 더덕은 부드러운 고기였다. 더덕과 고기의 합은 과식을 불렀다. 

더덕구이 ⓒ노해경

포털 백과사전을 검색하면 더덕을 사삼沙蔘이라고 적고 있는 곳이 많다. 몇몇 한의사들은 이 기술이 잘못됐다고 지적한다. 사삼은 잔대이고, 양유근이 더덕이라는 것이 이들 주장의 골자다. <동의보감>의 기록이 이런 잘못을 낳았고, 과거 더덕이 사삼이라는 이름으로 유통된 경우도 많아 혼란을 키웠다고 한다. 어쨌든 최소한 고려시대부터 더덕은 약보다는 음식으로 이 땅에서 많이 소비돼왔다는 게 중론이다.

딱 한두 잔에서 그쳐야 했다. 향에 홀렸을까 맛에 취했을까. 더덕구이와 막걸리는 한 잔이 두 잔을 부르고, 두 잔이 세 잔을 초대했다. 너댓 잔을 주거니 받거니 할 즈음이면 일행들은 슬슬 산행 포기를 작당하기 시작했다. 더덕구이를 파는 식당은 그날 우리 일행이 밟은 가장 높은 고도가 되기 일쑤였다.

종 모양의 보라색 더덕꽃 ⓒ클립아트코리아
종 모양의 보라색 더덕꽃 ⓒ클립아트코리아

누군가는 ‘더덕으로 산의 기운을 충분히 맛봤다’고 억지를 부렸다. 다른 누군가는 ‘지리산 등반객 최소 1할을 이 음식들이 주저앉혔다’는 근거 없는 말을 흘렸다. 더덕과 산행을 맞바꾸는 일에 너 나 할 것 없이 열을 올렸다. 토요일 반나절이 그렇게 훌쩍 지나갔다.

예전처럼 주말에 지리산을 찾는 일이 이제는 없어졌다. 우리를 좌절시켰던 더덕집은 아직도 성업 중인 모양이다. 그때 그 시절, 우리는 화엄사 입구에 더덕을 먹으러 갔을까 지리산을 오르러 갔을까. 그때는 분명 산을 오르려 했던 것 같은데, 이제는 잘 모르겠다. 다만, 무엇이건 달콤쌉싸름한 것을 만나면 조건반사로 더덕, 동동주의 맛과 향이 생각난다. 당시 사람들의 얼굴도 더불어 떠오른다. 맛은 기억이다.

글 노해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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