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지

“살아있는 걸 먹고 싶다고 했다.” 오대수는 15년 동안 사설 감옥에 갇혀있다 풀려난다. 갇힌 이유도 풀려난 연유도 모른 채. 일식집에 가서 ‘살아있는 것’을 찾는다. 요리사인 미도는 접시에 산낙지를 내온다.

휴대폰이 울리고, 그 유명한 대사 “누구냐 넌” 등등의 대화가 이어진다. 통화에서 속 시원한 답을 듣지 못한 오대수는 더 화가 난다. 분풀이로 한 손으로 산낙지를 움켜쥐고 입으로 머리를 뜯어내 잘근잘근 씹는다. 분이 덜 풀린 듯 손에 남아있던 낙지 몸통과 다리를 통째로 입에 욱여넣는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 <올드보이>의 한 장면이다. 외국인들에게는 꽤나 끔찍한 씬scene이었다고 한다. 영화 속 ‘오대수의 낙지’는 살아있는 것을 파멸하고 싶어하는 주인공의 심리를 보여주는 상징 장치였다. 감독의 의도가 무엇이든 익숙하지 않은 ‘낙지 문화’가 서구 관객 일부에겐 충격을 줬다.

 

갯벌에서 서식하는 무안낙지는 맛이 좋고 영양이 풍부하기로 유명하다.
갯벌에서 서식하는 무안낙지는 맛이 좋고 영양이 풍부하기로 유명하다.

낙지는 생명력이다. 살아있는 것, 원기元氣의 대명사로 통한다. 익기양혈益氣養血, 기를 더하고 피를 맑게 하는 음식으로 알려져 있다. 사람에게만 좋은 건 아니다.   ‘소 중에 마르고 쇠약해진 놈에게 석거石距 네다섯 마리 먹이면 바로 건실해진다.’ <자산어보>의 구절이다. ‘석거’는 낙지의 옛말이다. 이 문장은 낙지의 생명력을 드러내는 관용구로 굳어졌다.  

목포·무안·신안 등 전라도 서남해안 사람들은 낙지를 ‘갯벌의 산삼’으로 불렀다. 아이를 낳은 산부에게 낙지를 넣은 미역국을 끓여줬다. 일부 목포 사람들은 여전히 믿는다. “겨울을 거뜬히 나려면 가을에 세발낙지 서너 마리는 먹어둬야 한다”고.  

낙지는 또한 맛이다. 원기보다 맛에 더 많은 관심을 쏟은 옛 기록들이 많다. 정약용은 “어촌에서 낙지로 국을 끓여 먹는데, 붉은 새우와 맛조개는 맛있는 축에도 끼지 못한다”고 적었다. 

유배살이 중이던 허균은 음식책을 썼다. 서해안 낙지는 맛 좋기로 유명해 따로 여기에 적을 필요가 없다는 말이 담긴. <자산어보>에도 낙지의 맛은 비중 있게 다뤄진다. ‘맛은 달고 좋다’ ‘석거는 몸은 작지만 다리가 길며, 소금을 쳐서 구워 먹으면 매우 맛있다’ 등.

연포탕
연포탕

조선시대까지 사람들은 회, 국, 어포, 소금구이 등으로 낙지를 먹었다. 오늘날 회는 탕탕이로, 국은 연포탕으로, 구이는 호롱으로 이어지고 있다. 어포 대신 요즘엔 숙회, 볶음, 전골, 초무침 등이 추가됐다. 어느 음식이든 낙지는 달고, 낙지가 들어간 국은 시원하다. <올드보이>로 놀란 외국인들도 이제 산낙지를 K-푸드의 통과의례쯤으로 여긴다. 맛 때문일 것이다.

딱 하나 아쉬운 게 있다. 낙지는 작고 귀해서 맛은 있으나 포만감에서 늘 허전하다. 1970년대 낙지는 소와 만나 이 헛헛함을 벗었다. 낙지육회탕탕이낙지회+소육회, 갈낙탕낙지+소갈비 속 소고기는 낙지의 빈틈을 든든하게 채웠다. 달고 시원한 맛은 그대로 유지한 채. <자산어보> 속 소와 낙지의 궁합이 새로운 방식으로 오늘도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25년 전쯤, 함평 손불면의 해수찜에서 늦여름부터 초겨울까지 선배 일을 도왔다. 욕조에 끓인 바닷물을 대고, 장작 가마에서 갓 구워낸 유황성분의 돌을 몇 삽씩 퍼넣었다. 옷 갈아입을 엄두도 못 낼 만큼 땀이 줄줄 흐르는 고된 노동이었다. 

일이 끝나는 오후 5시 즈음이면 가끔 선배는 옆 가게에 전화를 넣었다. “낙지 잡은 거 있다요?” 통화 뒤 한 30분이나 흘렀을까. 옆집 아주머니가 쟁반을 들고 왔다. 마을 앞 갯벌에서 잡은 것들을 끓는 물에 살짝 데친 낙지 숙회였다. 서늘한 가을 바닷바람 한 자락과 함께 낙지를 삼켰다. 달았다. 고된 하루가 지워졌다. 올 가을에는 그때 맛을 다시 볼 수 있을까.

 

갯벌 낙지잡기ⓒ황영식(2015신안관광사진공모전 입선작)
갯벌 낙지잡기ⓒ황영식(2015신안관광사진공모전 입선작)

 

글 노해경   사진 무안군·신안군

 

※<올드보이> 오대수는 산낙지를 먹다 쓰러진다. 영화처럼 낙지 먹기를 흉내내는 것은 금물, 위험하다. 음식은 화풀이의 대상도 아니다. 천천히 맛있게 즐길거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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