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택리지] 거기 사랑이 있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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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택리지] 거기 사랑이 있었네
  • 전남교육소식
  • 승인 2021.06.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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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례 석주관과 운조루

전남 구례군 토지면 소재지를 지나 10리4㎞ 정도 더 가면 ‘석주관(石柱關)’에 이른다. 구례에서 하동으로 흐르는 섬진강의 물목이 가장 좁은 곳이다. 양편에 웅장하게 솟은 백운산과 지리산이 겨우 ‘끊어져’ 있는 지점이다.

험준한 산, 넓은 강은 국가를 나누고 문화의 차이를 발생시켰다. 그럼에도, 나누어 진 것을 잇고, 차이를 줄여 주는 ‘틈’이 있었다. 험준한 산이라면 고개가, 넓은 강이라면 나루가, 산과 강이 잇대어진 곳이라면 좁은 물목이 ‘틈’ 역할을 했다.

읍성邑城은 일상적인 통치와 행정집행 기능을 담당했다. 요즈음으로 치면 순천시청, 담양군청 같은 역할이다. 산성山城은 유사시에 몸을 숨기거나 항전 거점으로 이용했다. 산자락에 진지를 구축한 군부대 성격이다. 낙안읍성(순천), 금성산성(담양)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구례에서 하동으로 흐르는 섬진강의 물목이 가장 좁은 곳. 양편에 웅장하게 솟은 백운산과 지리산이 겨우 끊어져 있다.
구례에서 하동으로 흐르는 섬진강의 물목이 가장 좁은 곳. 양편에 웅장하게 솟은 백운산과 지리산이 겨우 끊어져 있다.

관문성關門城은 국경, 혹은 국내 주요 지점에 설치해 놓고 지나가는 사람, 물자 등을 조사하는 구조물이다. 검문소 같은 역할인데, 앞서 말한 ‘틈’에 주로 설치되었다. 석주관은 석주관성사적 제385호의 줄임말이며, 관문성이었다. 관문은 사라졌지만, 돌담처럼 쌓여 지리산 자락을 타고 오르는 기다란 성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석주관은 백제와 신라, 경상도와 전라도의 지리적 접경이었으며, 왜구 침입의 통로였고, 그 왜구와 일전을 벌이곤 했던 치열한 방어선이었다.

 

석주관 섬진강 물가에 피 쏟으며 죽었다

동서로 뻗은 지리산 자락 남쪽의 틈이 석주관이라면, 북쪽의 틈은 운봉고원(현 전북 남원시 운봉읍과 인월면) 일대이다. 대가야가 신라로 통합된 시기(6세기 중반)를 다룬 김훈의 소설 <현의 노래>는 “남원 운봉 밑 사매들판에서 싸움은 며칠 전에 끝났다. …(중략)… 싸움이 끝난 뒤에도 그 들판은 여전히 가야의 땅도 아니었고 백제의 땅도 아니었다.”고 썼다. 고려말 이성계가 왜구를 크게 물리친 황산대첩(1380년)의 현장이 운봉고원이다. 이곳 또한 백제와 신라, 경상도와 전라도의 접경이자 왜구의 침입 통로였다.

석주관이 뚫리면 구례-곡성-남원이 함락되는 건 시간 문제였다. 운봉고원을 지키지 못하면 남원-곡성-구례 순으로 점령당했다. 모두 섬진강을 공유하고 있는 지역이다. 강은 산을 넘지 못한다. 강을 공유한다는 것은, 공유한 지역들이 평평하게 이어졌다는 뜻이다. 그래서 틈을 막지 못하면 나쁜 것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와 순식간에 번진다. 뚫고자 하는 힘과 막으려는 의지가 맞서는 충돌이 어느 곳보다 격렬할 수밖에 없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구례의 선비 7명이 의병을 모집해 화엄사 승병들과 함께 석주관성①에서 왜적과 맞서 싸워 모두 전사했다. 석주관②에는 이들을 추모하는 묘지③가 조성되어 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구례 의병들은 왜적의 전라도 침입을 막기 위해 석주관을 지켰다. 구례의 선비 7명이 의병을 모집해 화엄사 승병 153명과 함께 석주관성으로 가, 진주와 하동 방면에서 몰려오는 왜적에 맞서 싸웠고 모두 전사하였다. 석주관에는 이들을 추모하는 묘지가 조성되어 있다.

석주관은 또한 백운산과 지리산을 가까이 이어주는 곳이어서 흩어지고 모이는 빨치산들의 길목이기도 했다. 하여 가까이에 있는 피아골과 함께 한국전쟁 전후 국군과 빨치산의 잦은 ‘충돌’ 지점이기도 했다. 이 같은 석주관의 기억을 어느 시인은 5월 광주로까지 확장시켜 슬픈 언어로 발표했다.

