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순竹筍은 조연이다. 잡채, 고등어조림, 된장찌개, 골뱅이무침 같은 요리에 더해진다. 죽순이 주인 음식은 손에 꼽을 정도다. 하지만 죽순 없는 오뉴월 식탁은 섭섭할 것 같다. 서걱거리는 식감과 슴슴한 맛이 활력을 돋우기 때문이다. 요즘 말로 죽순은 ‘맛깔나는 조연Scene Stealer’이다. 

어린 시절 입이 짧았다. 일 년 중 요맘때 밥상에 오른 죽순나물엔 젓가락 한번 대지 않았다. 그 서걱거림과 슴슴함을 싫어했다. 봄과 여름 사이 먹을 시기도 짧아 익숙해질 틈도 없었다. 어머니도 자식이 외면하는 음식을 좀처럼 식탁에 올리지 않았다. 철부지에게 죽순은 단역배우에도 못 미쳤다.  

예부터 죽순은 다양한 효능으로 ‘산속의 보물’로 불렸다. <동의보감>은 성질이 차고 맛이 달며 독이 없다고 기록하고 있다. 죽순은 90% 이상이 수분이다. 비가 온 다음 웃자란다는 우후죽순雨後竹筍이란 말은 영양학적으로도 뒷받침된다. 충분한 수분과 냉한 성질의 죽순은 열을 내리는데 좋다고 한다. 최근에는 수험생들의 스트레스 해소 음식으로 많은 전문가들의 추천도 이어지고 있다. 

죽순을 재료로 차린 밥상(요리=담양 수복중학교 정은영 학부모)

겨울이 가고 봄이 오면 너도나도 앞다퉈 봄의 생명력을 칭송한다. 그런 세간의 관심이 시들해질 무렵인 오뉴월, 산과 들은 극적인 드라마를 준비한다. 아직 봄의 절정을 다 보여주지 않았다는 듯.  

땅 속 대나무 줄기는 한 해 동안 축적한 양분을 이때 쓴다. 대지에 남아있는 수분과 찬 기운을 그러모아 새순을 터뜨린다. 중력을 거스르며 하루 평균 8cm, 최대 150cm까지 솟구친다. 봄은 죽순을 주연으로 내세워 생명의 경이를 보여주고 나서야, 여름에 계절의 자리를 내어준다. 생명력의 봄은 마침내 완성된다. 

대나무 사이에서 존재감을 뽐내고 있는 죽순

조연인 삶은 없다. 다른 생명을 조연으로 바라보는 시각과 상황이 있을 뿐이다. 오스카 여우 ‘조연’상을 받은 윤여정 배우에게 수상소감으로 ‘조연의 삶’을 기대하는 이가 있을까. 누구나 제 삶의 주인은 자기 자신이다. 봄 끝자락에 솟아오른 죽순이 몸으로 이를 증명한다. 입이 짧던 철부지도 이젠 나이가 들었다. 치아에 저항하는 식감, 은은한 맛과 향의 죽순은 그의 식단에서도 더이상 조연이 아니다.  

그러고 보니 담양 대숲에서 만난 죽순이 무소의 뿔을 닮았다. 자신을 낳아준 대지를 몸 삼아 하늘을 찌를 듯 솟아있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경구도 떠오른다. 봄과 여름, 하늘과 땅의 경계에서 자존감을 뽐내는 죽순을 호연지기浩然之氣의 화신으로 불러도 좋을 것 같다. 죽순에 기대, 내가 딛고 선 땅 지구가 조연이라던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오늘만큼은 거역하고 싶다.  ‘우주는 공전한다. 나를 중심으로’ 라는 말로. 

글 노해경 사진 장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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