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새우

식탁 가운데 휴대용 가스버너가 놓인다. 그 위에 (대체로) 어두운 색의 코팅 냄비(또는 팬)가 올려진다. 버너에 불을 당기자 곧 냄비의 투명 유리 뚜껑 안쪽으로 뿌옇게 김이 서린다. 툭툭, 냄비 안에서 제법 둔탁한 소리가 나기 시작하더니 2~3분 정도 요란하다.

똑똑, 김이 물방울을 이뤄 아래로 떨어지고, 냄비 내부의 모습이 조금씩 드러난다. 알루미늄 호일 위의 소금밭이 하얗다. 거기서 허리를 잔뜩 움츠린 채 익어가는 씨알 굵은 새우들이 발갛다. 식탁에 앉은 이들의 눈은 냄비에 고정, 입보다 먼저 눈이 새우를 탐하고 있다.    

신안 왕새우
신안 왕새우

한해 이맘때면 심심찮게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소금구이가 전부는 아니다. 회로 먹고, 라면에 섞고, 튀김에 머리버터구이까지 응용요리가 펼쳐진다. 새우 요리로만 금세 한 상이 뚝딱 차려진다. 오도독 입안 가득 씹히는 식감, 달달함에 적절히 간이 밴 ‘단짠’의 대표 맛, 눈도 즐거운 푸짐한 양 덕분인지 사람들의 애정도 각별하다. 

왕새우. 길거리 음식점 수족관에서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살아 있는 새우는 이렇게 불린다. 가을이면 가게 안팎에 ‘왕새우구이’라는 문구가 붙기 시작한다. 그 크기와 실함 때문에 ‘왕’자가 들어있어도 무리는 아닌 듯싶다. 

하지만 왕새우라는 말이 아직 사람들 사이에 뿌리를 내린 것 같지는 않다. 수년 전에는 왕새우 대신 ‘대하大蝦’ 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코로나 사태 이전에 여러 지역이 ‘대하축제’를 연 것이 대표적이고, ‘대하구이’라는 메뉴를 붙여놓은 가게도 꽤 있었다.

요새는 대하가 쏙 들어가고 왕새우라는 말이 우점종이다. 사실 대하는 왕새우와 다른 종이다. 생김새와 색깔도 다르다. 대하가 없어진 것은 아니다. 그물로 잡는 탓에 살아 있는 놈들을 거의 볼 수는 없을 뿐.  

왕새우의 이름은 따로 있다. ‘흰다리새우’이다. 지구 반대편 멕시코와 페루 앞바다가 고향이다. 바닷물을 대기 쉬운 우리나라 서남해안가에서 많이 양식되고 있다. 최근에는 항생제를 쓰지 않고 미생물을 이용한 ‘바이오플락’ 방식의 양식이 보급돼 대량으로 길러지고 있다. 바다에서 떨어진 내륙에서 양식에 성공했다는 소식도 간혹 들린다. 신안군에서 전국 생산량의 절반가량을 담당하고 있다는 통계도 있다.  

왕새우로 차린 한 상(ⓒ신안군)
왕새우로 차린 한 상(ⓒ신안군)

오래전부터 서남해안 사람들은 대하와 보리새우 같은 큰 새우를 즐겨 먹었다. 여름이 지나고 찬바람이 불면 맛이 차는 큰 새우들은 가을의 별미였다. 입소문을 타고 전국에서 수요가 늘자 대하가 양식되기 시작했다. 아쉽게도 대하는 감염병과 스트레스에 취약했다.   

2000년대 중반부터 양식에서 흰다리새우가 대하를 대신하기 시작했다. 흰다리새우는 맛과 영양 그 어느 것에도 뒤지지 않았다. 가격 경쟁력마저 빼어났다. 요즘 시세로 대하의 1/3 정도면 살 수 있다.     

흰다리새우는 결국 왕새우로 남을 것 같다. 아니 그러길 바란다. 생물학적 분류야 어떻든 흰다리새우라는 이름은 생산·판매자, 소비자 모두에게 마뜩잖다. 공급자 입장에서 ‘흰다리’라는 수식어는 새우의 장점인 크기와 맛, 푸짐함 그 어느 하나도 담아내지 못한다. 한때 상인들이 흰다리새우에 ‘큰 새우’라는 뜻의 ‘대하’를 이름으로 빌려 썼던 이유가 이해되는 대목이다. 

소비자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흰다리새우 먹었다’와 ‘왕새우 먹었다’라는 말에는 하늘과 땅만큼의 틈이 느껴진다. 수확과 풍요의 계절 가을에 어울리는 꾸밈말은 ‘흰다리’보다는 ‘왕’일 성싶다. 서로 타협을 본 적은 없겠지만, 왕새우라는 말은 생산자도 소비자도 아쉬움이 없어 보인다.    

양과 질 모두에서 맛이 넘치는 가을이다. 왕새우는 누구나 부담 없이 다양하고 푸짐하게 즐길 수 있어서 결실을 거두고 나누는 가을과 어울린다. 왕새우 요리 두세 가지면 그 어떤 진수성찬도 부럽지 않다. 낯선 바다에서 왔지만, 이제 왕새우는 어엿한 우리의 가을 음식이다.

 

글 노해경

저작권자 © 전남교육소식 함께꿈꾸는미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