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과 실존 사이의 홍길동 다시보기

허균 <홍길동전> 표지와 내지(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원자료 소장: 표지-국립중앙도서관, 내지-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중앙연구원)

1618년 6월 24일, 최초의 국문소설 <홍길동전>을 쓴 허균은 한양 서소문 어느 거리에서 능지처참을 당했다. 사지가 갈가리 찢겨 죽었다. 능지처참은 <경국대전>이 정한 최악의 극형이었다. 죄목은 역모였다. 그가 실제로 역모를 일으켜 왕(광해군)을 시해하려 했다는 증좌는 어디에도 없었다. 하지만 유자儒者의 나라에서 그가 살아 생전 품었던 생각은 역모에 매우 가까웠다. 그를 사형시키고 나서 실록은 ‘성품이 사납고 행실이 개, 돼지와 같았다. 허균은 천지간의 괴물이다’라고 기록했다.

허균은 진짜 괴물이었을까? 그의 생각을 따라 들어가면 실체를 만날 수 있다. 허균이 품은 뜻을 선명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작품이 있다. 소설 <홍길동전>이다. 그는 홍길동이라는 인물을 통해 조선의 신분제도를 정면 비판했다. 도탄에 빠진 민생을 버리고 자기 배만 불리는 지배계층의 면면을 적나라하게 까발렸으며, 조선의 조세제도에 신랄한 의문을 제기했다. 무엇보다 도적 홍길동이 나라를 거의 집어 삼켰으니, 비록 꾸며낸 이야기라 하더라도 이는 명백한 역모였다.

하지만 홍길동이 소설 속의 인물만은 아니다. 연산군 때 실제로 충청도 일대를 호령했던 도적이었다. 조선의 실학자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장길산, 임꺽정과 더불어 홍길동을 조선의 3대 도적으로 꼽았다. 특히 소설처럼 실존의 홍길동도 신분계급이 서얼이었다. 허균은 역사에 기록된 도적 홍길동을 자신의 소설 속으로 들여 와 뒤틀린 나라 조선을 마음껏 비웃었던 것이다.

 

홍길동, 장성 아치실에서 태어난 실존인물

실존의 홍길동에 대한 역사의 기록은 세밀하지 않다. 홍길동은 <조선왕조실록>에 10번 등장한다. 그가 살았던 <연산군일기>에 5번, <중종실록>에 4번, <선조실록>에 1번이다. 실록에는  ‘강도 홍길동이 잡혔다’(1500년 10월 22일 기사)는 전언만 있을 뿐, 그의 도적질이 어떠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서술들은 빠져 있다. 홍길동은 지금껏 의적의 대명사이지만 실존의 그가 진짜 의적이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필시 사형 당했을 게 분명한 그의 죽음에 대한 기록조차 실록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여러 역사적 고증에 의하면 홍길동의 본관은 남양이다. 경성절제사를 지낸 홍상직의 아들이며, 위로 형이 두 명 있었다. 홍상직이 정실부인에게서 두 형을 먼저 낳고, 관기 출신의 비첩 옥영향으로부터 세 번째 아들로 홍길동을 얻었다. 실존의 홍길동 역시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천한 서얼 신분이었다. 

 

소설처럼 실존의
홍길동도 신분계급이 서얼이었다.
허균은 역사에 기록된 도적 홍길동을 
자신의 소설 속으로 들여 와 
뒤틀린 나라 조선을
마음껏 비웃었던 것이다.

홍길동을 모티브로 한 드라마 <역적; 백성을 훔친 도적> 포스터

많은 시간이 흘러 실존의 홍길동은 우리 안에서 부활했다. 1440년 홍길동은 장성 아치실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 마을에 가면 홍길동의 생가가 복원돼 있다. 장성군이 조선왕조실록 등의 고증을 거쳐 유적을 발굴하고 2003년 생가를 복원했다. 생가 복원 과정에서 출토된 유물과 함께 입체적인 영상물, 산채 체험장 등을 설치해 홍길동의 생애를 파악할 수 있도록 했다. 소설 <홍길동전>의 내용을 바탕으로 꾸민 홍길동테마파크전시관은 다양한 놀이체험 시설들로 아이들에게 인기가 높다.

