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와 인문으로 바라본 전남(하) 유배문화론 거꾸로 보기

고려·조선시대, 중앙정부에서 활약한 거물급 선비가 전라도로 유배 와서 이곳 사람들의 지적 성숙, 문화적 세련화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른바 ‘유배문화론’의 시각이다. 과연 그럴까.

고려 때는 물론, 조선시대까지도 권력과 돈의 수도권 집중 현상이 지금처럼 심각하지 않았다. 농본사회 부의 원천은 곡식을 생산하는 땅과 사람이었다. 농사지을 땅이 넓었던 전라도는 어느 고장보다 풍족한 곳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민중의 삶 또한 넉넉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른 차원의 문제다.)

정도전 선생 유배지 마을인 현 나주 운봉리 백동마을
정도전 선생 유배지 마을인 현 나주 운봉리 백동마을

전라도에 호의적이지 않았던 이중환조차도 “기후가 화창하고 물자가 많으며, 지역이 넓어서 마을이 별과 같이 깔려 있다. …(중략)… 대저 전라 온 도가 나라의 가장 남쪽에 위치하여 지방 물산이 풍부하며, 산골 고을이라도 냇물로 관개하는 까닭으로 흉년이 적고 수확이 많다”고 기록했다.1)

생산의 중심지였던 전라도가 꽃피운 지적, 문화적 토양은 결코 서울2)에 밀리지 않았다. 비유적으로 표현하자면, 조선시대 한양과 전라도는 오늘날 미국의 워싱턴D.C.와 캘리포니아주의 성격에 가깝다. 미국에서 워싱턴D.C.는 정치·행정, 캘리포니아주는 경제·문화의 중심지이다. 한양은 왕권이 작동하는 정치권력의 중심지일 뿐, 지금의 서울처럼 경제와 문화 등 사회의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아니었던 것이다.

 

나주 농부, 정도전을 나무라다

고려 우왕 때(1375) 정도전은 나주목 회진현 거평부곡 소재동3)에서 세 해 동안(1375~1377) 유배죄인으로 머물렀다. 이곳에서 그는 백성들의 핍진한 삶을 보았고, 그들과 생활하면서 직접 그 삶을 체험했다. 어느 날 정도전은 나이든 농부를 우연히 만나 대화를 나눴다. 대화라기보다는 중앙정부 관료출신 유배죄인에 대한 농부의 일방적인 질책에 가까웠다.4)

이 대화의 성격을 도올 김용옥은 “초야에 묻혀 사는 한 농부 현자의 서릿발과도 같은 비판적 예지”라고 규정했다. 또한 대화를 통해 정도전이 “실천을 모르는 지식인의 박학이 얼마나 무서운 허위인가를 깨달았다”고 해석했다. 소재동 유배생활을 거치면서 조선창업의 이념적 뿌리라 할 수 있는 ‘민본民本’ 사상을 형성했다는 것이 김용옥의 진단이다.5)

복원된 정도전 유배 초사
복원된 정도전 유배 초사

눈여겨볼 대목은 ‘나이든 농부’이다. 이 농부는 어지간한 학식이 아니고서는 나누기 어려운 대화를 이끌어 간다. 특정인일 수도 있고, 지역여론을 종합한 가상의 인물일 수도 있다. 중요한 점은 정도전의 깨달음에 ‘나주 지역’의 의견이 적극적으로 개입되었다는 사실이다. 의견은 호소도, 요청도 아니었다. 날카로운 비판이었다.

 

약전-약용 형제의 배후엔 이들이 있었다

조선이 쇠락해 가던 19세기 벽두, 정약전-정약용 형제가 전라도로 유배를 왔다. 둘은 나주읍성 북쪽 2㎞ 즈음에 있는 ‘율정삼거리’(현 동신대학교 인근 율정교차로)에서 헤어진다. 형 약전은 흑산도로, 동생 약용은 강진으로 길을 잡는다. 최근에 개봉한 영화 <자산어보>에 이별의 모습이 상세히 그려져 있다.

약전은 <자산어보> 한 권을 남겼다. 약용은 <목민심서> 등 500여 권의 책을 썼다. 한 권과 오백 권, 성격도 분량도 판이하게 다르지만, 중요한 공통점이 있다. 둘의 작업은 그들의 명석함만으로 가능하지 않았다. 약전은 흑산도 어민 장창대의 도움으로 바다생물들을 살폈고, 약용은 외가인 해남윤씨 집안의 전폭적인 후원을 받아 붓을 들었다.

