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 작가 정채봉

어린 그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늘 결핍이 마음에 엉겨 붙었다. 할머니가 양식을 구하러 갯벌에 나가면 어린 그는 하염없이 바다만 바라봤다. 바다가 부모였고, 바다가 위로였다. 맑은 날이면 집 근처에 있는 순천왜성에 올랐다. 성곽에 앉아 먼 바다를 보면 미세한 희망 같은 게 일렁였다. 바다를 보는 것만으로 한나절이 금방 지나곤 했다.

바다를 보며 어린 그가 떠올렸던 건 ‘엄마’였다. 그에겐 엄마가 없었다. 열일곱에 광양에서 순천으로 시집 와 열여덟에 그를 낳은 엄마는 꽃다운 스물에 생을 놓았다. 엄마의 얼굴은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갯벌 냄새 같은, 소금기 머금은 바람 냄새 같은, 엄마 품의 냄새만을 어린 그는 어렴풋이 기억했다. 바다를 보면 세상에 없는 엄마가 거기 있었다. 어린 그는 바다에 눌러 살고 싶었다. 큰 배의 선장을 꿈꿨다.

정채봉 선생은 순천 해룡면 신성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초등학교 3학년 때 광양으로 이사했다.
정채봉 선생은 순천 해룡면 신성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초등학교 3학년 때 광양으로 이사했다.

어린 그는 초등학교 3학년 때 엄마가 그를 낳았던 집을 떠나 광양으로 이사했다. 순천왜성과도 이별이었다. 유년의 삶을 지탱해 줬던 순천 해룡면 신성리 바다와도 떨어져 지내야 했다. 엄마에 대한 그리움은 더욱 커졌다. 

시간이 흘러 어른이 된 그는 어린 그에게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다. 바다에 대한 그리움을 담아 글을 썼다. 어린 그의 마음으로 동화를 썼다. 결핍을 희망으로 바꾸는 마법 같은 힘을 가진 그의 동화는 사람의 다친 마음을 구원했다. 정채봉, 동화로 세상을 바꾼 그는 눈을 감는 마지막 순간까지 ‘어린 그’로 살았다.

순천왜성
순천왜성과 신성리 바다


동화, 동심을 찾아가는 여정

정채봉이 세상에 오고, 이 나라의 동화는 격이 달라졌다. 작고 소소하며 아이들이나 읽는 문학 정도로 치부되던 동화가 영역을 넓혔다. 어른들이 그의 동화를 즐겨 읽었고, 세상이 동심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다. 정채봉에게 동화란 무엇이었을까? 생전에 그는 말했다. “동화를 쓰는 것이 나를 찾아가는 여정이고, 그 여정은 동심을 찾아가는 길이다.”

누구에게나 있는 엄마가 그에겐 없었다. 일본으로 떠난 아버지도 언제나 부재였다. 엄마처럼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것이 정채봉에겐 동화였다. 그의 산문집 <첫마음>에는 법정스님에게 쓴 편지가 담겨있다. 편지의 마지막 문장을 보면 정채봉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 “장마철입니다. 스님네 앞 도랑에 물소리가 크겠네요. 도랑물에도 안부를 전합니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도랑물에게도 안부를 건네는 맑은 사람이었다. 

그가 동심을 찾아가는 길에는 늘 엄마가 있었다. 그래서 정채봉의 동시 <엄마가 휴가를 나온다면>을 읽으면 ‘어린 그’가 짠해서 마음에 내내 밟힌다. 단 5분만이라도 어린 그를 꼭 안아주고 싶어진다. 

하늘나라에 가 계시는
엄마가
하루 휴가를 얻어 오신다면
아니 아니 아니 아니
반나절 반시간도 안 된다면
단 5분
그래, 5분만 온대도 나는
원이 없겠다

얼른 엄마 품속에 들어가
엄마와 눈맞춤을 하고
젖가슴을 만지고
그리고 한번만이라도
엄마! 하고 소리내어 불러보고
숨겨놓은 세상사 중
딱 한 가지 억울했던 그 일을 일러바치고
엉엉 울겠다.

평생의 그리움을 이렇듯 쉽고, 간명하며, 의미 깊게 표현한 시를 이전에도 이후에도 본 적이 없다.

