칙칙칙칙, 하얀 김이 밥솥 위로 새어나온다. 쌀이 익어가는 ‘단내’가 진동한다. 흙내 같기도 풀내 같기도 땀내 같기도 하다. ‘무담시*’ 배가 고파진다. 밥내에서 농부의 일년치 노동이 그려진다. 

전남에는 14만4,000여 가구의 농가가 생활하고 있다. 이중 절반 가량이 벼를 주소득원으로 삼고 있다. 지난해 쌀 생산량은 68만7,812톤. 전국 시·도 중 가장 많은 양이다.** 전라남도가 ‘농도’로 불리는 이유다. 체험 삶의 현장, 쟁기질부터 모심기까지를 담아보았다. *무담시=괜히 **2020년 기준, 통계청 ‘국가통계포털’

12월 쟁기질부터 시작

논갈이, 김홍도 "단원풍속도첩" 중, 국립박물관 소장
논갈이, 김홍도 "단원풍속도첩" 중, 국립박물관 소장

빈들이었을 때도 이미 벼농사는 진행된다. 농부는 탈곡이 끝난 볏단을 잘게 잘라 땅에 뿌리고 쟁기질로 땅의 위·아래를 뒤집는다. 논과 논둑에 불을 놓기도 한다. 해 묵은 해충들과 나쁜 균들을 없애기 위해서다.

 

 

볍씨, 뽀얀 싹 틔우다

먼저 볍씨의 싹을 틔워야 한다. 볍씨를 담은 20㎏짜리 그물가마니 4개가 커다란 씨통으로 들어간다. 이금순 씨(순천)는 볍씨를 깨끗한 물에 담그고, 뜨거운 물로 소독하는 방식을 취한다. “유기농업단지라 약 대신 열로 살균해요. 그냥 담갔다 빼는 거 같아도 시간, 온도 딱 맞춘 거예요.” 무턱대고 덤볐다간 볍씨로 밥을 짓게 된다는 얘기.

농사를 잘 짓기 위해서는 쉼 없는 배움이 필요하다. 농가들은 타 지역으로 벤치마킹을 가고, 지자체와 농협 등이 여는 교육에도 열심히 참여한다. 씨통에서 열소독을 견딘 볍씨는 사나흘 후 뽀얀 싹을 틔운다.

 

모판은 풍년농사의 첫 걸음

싹이 난 씨는 모판에 뿌려져 가로 60㎝, 세로 30㎝의 직사각형 상자(모판)에서 자란다. 한 개의 모판엔 상토, 볍씨, 상토가 평평하게 적층되어 깔린다. 파종기는 이 과정을 동시에 해결한다. 기계로 하기 때문에 수월하지만 각 공정마다 사람이 필요하다. 이앙기가 없던 시절에는 모심기에 가장 많은 사람들이 필요했다. 요즘은 모판을 놓는 일에 가장 많은 ‘머릿수’가 필요하다.

일손으로 도시에서 직장 다니는 아들과 사위가 호출(?)됐다. 오늘 노동량은 400개. 성인 4명이 반나절동안 집중해야 끝나는 양이다. 경력자인 아들은 기계 운용을 맡는다. 씨는 고루 깔고 흙은 적당히 덮어야 한다. 그래야 모가 잘 자라고, 이앙기가 실수없이 잘 심을 수 있다. 기술이 부족한 ‘신참’ 사위는 완성된 모판을 못자리로 옮기는 ‘단순노동’에 투입된다. “옛날에는 이집저집 품앗이 하면서 마을 안에서 해결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농촌에 일할 사람이 없어서 고사리 손이라도 필요해요.” 순탄했던 작업이 돌연 멈춘다. 파종기가 말썽이다. 노련한 어머니 농부가 손으로 볍씨 뿌리기에 나선다. 

수동파종기

 

물논에서 하우스로

순천 주암면 백록마을에서는 최근 못자리의 트렌드가 논에서 하우스로 바뀌었다. 못자리는 모가 논에 심기기 전까지 자라는 공간을 말한다. 논 못자리는 논의 귀퉁이를 평평히 고르고 그 위에 모판을 놓는 방식이다. 진흙 위의 작업이라 쉽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작업이 한 번 더 필요했다. 마른 땅에 모판을 쌓아두고, 싹이 흙 위를 뚫고 나오면 논으로 이주시켜야 했다. 하우스 못자리는 노동량의 축소와 노동 환경의 개선을 모두 이뤘다. 물론 전제는 있다. 물을 언제든지 줄 수 있을 것.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전남의 농가인구는 29만 8천여 명으로 2010년 대비 24.7%나 감소했다. 반면 65세 이상 고령 인구 비율은 38.7%에서 50.7%(전국 46.6%)로 급증했다.* 노동 인구 부족과 고령화를 농촌은 여러 방법으로 적응·극복 중이다. 각종 농사 기계가 개발됐고, 일정 과정은 독립적 공정으로 떨어져 나와 기업화되었다. 논을 가는 트랙터, 볍씨를 뿌리는 파종기, 모를 심는 이앙기, 모판 수레 등이 앞의 예이고, 육묘장과 공동방제 등이 뒤의 사례이다. *2019년 기준, 통계청 ‘국가통계포털’

농사 방법도 여러 번 바뀌고, 요령도 급속도로 늘었다. 노동의 강도를 낮추기 위해서는 일의 과감한 생략과 통합이 필요했다. 변화와 혁신은 도시만의 언어가 아니다. 농촌에서도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한 과정이다.

