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택리지] 피, 눈물, 설움이 스며든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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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택리지] 피, 눈물, 설움이 스며든 길
  • 전남교육소식
  • 승인 2021.09.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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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도1,2호선으로 본 호남 이야기

누군가 “길을 찾는다”고 했을 때, 그 길을 꼭 ‘road’로 해석해야 하는 건 아니다. 맥락에 따라 ‘way’일 수도 있다. road와 way는 모두 ‘길’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특별히 way는 ‘길’뿐 아니라 ‘방법’이라는 의미를 함께 지니고 있다. 우리 어법에서 ‘길’은 ‘way’에 가깝다. 물리적 실체로서 길과 상황을 풀어가는 방법 모두를 포괄하는 중의적인 언어가 ‘길’이다.

언어는 현실의 반영이다. 길이 중첩된 의미를 지녔다는 것은 실재로 길이 중첩된 역할을 했다는 뜻이다. 예컨대 초등학생의 하굣길은 집으로 가는, 그리고 출퇴근길 청년노동자의 버스 노선은 더 나은 미래를 준비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그래서 길을 살핀다는 것은, 그 길에 얽힌 삶의 방법들을 추출하는 작업이 된다.

목포시 옛 일본영사관(현 목포근대역사관) 앞에 가보면 ‘국도1,2호선 기점’ 표지석이 있다. 국도1호선과 2호선의 출발점 자리이다. 한반도 서편 평야지대를 가르며 북으로 뻗어 신의주에 닿는 길이 1호선, 남해안을 따라 부산광역시에 이르는 길이 2호선이다. 현재 국도1,2호선 기점은 좀 더 바다 쪽으로 확장되어 목포시 고하도(1호선)와 신안군 장산면(2호선)으로 바뀌었다.

목포에 있는 국도1,2호선 기념비. 식민지 시대의 상처를 증거하듯 일제건축물이 배경에 자리잡고 있다.

근대 기술이 총동원된 철도는 개통 구간과 시기가 분명하다. 비교하여 국도는 기왕에 있던 옛 길과 새로 넓힌 신작로를 잇는 방식이어서 개통 구간과 시기를 특정하기 어렵다. 국도1,2호선은 대략 일제강점 전후에 ‘연결’되었으며, 사람과 달구지와 자동차 등이 혼용하는 길이었다. 개보수가 계속 됐고, 부분적으로 노선이 변경되기도 했다. 최근에는 옛 도로(2차선)를 그대로 둔 채 새 도로(4차선)로 탈바꿈을 거듭하고 있다. 여기에 고속도로까지 가세하다 보니 옛 국도와 새 국도, 그리고 고속도로가 나란히 흐르는 구간이 많다. 옛 국도는 마을 사이를 굽이치고, 새 국도와 고속도로는 대체로 마을 바깥을 빠르게 지나간다.

 

쌀의 길, 국도1호선

국도1호선은 최초로 닦인 근대식 길이며, 국도 중 최장 거리이다. 무엇이든 가장 중요한 일을 첫 번째로 하기 마련이다. 제국주의는 비대해진 제 몸집을 수탈과 침략으로 유지했다. 대략 수도권 이남의 국도1호선은 쌀을 수탈하여 운송하는 길이었다. 이북의 국도1호선은 만주 침공을 위한 길로 쓰였다. 일제의 입장에서 수탈과 전쟁이 가장 중요한 과업이었다. 조선 사람들의 편리, 혹은 물류이동의 효율성을 우선 하여 일제가 국도1호선을 만든 건 아니었다. 

전남의 쌀은 목포항에, 전북의 쌀은 군산항에 모여 일본으로 건너갔다. 해마다 봄이면 벚꽃구경 인파로 북적이는, 이른바 ‘전군가도’는 국도1호선을 통해 모인 전북 일대의 쌀을 군산항으로 실어 나르는 길이었다. 그 길 양편에 일제는 벚나무를 심었고, 세월 지나 아름드리 고목으로 자라 구경거리가 되었다.

