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의 공간

화이부동和而不同. 조화를 이루되 같아지지는 않는다. 산, 들, 강, 바다를 두루 거느린 전남의 지리를 요약하는 말로 적절하다. 전남은 다양성이 공존하는 공간이다. 그 다양성은 고립되어 있지 않고 연결되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그래서 ‘화’가 가능하다.

고려 전기까지 전라도는 해양도였다. 바다의 기세가 좋아서 해양이라는 정체성을 부여했을 것이다. 하지만, 문화가 융성하려면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영산강, 탐진강, 섬진강, 동진강, 만경강 등등, 바다와 연결되는 여러 개의 강줄기들이 종횡으로 엮여 사람 사는 마을에 양분을 공급했다. 독자성을 유지하면서 활발히 소통하는 화이부동이 문화의 비옥한 터전으로 작동했다.

영암군 월출산과 너른 들. 영산강 유역은 바다까지 두루 갖춘 비옥한 터전을 바탕으로 찬란한 마한 문화를 꽃피웠다.
영암군 월출산과 너른 들. 영산강 유역은 바다까지 두루 갖춘 비옥한 터전을 바탕으로 찬란한 마한 문화를 꽃피웠다.

강원과 경북은 산이 강하고 들이 약하다. 섬문화는 사실상 없다. 경남은 전남에 가까운 일부 지역을 제외하면 섬이 귀하다. 경기, 충청은 산과 들이 적절하고 섬 또한 귀한 정도는 아니나 먼 바다의 격랑이 아쉽다. 전라도는 다 있다. 풍족하다.

이 풍족함이 세계 최대의 고인돌 군락(장흥·화순)을 만들었고, 당대 최고 수준의 마한 문화를 탄생시켰다. 전라도의 생산력을 연료로, 별처럼 떠 있는 섬들을 징검다리 삼아 장보고는 한·중·일 삼각무역 체제를 성공적으로 운용했다. 다양성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전라도는 밖을 안으로 수용하고, 안을 밖으로 내보내는 열린 플랫폼이었다.

플랫폼은 문화에는 강하지만 정치에는 약하다. 문화는 화의 논리에 친근하고, 갈등 해결의 수단으로 외교적 방식을 선호한다. 정치, 특히 고대 정치는 동의 논리를 추구하며, 갈등 해결의 수단으로 군사적 방식을 앞세운다. 대규모의 사람집단이 한 몸처럼 움직이는 군대야말로 동의 결정체이다. 전라도는 군사적 충돌에서 이겨본 적이 없다. 갈등 해결의 외교적 방식이라 할 수 있는 ‘선거민주주의’ 시대에 이르러 정치적 중심성을 겨우 확보했다.

전남 중부 탐진강을 따라 형성된 강진의 너른 들판
전남 중부 탐진강을 따라 형성된 강진의 너른 들판

 

‘호남이 없으면 국가도 없다’의 속뜻

풍족한 곳이어서 탐이 난다. 세력과 문화가 왕성하니 침략이 쉽지 않다. 안팎으로 열린 세계여서 그 역량을 가늠하기 어려워 늘 불안하다. 삶의 바탕이 튼튼하여 중앙권력에 쉬이 고개를 숙이지 않는 뻣뻣함이 불편하다. 전라도에 군침을 흘리는 ‘외부’의 시선이 이러했을 것이다. 공격의 빌미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전라도를 윤리적으로 추락시켜야 한다.

고려시대 전라도는 “배역의 산세를 띤 반역의 땅” (훈요10조)이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인풍이 짐승처럼 교만하여 사대부가 귀의할 수 없는 땅”(이익)이자 “지역이 멀고 풍속이 더러워 살만한 곳이 못된다”(이중환)고 했다. 근거는 없다. 유일한 이유가 서울을 향해 활을 당기고 있는 ‘배역산세’인데 그것은 서울을 ‘중심’으로 놓았을 때만 가능한 이야기이다. 요즈음으로 치면 가짜뉴스이자 악랄한 지역주의이다.

이순신은 “호남이 없으면 국가도 없다若無湖南是無國家”고 했다. 호남의 곡창에서 식량과 무기를 조달할 수 있어 나온 말이었다. 또한, 요샛말로 치면 ‘민관합동’으로 해전을 승리로 이끌어 왜군의 북상을 막았기 때문에 성립할 수 있는 문장이었다.

이순신의 말은 한국 근현대사 전체를 통해 증명되었다. 동학농민전쟁-한말의병투쟁-5·18민중항쟁으로 이어지는 의로운 저항은 늘 전라도의 몫이었다. 단순한 항거가 아니었다. 마땅히 가야 할 내일의 모습을 이념적으로 제시한 정신 투쟁이기도 했다. 동학은 사람 중심 평등사회를 지향하는 근대정신을 밝혔고, 한말의병투쟁은 임시정부로 이어져 자주국가의 기원이 되었으며, 5·18민중항쟁은 오늘날 서구를 능가하는 민주주의의 원형을 다듬은 사건이었다.