순천만습지공원에 있는 정채봉 문학관
순천만습지공원에 있는 정채봉 문학관
문학관 내부
문학관 내부(왼쪽은 정채봉 선생의 작업실, 오른쪽은 문학관 내부를 구경하고 있는 외국인)


엄마의 다른 이름, ‘관세음보살’

정채봉은 대학 3학년이던 197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동화 〈꽃다발〉이 당선되며 문단에 나왔다. 그러나 작품활동은 거의 하지 않았다. <샘터>에 입사해 기자로 일했다. 1980년 광주에서 학살이 있기 전까지는 그랬다. 광주의 일은 그에게 큰 아픔이었고, 깊은 상처였으며, 인간에 대한 환멸을 심어 주었다. 그는 오래 아팠다. 무엇으로 그 상처와 슬픔을 치유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결론은 하나였다. 어른들이 아이였을 때 마음을 회복하는 것, 동심만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고 그는 믿었다.

등단을 하고 거의 10년만인 1983년 동화 〈물에서 나온 새〉를 발표하고, 1년 후 그는 세상을 뒤흔드는 동화 한 편을 내놓는다. <오세암>이다. 그 동화 한 편에는 그의 인생과 모든 사람의 길이 선명하게 담겨 있다. 그가 평생을 그리워 한 어머니도 담았다. <오세암>은 어쩌면 정채봉 그 자체였다.

정채봉의 인생과 모든 사람의 길이 담긴 동화 오세암 표지
정채봉의 인생과 모든 사람의 길이 담긴 동화 〈오세암〉 표지

오세암의 본래 이름은 관음암이었다. 다섯 살 아이가 부처가 되었다는 설화를 통해 오세암이 되었다. 눈 먼 누나 감이와 다섯 살 길손이는 엄마를 찾기 위해 길 위를 떠돈다. 감이와 길손은 우연히 설정 스님을 만나 설악산의 한 사찰로 들어간다. 길손은 절에서 늘 말썽을 부린다. 어느 날 설정 스님은 길손만을 데리고 관음암에 간다. 길손은 암자의 어느 방에서 관세음보살 탱화를 만난다. 길손은 관세음보살을 엄마라고 부른다. 설정 스님이 생필품을 사러 나간 사이 폭설이 내리고 길이 지워져 결국 길손은 관음암에 혼자 갇힌다.

눈이 녹고 설정스님과 누나 감이가 길손이를 구하러 왔을 때, 기적이 일어난다. 길손은 말한다. “엄마가 오셨어요. 배가 고프다 하면 젖을 주고 나랑 함께 놀아 주었어요. 누나, 나는 엄마를 만났어.” 그 순간 탱화가 살아난다. 하얀 옷을 입은 관세음보살이 나타나 조용히 길손이를 품에 안는다.

관세음보살이 말한다. “이 어린아이는 곧 하늘의 모습이다. 티끌 하나만큼도 더 얹히지 않았고 덜하지도 않았다. 오직 변하지 않는 그대로 나를 불렀으며 나뉘지 않은 마음으로 나를 찾았다. 나를 위로하기 위하여 개미 한 마리가 기어가는 것까지도 얘기해 주었고, 나를 기쁘게 하기 위하여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꽃이 피면 꽃아이가 되어 꽃과 대화를 나누고, 바람이 불면 바람아이가 되어 바람과 숨을 나누었다. 과연 이 어린아이보다 진실한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냐. 이 아이는 이제 부처님이 되었다.” 

관세음보살이 말한 길손이의 행동이 정채봉의 ‘동심’이다. 순수함과 순결함, 진실함을 모두 갖춘 마음이며, 어른이 되어서도 되찾고 싶은 그리움 같은 것이다. 올해는 정채봉이 간암으로 세상을 떠난 지 20주년이 되는 해이다. 늘 궁금했다. 정채봉은 하늘에서 엄마를 만났을까? 저 세상에서는 엄마와 함께 늘 행복했으면 좋겠다.

글 정상철  사진 장진주
 

관련 교과서  초등학교 4학년 1학기 국어(창비)

작가소개  정채봉

1946년 순천시 해룡면 출생. 197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동화 부문에 〈꽃다발〉로 등단. 대한민국문학상(1983), 새싹문화상(1986), 한국불교아동문학상(1989), 동국문학상(1991), 세종아동문학상(1992), 소천아동문학상(2000) 등을 수상했다. ‘성인 동화’라는 새로운 문학 장르를 개척했으며 한국 동화 작가로서는 처음으로 동화집 <물에서 나온 새>가 독일에서, <오세암>은 프랑스에서 번역 출간되었다. 동화 작가, 방송 프로그램 진행자, 동국대 국문과 겸임 교수로 열정적인 활동을 하던 중, 2001년 1월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선생의 문학정신을 기리며 2011년 순천시와 여수MBC가 정채봉문학상을 만들었으며, 매년 창작 중·단편동화 우수작을 선정해 시상하고 있다. 식은 순천시에서 열린다. 

 *월간 샘터 작가소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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