생가 안, 모형의 홍길동이 무릎을 꿇고 앉아 있다. 집을 떠나며 아버지께 마지막 하직인사를 하는 소설 <홍길동전>의 한 장면을 재현한 모습이다. 그렇게 고향을 떠난 홍길동의 삶은 매우 창대했다. 비범한 재주로 분신술을 익혔고, 도적떼의 두목이 되었다. 그는 자신을 따르던 무리들을 일컬어 ‘활빈당’이라 했고, 팔도 수령들의 재물을 빼앗아 가난한 백성들에게 두루 나누어 주는 의적이 되었다.

조정은 그를 잡기 위해 모든 관군을 다 동원했다. 신출귀몰한 의적 홍길동은 잡히지 않았다. 도탄에 빠진 백성들은 홍길동에게서 희망을 품었다. 아버지 홍판서의 간곡한 청으로 홍길동은 조정과 화해하고, 임금은 그에게 병조판서의 벼슬을 내렸다. 임금이 서얼에게 고개를 숙인 셈이다. 왕과의 타협에 의해 조선을 떠나 무리를 이끌고 중국 남경으로 향하던 홍길동은 수려한 섬, 율도국을 발견한다. 따르던 무리와 함께 거기 머물러 살며 홍길동은 율도국의 왕이 되었다.

 

홍길동 전시관부터 산채체험, 캠핑장까지 모두 갖춘 홍길동테마파크
홍길동 전시관부터 산채체험, 캠핑장까지 모두 갖춘 홍길동테마파크

 

<홍길동전>, 혁명을 품다!

당대의 현실은 소설 <홍길동전>의 결말과 많이 달랐다. 허균이 소설로 투영한 이상의 국가 율도국은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었으며, 조선은 망하는 순간까지 백성이 주인 되는 나라가 아니었다. 허균을 처참하게 죽인 광해군이 인조반정으로 쫓겨났지만 허균은 역모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대한제국이 끝날 때까지도 그에 대한 복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허균은 그의 저서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에서 ‘호민론’을 펼쳤다. 그는 백성을 크게 세 부류로 나눴다. 먼저 항민恒民은 현실에 순응하는 백성이다. 원민怨民은 현실에 대한 불만이 쌓인 백성이다. 가장 중요한 것이 마지막 호민豪民인데, 사회를 바꾸기 위해 직접 나서는 백성을 이른다. 호민이 반기를 들고 일어나면 원민들은 소리만 듣고도 따라 일어난다. 결국 항민도 봉기에 참여할 수밖에 없다. 허균은 그리하여 국왕이 두려워해야 할 것은 오로지 백성뿐이라고 역설했다.

 

아버지께 하직인사를 하고 있는 홍길동 동상과 홍길동 전시관에 전시된 홍길동에 대한 기록들
아버지께 하직인사를 하고 있는 홍길동 동상과 홍길동 전시관에 전시된 홍길동에 대한 기록들

허균은 소설 <홍길동전>을 통해 ‘호민론’에 입각한 혁명을 꿈꿨다. 유학을 정치이념으로 삼은 당대의 권력자들에게 허균은 ‘괴물’일 수밖에 없었다. 허균이 죽고 오랫동안 조선의 백성들은 헐벗고 굶주렸다. 그러나 허균의 혁명이 아주 실패한 것은 아니었다. 조선의 ‘호민’들은 살기 위해 끊임없이 뭉쳐 민란을 일으켰고, 그 정신은 동학농민혁명까지 이어졌다. 홍길동은 우리 안의 ‘호민’이었다.

 

글 정상철  사진 장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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