연심이 고모 아는 사람 없다
그 아들 두칠이 아는 사람 없다
토벌대에 잡힌 산사람 남편 구하기 위해
연심이 고모 토벌대장에게 몸 주었다
큰애기 적부터 몸달았던 만수
웃으며 긴밤 내내 연심이 고모 껴안았다
남편 대신 열 달 만에 아들 하나 얻었다
연심이 고모 슬픔 북두칠성처럼 빛났다
연심이 고모 섬진강 물가에서 두칠이와 살았다
아버지 바뀐 두칠이는 어릴 적부터 푼수
나이 서른 되어서야 광주 건축 공사장 일 나갔다
잡부일 보름 만에 두칠이 광주에서 죽었다
바보 두칠이 금남로에서 왜 사람 패냐고
공수대원에게 달겨들다 칼맞아 죽었다
부처님 오신날에 피 쏟으며 죽었다
연심이 고모 미쳐 뛰다 줄초상 났다
석주관 섬진강 물가에 피 쏟으며 죽었다
칡꽃 향기 얼얼한 늦여름 옛 지아비
쓰러진 그 자리에 농약 먹고 죽었다

(곽재구, <연심이 고모> 전문)

 

혼란 속에서도 운조루는 무사했다

토지면 오미리, 뒤로는 지리산이 웅장하고 앞으로는 섬진강이 맑게 굽이친다. 산과 강 사이 들이 넓게 펼쳐진다. 풍수에 까막눈이라 할지라도 이곳이 배산임수(背山臨水)의 길지(吉地)라는 건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풍수에서 최고로 여기는 금환락지(金環落地, 노고단 옥녀가 섬진강물로 머리를 감다 금가락지를 떨어뜨린 곳)의 명당이 있는데, 알려지기로는 오미리의 ‘운조루’국가민속문화재 제8호가 그곳이다. 하지만 금환락지의 정확한 터에 대해서는 제각각 다른 주장들이 있으니 운조루의 가치를 ‘명당’에 한정하는 것은 좁은 시각이다.

조선 양반가의 저택 운조루
조선 양반가의 저택 운조루

남쪽에는 아담한 크기의 연방죽이 있고, 집 대문 앞으로는 작은 시냇물이 흐른다. 안마당으로 들어서면 200년을 훌쩍 넘긴 조선 양반가 기와집의 각종 양식들을 만날 수 있다. 사랑채, 안채, 행랑채, 날개채, 툇마루, 누마루, 쪽담, 대청, 가빈터(장례식 기간 3개월 동안 망자를 모셔 놓는 공간), 부엌, 곳간, 마구간 등등. 건축미학뿐 아니라 당대의 생활공간으로서 운조루가 품고 있는 가치는 측정하기 어려울 정도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쌀 두 가마니 반이 들어가는 크기의 나무 뒤주이다. 뒤주에는 타인능해(他人能解)라고 쓰여 있다. 밥 지을 식량이 떨어지면 누구라도 뒤주 마개를 돌려 쌀을 가져갈 수 있게 했다. 눈치 보지 않고 가져갈 수 있도록 대문에 들어서면 바로 보이는 곳에 두었다.

나무 뒤주 타인능해他人能解
밥 지을 식량이 떨어지면 누구라도 쌀을 가져갈 수 있게 한 나무 뒤주, 타인능해(他人能解)

또 하나는 굴뚝이다. 운조루의 굴뚝은 눈에 잘 띄지 않게 낮은 자세로 숨어 있다. 되도록이면 밥 짓는 연기가 퍼져 나가는 것을 막고자 해서다. 끼니를 걸러야만 하는 이들이 밥 짓는 연기를 보며 느낄법한 고통과 소외감을 조금이나마 줄이려는 마음이다.

한 때 99칸 저택이었다는 운조루는 지금 매우 쇠약한 모습이다. 이웃과 두루 나누고, 일제에도 ‘협조’하지 않는 등 꼿꼿한 가풍을 지켜온 탓이라고 한다. 한국전쟁의 혼란 속에서도 운조루는 무사했다. ‘인심’을 잃지 않아서다. 그러고 보면, 길지라는 게 세속적인 풍요만을 뜻하지는 않는 듯싶다. 사람들로 하여금 가치 있는 무언가를 생각토록 하는 것 또한 길지의 힘이 아닐까.

하늘에서 본 운조루의 규모

석주관과 운조루는 아주 가까이에 있다. 전혀 다른 기능과 역할을 하는 구조물이지만 둘을 꿰뚫는 하나의 정신이 없는 건 아니다. 나는 그것을 ‘함께’라고 생각한다. 남에게 곡식을 내어 주는 마음, 지역을 지키기 위해 죽음 속으로 뛰어 드는 의지, 마음 속 연인을 만나기 위해 농약을 삼키는 분노의 바탕에는 ‘함께’의 열망이 있지 않았을까. 어떤 이는 그 ‘함께’를 ‘사랑’이라고도 한다.

글 이정우 사진 마동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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