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 들녘을 담은 총천연색 달콤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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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 들녘을 담은 총천연색 달콤함
  • 전남교육소식
  • 승인 2021.09.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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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양 전통한과

할아버지댁 광에는 대나무로 만든 소쿠리가 있었다. 온갖 달콤한 것들이 가득한 상자였다. 엿, 약과, 쌀강정, 깨강정, 유과…. 어린 손주들이 들이닥치면 할머니는 모양이 가장 잘 난 것들을 따로 챙겨두고, 소쿠리 채 들어 마루 한 쪽에 놓았다. 남겨놓은 예쁜 놈들은 명절 아침 차례상 위로 올라갔다.

명절 내내 입에 달고 살았던 한과의 제조 과정을 본 것은 10살쯤이었다. 할아버지댁 마당에서 흰 연기가 하루 종일 피어올랐다. 할머니는 가마솥에 식혜물을 졸이고 있었다. 커다란 주걱이 휘휘 움직일 때마다 단내가 요동쳤다. 점심 즈음이 되어서야 할머니는 아궁이에서 불을 뺐다. 

가마솥엔 갈색의 걸쭉한 액체가 담겨있었다. 조청이라 했다. 조청의 일부는 시장에서 튀겨온 쌀튀밥과 버무려졌다. 할머니는 미리 까둔 땅콩을 한 됫박 부어 넣었다. 쌀튀밥과 땅콩은 끈끈한 조청에 얽히고 설켜 한몸처럼 달라붙었다. 할머니는 훈김이 나는 덩어리를 삼베에 엎고 평평하게 골랐다. 보고만 있어도 입안 가득 침이 고였다. 그날 이후로도 며칠 동안 할아버지댁 마당에선 단내가 가시지 않았다. 

자연에서 채취한 천연재료로 맛과 색을 낸 형형색색의 한과들
자연에서 채취한 천연재료로 맛과 색을 낸 형형색색의 한과들

고등학생쯤 되었을 때 조부모의 한과들은 차례상에서 사라졌다. 대신 시장과 마트에서 사온 것으로 대체되었다. 엿도, 깨강정도, 유과도, 약과도 다른 지역에서 만든 것이었다. 그 중 으뜸은 담양군 창평면에서 생산된 한과였다. 이곳에서 만든 엿과 강정, 유과들은 치아에 달라붙지 않고 바삭하면서 사르르 녹았다. 색과 모양 모두 기품이 있어 고급 선물로 쳤다.

2000년대 이미 창평의 한과들은 독자적 브랜드를 가지고, 국내는 물론 국외에까지 이름을 떨쳤다. 일본, 중국, 홍콩 등 아시아뿐 아니라 미국과 중동 등 세계 각국으로 진출했다. 특히 중국에서는 폭발적 인기를 누려 수십 억 매출을 올렸다. 담양 한과업체들은 지역 중소기업으로 크게 성장했다.

한과는 쌀, 콩, 보리 등 곡물이 주재료여서 매우 귀했다. 예로부터 관혼상제 등 집안의 중요한 의례가 있을 때만 먹을 수 있는 음식이었다. 창평은 증암천, 창평천, 삼천천 등 물이 풍부하고 들판이 넓어 농사짓기가 용이한 곡창지대였다. 또, 예를 중시하고 풍류를 즐겼던 조선의 양반가가 군집해 문중제례도 잦았다. 풍성한 재료, 잦은 실전 무대 덕분에 특별한 전통기술이 탄생했다. 바로 한과의 기초라 할 수 있는 쌀엿과 조청 제조 비법이다.

이곳 담양 사람들은 이 비법이 “조선 전기 낙향한 양녕대군의 수행 궁녀들에 의해 전래된 옛 기법을 이어받았다”고 주장한다. 한과는 삼국시대부터 내려온 역사 깊은 주전부리다. 전라도가 지닌 풍요로운 식재료와 다채로운 조리법으로 창평의 한과는 궁중 비법이 아니라도 이미 최고였을지 모른다. 거꾸로 궁녀들이 이곳에서 배워 궁에 전래했을지 누가 알겠는가. ‘궁중비법 전래설’은 왕실의 권위를 중시여긴 당대의 분위기를 활용한 한과 생산자들의 바이럴 마케팅이 아니었을까 짐작해 본다.

한과 공장에서는 튀기고, 볶고, 버무리고, 담는 공정이 진행된다.
한과 공장에서는 튀기고, 볶고, 버무리고, 담는 공정이 진행된다.

 

전통한과의 맥을 잇다

창평 문화유씨 집안에 시집 온 박순애 명인은 시어르신들로부터 전통방식을 전수받았다. 지인을 위해 명절 선물, 폐백 등을 소량 주문생산하다, 1997년 전통식품으로 지정받아 마을 어귀에 60평짜리 조그마한 공장을 지었다. 이곳에서 한과 사업에 뛰어든 첫 번째 사람이었다. 

