햅쌀

해마다 가을걷이가 끝날 즈음이면 어머니는 내게 차를 대라고 하셨다. 함께 차를 타고 간 곳은 면 소재지에 있는 정미소. 거기 주인은 어머니와 내게 가볍게 인사를 건넨 다음, 한쪽에 따로 빼놓은 20㎏들이 쌀 대여섯 포대 무더기를 가리켰다. 

도정을 갓 마친 햅쌀을 차에 싣고 와 집 안에 부린 나는, 어머니에게 볼멘소리를 하기 일쑤였다. 왜 이렇게 한꺼번에 많은 쌀을 사시느냐, 필요할 때 한 포대씩 구입하시면 되지 않느냐, 금방 눅눅해지고 벌레도 끓는데 일부러 묵혀서 드시고 싶으시냐, 등등 항의성 말을 쏟아냈다. 매년 이어지는 아들의 핀잔에도 어머니는 ‘연례행사’인 햅쌀 대량 구입을 좀처럼 멈추지 않았다. 무슨 종교적 의식이라도 되는 양.

햅쌀은 올해 수확한 벼를 찧어 나온 쌀이다. 그런데 햅과 쌀의 물리적 결합으로 이뤄진 이 단어가 좀 수상하다. 쌀은 알겠는데, 햅이 낯설다. 그해 수확한 과일이나 곡식 등에 붙이는 접두사는 ‘당해에 난’ ‘얼마 되지 않은’을 뜻하는 ‘햇-’이어서다. 햇사과와 햇과일처럼 ‘햇쌀’이어야 맞지 않을까. 그러고 보니 찹쌀차진(끈기가 많은) 쌀, 멥쌀메진(끈기가 적은) 쌀, 좁쌀조의 낱알도 마찬가지다. 

고려사람들의 말에 관심이 많았던 송나라 사람 손목孫穆은 <계림유사鷄林類事>를 펴냈다. 고려 견문록이자 어휘집인 이 책에는 다양한 고려말 단어와 그 발음이 한자로 표기돼 있다. 쌀도 그중 하나다. ‘米曰菩薩미왈보살’, 고려사람들은 쌀을 ‘보살’이라고 발음한다는 내용이 책에 실려있다. 조선이 들어서고 훈민정음을 창제한 세종대왕은 쌀을 ‘ㅄ’로 썼다.

이런 기록에 기대어 볼 때, 고려와 조선 사람들은 대체로 쌀을 ‘브쌀’ 정도로 발음했나 보다. 이 말을 여러 차례 소리 내 읽어보니 손목이 쌀을 보살로 표기한 이유를 알겠다. 지금은 사라진 ‘ㅂ’이 햅쌀과 찹쌀, 멥쌀 등에 남아 있는 셈이다. 국문학자 한성우 교수가 책 <우리 음식의 언어>에서 주는 답이다.

덧붙여 한 교수는 밥과 쌀에는 사투리가 없다고 전한다. 두 단어가 우리네 먹는 문화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기 때문이란다. “밥이 그렇듯이 쌀도 우리에겐 생명의 말이다. 아주 오랜 세월 동안 꿋꿋이 이어져 내려온”이라며. 

 

쌀의 신선도는 쌀 표면의 지방산 양으로 측정한다. 쌀을 찧어놓으면 대기 중의 산소가 쌀 표면에 붙어 산성화되는 화학반응을 일으킨다. 산도가 낮을수록 좋은 쌀로 불리고, 밥맛도 좋다. 산도 10ph 이하는 최고급 쌀로 평가된다. 산화가 덜 된 햅쌀로 지은 밥이 맛있는 이유다. 햅쌀은 맛이다.

어머니는 가을마다 왜 그 많은 햅쌀을 들이신 걸까. 책임감 때문이었으리라. 가을이 저물 무렵 부모로서 가족을 위해 쌀을 들여놓는 일은 가장 중요한 의례였을 것이다. 어머니에게 햅쌀 구매는 김장과 함께 가족의 끼니 걱정을 더는 가장 든든한 토대였다. 그러고 보니 햅쌀을 집에 들인 날 어머니의 목소리가 더 짱짱했던 것도 같다.

어머니는 봄이면 지난 가을에 들인 쌀로 떡을 만드셨다. 쌀이 묵었다는 이유였다. 묵은쌀은 어머니가 떡을 좋아하는 마음을 들키지 않으면서 많은 떡을 할 수 있는 적절한 구실이 됐다. 햅쌀로 떡을 빚는 일은, 당신이 낳고 자란 농촌공동체, 쌀 한 톨도 허투루 쓰지 않았던 농사공동체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하셨던 모양이다.

어머니에게 햅쌀의 사용가치는, 맛 말고도 책임감과 기호, 예의 사이를 넘나드는, 설명하기 어려운 그 무엇이 있었다. 그 무엇들이 굳어져 햅쌀 사 들이기는 받드는 일로, 의례 같은 것으로 자리 잡았을 것이다. 손목의 ‘쌀은 보살이다’는 말이 새롭게 보인다. 어머니에게 햅쌀은 보살, 즉 든든한 신앙이었던 것 같다.

몇 해 전부터 마트에서 쌀을 1포대씩 사서 어머니에게 드리고 있다. 도정 날짜를 봐서 1달 안쪽인 쌀을 주로 구입한다. 그 뒤로 어머니의 햅쌀 대량 구매는 없어졌다. 대신 쌀이 떨어지면 전화로 아들을 호출하신다. 사라진 연례행사와 함께 어머니의 보살이 주는 든든함도 사그라들지 않았기를. 그나저나 어머니는 요즘 뭘로 떡을 해드시나. 주말에는 쫄깃한 인절미를 사서 찾아봬야겠다.

글 노해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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