광주~장성 구간 국도1호선. 옛 도로를 그대로 두고 새 도로를 만들었다.
광주~장성 구간 국도1호선. 옛 도로를 그대로 두고 새 도로를 만들었다.
목포~나주 구간 국도1호선. 옛 도로를 넓혔다.
목포~나주 구간 국도1호선. 옛 도로를 넓혔다.

식민지 시절, 수탈의 거점으로서 목포와 군산은 근대도시로 성장했다. 조선의 쌀이 빠져 나가고, 일본 본토에서 생산된 공산품이 들어오는 통로였으니 항구도시는 사람과 돈으로 들썩였다. 그 들썩임은, 그러나 건강할 수 없었다. 피와 눈물이 범벅인 객주집 술판과도 같은, 병든 활력이었다. 이 같은 분위기를 끌어안아 이난영은 <목포의 눈물>을 노래했고, 채만식은 군산에서 <탁류>를 써내려 갔다.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며 / 삼학도 파도 깊이 숨어드는 때 / 부두의 새악시 아롱져진 옷자락 /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 - <목포의 눈물> 1절

‘오늘’이 아득하기는 일반이로되 그러나 그런 사람들과도 또 달라 ‘명일(明日)이 없는 사람들……이런 사람들은 어디고 수두룩해서 이곳에도 많다. - <탁류> 도입부

 

광복 후에도 계속된 호남의 고통

국도1호선과 국도2호선
국도1호선과 국도2호선

노래건 소설이건 밝지 않다. 눈물, 설움, 내일이 없는 삶이 당대 식민지 치하 조선인들의 처지였다. 제 손으로 지은 쌀을 제 새끼 입에 못 떠먹였다. 산더미처럼 쌓여 신작로를 따라 실려 가는 쌀가마니를 지켜보는 호남사람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주린 배를 움켜쥔 아이들은 눈물을 흘릴 힘조차 없어 큰 눈만 겨우 멀뚱거리는데.

해방이 되고 나서도 사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근대화를 본격적으로 추진한 대한민국은 수도권과 영남을 중심으로 산업시설을 집중시켰다. 낮은 임금을 유지하기 위해 정부는 쌀값을 싸게 책정했다. 이른바 ‘한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고도성장기에 넓은 농토를 가진 호남은 속절없이 무너졌다. 목포항과 군산항도 쇠락을 거듭했다.

가슴팍에 수십 개 바늘을 꽂고도 / 상처가 상처인줄 모르는 제웅처럼 / 피 한방울 후련하게 흘려보지 못하고 / 휘적휘적 가고 또 오는 목포항 - <목포항>, 김선우

일제가 물러난 지 50년 가량이 흐른 시점에 한 시인의 눈으로 본 목포항이다. 수탈당하던 옛 시절과 크게 다르지 않다. 곰의 가슴팍에 바늘을 꽂아 사람 몸에 좋다는 온갖 액을 뽑아내는 모습을 목포에 빚대었다. 잔인하지만 정확하다.

식민지 시절에는 쌀이 빠져 나갔다. 해방된 대한민국의 근대화 시기에 호남에서는 쌀뿐 아니라 사람들까지 자기땅을 떠났다. 수많은 사람들이 국도1호선을 타고 서울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국도2호선을 따라서는 부산을 중심으로 한 영남의 산업단지로 흘러갔다.

금호고속은 아시아 최대의 버스여객 회사다. 금호그룹의 출발은 ‘광주여객자동차’였다. 1960년대부터 지금까지 호남지역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타지로 이동했다. 명절이 되면 그들은 고향으로 왔다가 다시 객지로 갔다. 금호고속의 성장 배경에는 호남사람들의 ‘디아스포라’가 있었다. *디아스포라: 흩뿌리거나 퍼트리는 것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특정 민족이 살던 땅을 떠나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것. 이주.

 

폭도도로, 국도2호선

목포~부산으로 이어지는 국도2호선은 전남과 경남의 남단을 달리는 도로이다. 해남-강진-장흥-보성-순천-광양…… 으로 이어진다. 전남쪽 도로는 무리없이 일직선으로 이어지지만 경남쪽은 원활하게 흐름이 잡히지 않는다. 전남지역은 일제 시대 때 닦였고, 경남지역은 사실상 해방 후에 본격적으로 확보된 길이다. 본래적인 의미의 국도2호선은 전남 구간이라 할 수 있다. 국도2호선 역시 수탈통로이다. 국도1호선이 포괄할 수 없는 전남 남부 곡물의 유출경로였다. 특별히 국도2호선은 ‘폭도도로暴徒道路’라는 별칭을 갖고 있다. 