한과가 입소문이 나면서 규모가 커지자 집안 어르신들과 동네 분들이 발 벗고 도왔다. 이후 그는 엿강정 만드는 기술과 그 맛을 인정받아 대한민국식품명인 제33호에 지정됐다. 창평에는 그 외에도 명인이 2명 더 있다. 창평쌀엿 유영군 명인, 유과 안복자 명인이다. 창평에는 명인들이 세운 업체를 포함, 10여 개의 기업이 전통한과의 맥을 잇고 있다.

창평의 한과도 요즘에는 수작업이 많이 사라지고 기계화·공장화 되었다. 하지만 재료를 준비하고 맛을 내는 방식은 여전히 전통을 고수한다. 자연에서 채취한 천연재료만으로 맛과 색감을 내고 있다. 쌀, 콩, 깨 등 다양한 곡물을 튀기거나 볶아 조청에 졸이고, 호박씨, 땅콩, 호두, 잣, 말린 크렌베리 등 취향대로 견과류를 섞어 맛과 식감을 더했다. 오미자와 지초赤, 흑임자와 석이버섯黑, 송화와 치자, 울금黃, 흑미와 송기靑, 쑥과 청태綠 등으로 다양한 색깔을 표현하고 있다.

“백년초와 단호박, 검은콩 등 친환경 국내산 농산물을 써요. 최대한 지역농산물을 구매하고 있구요.” 박순애 명인은 지역 농협, 작목반에서 쌀, 잡곡 등 식재료를 공급받고 있다. 또한 마을 어르신, 결혼이주여성들을 장기 채용하는 등 지역과 동반 성장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간편하게 먹을 수 있도록 소포장된 다양한 한과들
간편하게 먹을 수 있도록 소포장된 다양한 한과들

 

새로움에 도전하다

“전통한과라고 옛날 그대로를 답습하기 보다는 요즘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들을 접목해야 합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더 자주 드시는 것이 우리 한과를 지키는 길이에요. 그래서 맛이나 형태, 포장도 젊은 세대의 취향에 적극적으로 맞추고 있답니다.” 박순애 명인의 말이다. 성城을 지키기 위해서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성 안에서 맞서거나 성 밖에 나가 싸워 이기거나. 박 명인이 우리네 전통한과를 지키는 방식은 두 번째 싸움에 가까웠다.

그는 한과가 지닌 ‘어른들의 간식’, ‘옛날 과자’라는 인식을 깨트리기 위해 젊은 세대를 겨냥한 다양한 퓨전한과들을 개발했다. 강정에 초콜릿이나 홍삼 등을 넣거나 견과류를 활용한 영양바, 우리밀 건빵에 꿀을 바른 꿀 건빵 등을 출시했다. 또 알록달록 색을 내 아기자기하게 빚은 한과도 인기를 끌고 있다. 언제든 간편하게 먹을 수 있도록 소포장해 한과가 눅눅해지는 단점도 극복했다. 최근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과자를 한식답게 재해석한 ‘이장님 과자점’이라는 브랜드도 새롭게 선보였다. 덕분에 한과의 유통처도 다각도로 변했다. 여전히 명절 주문이 50% 이상을 차지하지만, 평소에도 꾸준한 매출을 보이고 있다.

콩강정 만드는 비법을 전수중인 박순애 명인. 그 옆은 김지연 님.
콩강정 만드는 비법을 전수중인 박순애 명인. 그 옆은 김지연 님.

“지금 어린아이들에게는 제가 어릴 적 보고 느꼈던 것과 같은 추억들이 없어요. 기억이 없는데 무엇을 지키고 어떻게 이어가겠어요. 그래서 추억을 만들어주자 했죠.” 고향 마을의 어느 가정에서도 더 이상 엿이나 쌀강정, 약과를 만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박순애 명인은 어린이·청소년들을 위한 한과 만들기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지금은 코로나19로 운영이 원활치 않지만, 2019년까지 근 10년간 매년 3만 명 정도가 이곳에서 한과를 만들었다. 학생들은 자신들이 손수 만든 한과를 아끼는 사람들과 나눠 먹으며 어떤 추억을 쌓았을까. 그 추억이 내 추억만큼 달콤했기를 바라본다.

 

덧붙이는 글_ 한과 만들기에 도전하고 싶은 가정을 위해 박순애 명인은 강정을 추천한다. 쌀튀밥과 조청만 있으면 재료 준비 끝. 견과류를 좋아한다면 취향껏 챙겨놓자. 이제 조청과 식용유를 넣어 센불에 끓이다가 불을 낮추어 쌀튀밥을 넣고 졸인다. 뭉쳐지는 듯하면 평평한 곳에 붓자. 덩어리를 반듯하게 편 후 먹기 좋게 자르면 강정 완성~. 한과는 냉장실에 보관해야 한다. 꺼낸 다음 15분 후 즈음에 먹으면 부드럽고 감칠맛나게 목을 넘어 간다. 보관 시에는 단단히 밀봉할 것.

 

글·사진 조은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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