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 문학의 어머니, 박화성

1988년 1월 30일, 서울 평창동의 밤은 오래 어두웠다. 목포의 별 하나가 거기서 긴 생을 마감하고 하늘로 졌다. 한국 최초의 여성 장편소설 작가로 일컬어지는 박화성이었다. 우리 나이로 여든 다섯이었으니 오래 살았고, 세상에 남긴 족적도 매우 컸다. 생에 대한 아쉬움 같은 것은 크게 없을 죽음으로 읽혔다.

박화성 선생은 그의 임종을 지키는 가족들에게 마지막 유언을 남겼다. “나를 살려내라!” 그 말이 마지막이었고, 유언과 다르게 그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삶 속에 죽음이 있고, 죽음 속에 다시 삶이 있다. 선생이 살려내라고 했던 것은 자신의 목숨이 아니었을 것이다.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고, 폭설이 흩날리는 풍경 같은 사소한 일상성을 그는 살려내고 싶었을 것이다. 온 생을 단정하게 살았던 박화성의 유언 “나를 살려내라!”는 그렇게 삶의 역설이었고, 남겨진 사람들에게 다가올 생의 어떤 기호로 느껴졌다.

 

한국 최초의 여성 장편소설 작가, 박화성 선생(사진_박화성문학기념관)
한국 최초의 여성 장편소설 작가, 박화성 선생(사진_박화성문학기념관)

박화성 선생에게는 따라 갈 길이 없었다. 자신이 걷는 길이 첫 길이었고, 뒤에 따라오는 후배들의 좌표가 됐다. 그는 목포 문학의 시작이었고, 그의 어깨 위에 올려진 소금 짐은 언제나 무거웠다. 더구나 그는 여성이었다. 그 시대는 여성과 남성이 할 일을 따로 구분해 놓고 있던 때였다. 그는 시대에 굴복하지 않았다. 그는 여성에 대한 편견과 무시에 대해 소설을 무기로 맞섰고, 결국 시대를 아름답게 관통해 냈다.

 

박화성 선생은 후배들의 좌표가 됐다. 그는 여성에 대한 편견과 무시에 대해 소설을 무기로 맞섰다.
박화성 선생은 후배들의 좌표가 됐다. 그는 여성에 대한 편견과 무시에 대해 소설을 무기로 맞섰다.

 

목포 문학이 시작된 ‘세한루’의 밤

박화성 선생의 숨결을 느끼기 위해 목포 용당동 ‘세한루’에 간다. 2013년 목포시가 복원한 선생의 자택인데, 너무 새 것이어서 고풍의 숨결이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선생은 ‘세한루’에서 1937년부터 1962년까지 살았다. 작품 활동을 위해 할애한 날도 적지 않았지만 ‘세한루’에서 그는 세 아이의 어머니로 산 시간이 훨씬 더 길었다. 1947년에는 첫 단편집 〈고향없는 사람들〉을 펴내고, 목포의 후배 문인들과 ‘세한루’에서 출판기념회를 열기도 했다.

 

박화성 선생의 친필 원고
박화성 선생의 친필 원고

박화성 선생은 목포 문학의 출발이며 어머니였다. 훗날 목포 문학의 거장으로 성장하는 김우진, 차범석, 김현, 김지하, 최하림 등이 선생의 그늘에서 자랐다. 후배들이 ‘세한루’를 찾아오면 그는 단정하게 한복을 입고 얼굴 화장을 한 뒤에야 그들을 맞았다. 술도 마시지 못하는 그는 거한 술상을 항상 손수 차려내 왔고, 후배들과 해가 지는 줄 모르고 시대의 아픔과 문학에 대해 논했다.