산, 들, 강, 바다가 조화롭게 공존하는
터전의 화이부동이 만든
전라도의 다른 이름, 민주화의 성지

전남택리지는 발아래를 파헤쳐
나, 혹은 우리의 근원을 탐색했던 작업

따뜻하지만 물러서지 않는다

산하山河의 형질이 곧바로 인문환경을 규정짓지는 않겠지만, 핵심적인 요인들에 적잖게 영향을 미친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전라도 공간의 어떤 형질이 전라도의 정신과 문화 형성에 깊이 관여했을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의 가장 상징적인 실체는 무등산이다.

없고 있음이 고른, 그래서 없거나 있는 것을 구분하는 것조차 무의미하다는 ‘무등無等’이다. 평등과 평화의 다른 말이 무등이다. 생명을 품어 키우는 ‘부드럽고 따뜻한 흙’이라는 무등산의 특질에 닿는다.

그러나 세상이 늘 반듯한 것만은 아니어서 생명을 침해하는 불온한 것들과 싸워야 할 때도 있다. 무등산 중턱의 너덜겅, 정상부에 우뚝 솟은 입석대, 서석대, 광석대와 같은 바위들이 ‘악귀에 맞서는 불’의 기운을 전라도 사람들에게 제공해 주었다. 물과 불, 전혀 다른 성질의 것이 무등으로 어울린다는 점에서 화이부동을 다시 확인한다.

이런 논리는 객관적 증거가 모호한 신화적 세계관으로 비판받을 수 있다. 무등이 전라도를 만든 게 아니라, 전라도가 무등이라는 실체를 상징화하여 자신을 설명하는 방식으로 이해하면 좋겠다. 한 시인이 그렇게 했다. 

금남로의 핏자국이 채 씻기지도 않은 1980년 6월 2일 김준태 시인은 “아아 광주여, 무등산이여… 우리들의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라고 절규했다. 시의 배경 이미지가 무등산이었다. 적절할 뿐 아니라 정확해 보였다. 

광주와 전남은 행정구역상으로는 독립되어 있다. 근래 들어 화 하기가 어려운 단절의 위기까지도 느낀다. 시계를 조금만 뒤로 돌리면 광주와 전남은 같은 내용의 다른 형식이었다. 일제강점기 광주의 인구는 15만 명 안팎이었다. 1980년에는 85만 명, 현재는 140만 명이다. 출생을 통한 자연증가분이 아니었다. 광주 인구의 주축은 전남에서 이주한 사람들이었다. 비유하자면 전남은 ‘광주의 뿌리’라 할 수 있다. 광주는 도시로 압축된 전남이고, 전남은 들과 바다로 펼쳐진 광주라 할 수 있다.

완도군 청산도 양식장
완도군 청산도 양식장

<전남택리지> 연재를 마치며

총 10회에 걸친 연재의 끝이다. 전라도의 여러 터전들을 사람의 삶과 연관시켜 이야기했다. 겁도 없이 웅얼거렸다. 겁이 없었기 때문에 무모하게 말할 수 있었다. 다만 공유하고 싶었다. 우리가 얼마나 아름답고 자랑스러우며 멋진 고을에서 살고 있는지를.

끝의 주제를 화이부동으로 잡았다. 공자의 <논어>에서 가져왔다. 유교의 언어로 읽을 필요는 없다. 개성을 존중하면서도 소통과 합의를 강조하는 현대민주주의의 지향에 꼭 맞는 문장이다. 전라도의 다른 이름이 ‘민주화의 성지’이다. 전라도 터전의 화이부동이 ‘민주화의 성지’를 가능케 하지 않았을까, 라는 가설을 세웠고 설명을 시도했다. 그리고 끝에 이르렀다.

설득력있는 설명이 됐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어떤 정신도, 어떤 열정도 하늘에서 떨어지지는 않는다. 딛고 선 발아래에서부터 시작된다. 그 발아래를 파헤쳐 전라도 사람인 ‘우리’, 혹은 ‘나 자신’의 근원을 탐색하는 작업이었다. 설명체계가 허술했더라도 의미있는 노력이었을 것으로 믿는다.

연재를 마친다. 비포장도로처럼 들쑥날쑥한 이야기들을 마지막까지 실어준 <함께 꿈꾸는 미래> 편집진에게 감사드린다. 어설픈 주장들을 너그러이 읽어주었을 독자들에게도 머리 숙여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글 이정우 사진 신병문

저작권자 © 전남교육소식 함께꿈꾸는미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