 

로터리와 써레

못자리에서 모가 크는 한 달가량 농부는 로터리를 치고 써레질을 한다. 로터리는 흙을 부수는 일이다. 이 작업이 끝나면 논에 물을 함빡 가둬둔다. 그래야 땅을 평탄하게 고르는 써레질이 쉽다.

벼농사 과정에서 물은 특별하다. 그래서 ‘수도작’이다. 고려시대부터 내려온 우리네 이앙법(모를 키워 논에 옮겨심는 재배법)은 모의 생존과 벼 수확량을 높였다. 대신 물이 충분해야 했다. 조선 전기 유학자들은 이앙법에 부정적이었다.* 경작지 증가만큼 수리시설 개선이 뒷받침되지 못했던 것이다. 

지금은 저수지, 수로 정비, 관정 등으로 상황이 훨씬 나아졌다. 농가에선 관정을 파 지하수를 끌어올리거나 양수기를 동원하기도 한다. 그래도 여전히 일부 지역에선 물 잡는 일이 쉽지 않다. 같은 물줄기를 사용하는 논주인들은 이웃 논을 고려해 적당한 만큼 채우고 나머지를 흘려 보낸다. 아전인수(제 논에만 물대기) 하면 미움과 분쟁을 낳았다. 농촌공동체는 타인과 더불어 사는 실천 위에 일궈졌다.  *<농사직설>(세종, 1492년)에서는 이앙법이 물이 충분하지 않은 곳에서는 매우 위태로운 재배법이라고 경고했다.

 

둘이서 열 마지기 뚝딱

십여 명이 나란히 서, 손으로 모를 심는 건 옛 일이다. 이앙기는 필요인력을 획기적으로 줄였다. 기계를 모는 사람과 모판을 들어주는 사람만 있으면 하루 열 마지기도 거뜬하다. 꼬리 편 공작처럼 생긴 이앙기는 6줄 혹은 8줄을 단번에 심는다.

농사도 기계에 맞춰졌다. 이앙기와 트랙터 등이 논에 나다니기 쉽도록 길목을 넓혔다. 시멘트로 포장하기도 했다. 기계의 출입이 어려운 다랑치논은 아예 묵혀놓는다. 이앙기는 구조적 한계로 두둑 가까이에 한 줄을 심지 못한다. ‘뽀짝’ 대어 손모로 심던 그 한 줄도 그냥 둔다. 예초기로 두둑을 깎거나 벼를 벨 때 편하기 때문.

이앙기에 모판 24개가 실렸다. 이앙기가 논 귀퉁이를 돌며 떠나자 모판 들어주는 사람이 바쁘다. 빈 모판을 줍고 기계가 제대로 심지 못한 공간들을 찾아다니며 직접 모를 심는다. 

 

제초일꾼, 우렁이

제초제를 사용할 수 없는 친환경농가에게 우렁이는 소중한 일꾼이다. 우렁이는 물속에 있는 풀을 부지런히 갉아먹는다. 

전남은 2005년부터 친환경농업 육성 5개년 계획을 운영해 유기·무농약 인증면적을 넓혀왔다. 덕분에 친환경농업 면적과 인증농가수가 전국에서 가장 많다. 덩달아 친환경농자재 기업도 증가하고 있다. 우렁이, 미생물제제, 유기질비료, 천적 등 관련 업체가 187개 정도 운영되고 있다. 양적 팽창이 눈부시지만 과제도 보인다. “친환경농업은 병해충에 약해서 수확량이 20~30% 떨어져요. 약제비는 일반 농약보다 2~3배는 비싸죠. 관리도 까다롭고요. 인건비, 기계 삯, 농지임차료도 많이 올랐어요. 거기다 지원마저 축소되는 추세라 친환경농가가 어렵죠.” 유기인증농가인 이 씨의 말이다.

맛과 양 다 잡은 전남 쌀

전남의 쌀 생산량은 전국 최고最高다. 품질도 매우 좋다. 양과 질,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었던 건 좋은 종자 덕이다. 전라남도는 밥맛이 좋고 수확량도 보장되는 신동진, 새일미, 새청무 품종을 보급했다. 

전라남도는 매년 각 지역의 쌀로 평가회를 열고 10대 브랜드를 선정한다. 올해는 담양 대숲맑은담양쌀, 강진 프리미엄호평, 함평나비쌀, 고흥 수호천사건강미, 순천 나누우리, 보성 녹차미인보성쌀, 영광 사계절이사는집, 무안 황토랑쌀, 해남 한눈에반한쌀, 곡성 백세미가 뽑혔다. 

전남의 맛있는 쌀은 해외까지 명성이 자자하다. 전남 친환경쌀 풍광수토는 미국으로, 완도자연그대로미와 장성 명품쌀은 러시아로, 장흥 아르미는 베트남으로, 해남 한눈에반한쌀은 독일로 수출된다.

글·사진 조은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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