시작의 무거움이 컸을 것이다. 그는 1904년 목포 죽동에서 태어났다. 선창에서 객주집을 했던 아버지 덕에 가정은 유복했다. 박화성 선생은 어려서 천재 소리를 귀가 닳도록 들었고, 네 살 때 이미 한글을 깨우쳤다. 그의 나이 겨우 열둘이던 목포 정명여학교 시절, 소설 <유랑의 소녀>를 써냈을 정도였다. 박화성 선생이 본격적으로 문학의 길로 들어선 때는 1922년이다. 영광사립중학원 교사로 근무하던 시절인데, 거기서 시조시인 조운을 만났다. 조운은 박화성의 문장을 금방 알아봤다. 시를 주로 쓰던 그에게 산문을 권했고, 박화성은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박화성 선생은 어려서부터 천재 소리를 귀가 닳도록 들었다. 그의 나이 겨우 열둘이던 목포 정명여학교 시절, 소설 유랑의 소녀를 써냈을 정도였다.
박화성 선생은 어려서부터 천재 소리를 귀가 닳도록 들었다. 그의 나이 겨우 열둘이던 목포 정명여학교 시절, 소설 〈유랑의 소녀〉를 써냈을 정도였다.

박화성 선생은 1925년 <추석 전야>를 발표하고 등단했다. 조운의 천거를 받은 이광수가 그의 글을 <조선문단>에 소개했고 정식 발표가 되면서 박화성의 소설 인생이 시작됐다. 이광수가 박화성의 소설 <추석 전야>에 대해 쓴 추천사는 이러했다. “기교는 덜 되었지만 눈물로써 쓴 작품이다. 우리 누이들 중에서 이렇게 정성 있고 힘 있는 이를 만나는 것은 심히 기뻐하지 아니할 수 없다.” 글보다 사람 박화성에 대한 애정이 느껴지는 추천사였다.

 

모국어를 제 몸처럼 사랑한 사람

박화성 선생의 소설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우리나라 여성 최초의 장편소설 〈백화〉를 떠올리지만, 사실 그의 모든 소설들은 낮은 자들의 시선에 마음이 닿아 있었다. 일제 때는 식민지 조국의 땅에서 신음하는 민족의 아픔을 썼고, 해방이 된 후에는 아프고 천대받던 하층민들의 삶을 애정으로 보듬었다. 

그의 시선과 작품의 이력은 삶 속에서 가슴으로 만났던 사람들과의 관계가 매우 깊게 작용한 결과다. 그에게 제대로 된 문학의 길을 보여줬던 시조시인 조운은 1919년 영광 독립만세시위, 1937년 영광삐라사건을 일으킨 주역이었다. 첫 번째 남편 김국진도 삐라사건으로 옥살이를 한 뒤 간도로 망명했다. 박화성 선생보다 네 살이 많았던 오빠 박제민 역시 1926년 노동조합 선동 혐의로 붙잡혀 감옥에 삶을 저당 잡힌 시간이 적지 않았다.

특히 그는 모국어를 제 몸처럼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1930년대 후반부터 일제는 창씨개명을 강요하고, 작가들에게는 일본어로만 글을 쓰게 했다. 그는 모국어로 글을 쓰지 못하게 된 순간 절필했다. 일본의 잡지사가 평소 원고료의 10배를 주겠다며 청탁을 한 적도 있었지만 그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수필 같은 짧은 글도 일본어로는 쓰지 않았고, 그의 절필은 1945년 해방이 될 때까지 이어졌다.

 

박화성 선생의 집필실
박화성 선생의 집필실

돌아보면 박화성 선생은 완벽한 삶을 추구했다. 나이가 들어 손이 늙었을 때는 그 손을 남에게 보이기 싫어 여름에도 장갑을 끼고 다녔을 정도였다. 그 품성을 지켜 나가는 게 결코 쉽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1963년 펴낸 그의 자서전 〈눈보라와 운하〉를 보면 알 수 있다. 박화성 선생은 “곁에서 거들어 주는 아무런 힘도 없이 나는 나 홀로 메마른 땅을 파서 운하를 만들고, 물만이 아닌 피와 땀으로 내 뱃길을 마련하여서 눈보라와 비바람 속에서의 길고 먼 항해를 해온 것이다”고 썼다. 

시작의 무게를 온 몸으로 짊어진 박화성의 삶, 그의 항해, 많이 외로웠겠다. 

 

글 정상철  사진 장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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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국어(한국교육개발원) 2학년 1학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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