1909년 9월 일제의 군경은 약 2개월간 ‘남한대토벌작전’을 벌였다. 이때 남한은 전남을 의미했으며, 토벌의 대상은 의병이었다. 이미 무너진 나라였으나 의병들의 저항이 남아 있었다. 북부지방의 의병은 만주와 연해주 등지로 거점을 옮겼다. 남부지방 의병들은 산 깊은 지리산이나, 치고 빠지기 좋은 전라도 해안선 일대를 주요 거점으로 삼았다.

목포~광양간 고속도로(남해고속도로)와 영암~강진 구간 국도2호선
목포~광양간 고속도로(남해고속도로)와 영암~강진 구간 국도2호선

규모와 전투횟수 등에서 전남지역 의병들의 활동은 어느 곳보다 강하고 거셌다. 일제는 전남지역 의병을 ‘소탕’하지 않고서는 조선지배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일제 군경은 해군함정 4정을 동원해 해안지역을 봉쇄했고, 2,000여 명의 군대를 풀었다. 지리산권역에서 출발해 전남의 해안선까지 훑었다. 가두어 놓고 죽이는 방식이었다. 마을을 수차례 뒤지면서 조금이라도 의심이 가면 총을 쏘고 칼을 휘둘렀다. 백살일비, 100명의 민간인을 죽이면 그 속에 1명의 의병이 있다는 무자비한 초토화 작전이었다. 의병측 사망자가 17,779명, 부상자가 376명, 포로가 2,139명이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_남한대토벌작전(南韓大討伐作戰)

일제가 반일세력에 대해 벌인 최대 규모의 군사작전이었다. 이때 일본군에 잡힌 의병들은 강제노동을 당하기도 했는데, 그 대표적 사례가 해남-강진-장흥-보성-순천-광양으로 이어지는 도로작업이었다. 국도2호선이다. 일제는 이 도로를 ‘폭도도로’라고 불렀다.

국도1호선에 대응하는 영남쪽 국도는 없다. 한반도의 동쪽, 그러니까 부산에서 북쪽 수도권을 향해 흐르는 단일한 국도는 없다. 대신 경부고속도로(1970년 7월 7일 완공)가 있다. 고속국도1호선이다. 국도1호선이 식민지 수탈의 상징이라면, 고속국도1호선(경부고속도로)은 탈식민지 대한민국 경제성장의 상징처럼 여겨지고 있다. 호남고속도로는 고속국도23호선이다. 맨 먼저 수탈당했으나, 성장 대열에는 아주 늦게 합류한 셈이다.

마을 중심지를 관통하는 국도2호선
마을 중심지를 관통하는 국도2호선

 

과거, 현재, 미래를 잇는 길

사람, 물자, 문화, 낡은 통념과 새로운 바람들이 길을 타고 흐른다. 그 흐름이 세계를 변화시켜왔다. 길은 저절로 생기기도 했고, 뚜렷한 목적에 따라 사람 손으로 만들기도 했다. 어느 경우든 삶에 크게 영향을 미쳤으며, 그 영향의 진폭에 따라 숱한 이야기들이 탄생했다. 그래서 길을 살핀다는 것은 그 길에 담긴 사람살이의 애환을, 한 시대의 풍속을, 앞으로 펼쳐질 새로운 시간의 희망과 설렘을 짐작하는 일이기도 하다.

길은 신발이나 바퀴가 닿는 접촉면일 뿐 아니라 세계를 이해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실크로드를 통해 1천 년 전 동서간의 교류를 이해할 수 있듯, 국도1,2호선을 통해 우리는 최근세 전라도의 역사 속으로 걸어갈 수 있다. 너와 내가 무심코 다니는 길에 옛 시간의 화석들이 파편으로 박혀 있으니, 미래를 기획하는 방법 또한 그 길에 있을 것이다.

글 이정우  사진 장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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