다산초당
다산초당

해남윤씨 측에서는 7년 가까이 약용의 행동거지를 살핀 다음 초당을 내어주고 막대한 양의 장서 이용을 허락했다. 서울에서 온 피붙이라 해서 그냥 뒷받침해준 것이 아니었다. 과연 쓸 만한 인물인지 ‘싹수’를 본 것이다. 500여 권의 책은 모두 외가의 후원 이후에 쓸 수 있었다.

유배 온 선비들의 역사적 성과는 그들만의 것이 아니었다. 인물을 보는 안목, 도와줄 여력, 도움의 방향을 논할 수 있는 비판적 인식까지 갖췄던 ‘전라도’가 있어서 가능했다. 유배지는 팔도에 두루 분포했다. 서울에서 먼 함경·경남·전남·제주 등이 대표적인 유배지이다. 하지만 유배를 와서 이룬 역사적 성과로 치면, 전남이 가장 찬란하다. 그 찬란함의 내용은 새로운 세상을 향한 것이었다.

 

전라도 인물들의 개혁·창조적 기질

윤선도(해남)는 왕(현종)의 스승이었으며 남인의 거두로서 송시열과 대립했다. 윤두서(해남)는 겸재 정선, 현재 심사정과 함께 조선 후기 3재로 불렸다. 그가 그린 자화상은 렘브란트의 자화상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황진이의 무덤에 술을 따르고 시를 지어 파직당한 임제(나주)는 당대 최고의 천재 문인으로 추앙받았다. 기대승(광산)은 27살 연상인 이황과 12년 동안 대등하게 편지를 주고받으며 세계사에서 가장 큰 스케일의 ‘유학논쟁’을 벌였다.

흑산도 사리마을에 있는 유배문화공원. 흑산으로 유배된 정약전을 비롯해 최익현, 김기주 등을 기록해 놓았다.
흑산도 사리마을에 있는 유배문화공원. 흑산으로 유배된 정약전을 비롯해 최익현, 김기주 등을 기록해 놓았다.

이들은 모두 전라도 땅에서 나고 자라 전라도 땅에 묻힌 선비이자 정치인이었다. 예외 없이 개혁적이고 창조적인 기질을 지녔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 외에도 걸출한 인물들은 더 많이 있었다. 정도전, 정약전, 정약용의 유배지 근처 인물들을 대략 압축한 것이 이 정도다. 한양이 전남을 가르친다는 유배문화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인물들이다. 거꾸로 유배 온 선비에게 깨달음을 주어 새 세상 창조의 동력을 제공한 역逆유배문화론이 타당할 것 같다.

전라도 지리의 어떤 특징이 개혁과 창조의 기질을 제공하고, 유배 온 거물들을 ‘명예 전라도인’으로 변화시켜 세상으로 다시 나아가게 했을까. 열 가지 설명, 스무 가지 논거가 있을 수 있다. 정답을 찾는 작업은 쉽지 않다. 다만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유배문화론이 갖고 있는 ‘서울 사대주의’로는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조선유학의 한 축이었던 이기일원론, 가사문학, 판소리, 임란의병, 동학농민전쟁, 한말의병, 5·18민중항쟁… 모두 전라도가 발신한 세계사적 사건이자 문화자산들이다. 지금, 여기, 우리 땅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증거들이다.

세 번에 걸쳐 연재한 전남 택리지 총론을 마무리한다. 상-중편에서는 전라도 산수의 핵심 특징을 근거로 ‘해양도’를 제시하고 ‘열린 개방성’ 등의 기질을 이야기했다. 하편에서는 그 특성들이 빚어낸 인물과 자산을 ‘유배문화론’ 비판의 형식으로 훑어보았다. 앞으로는 특정 공간을 중심으로 지리와 인문을 논해볼 계획이다. 다음호는 구례 석주관으로 떠난다.

글 이정우  사진 장진주

 

1) <택리지>, 전라도 편
2) 개경, 한양, 현재의 서울을 통칭하는 단어로 쓴다.
3) 현 전남 나주시 다시면 운봉리 백동마을
4) 자세한 내용은 정도전이 쓴 <답전보>(答田父) 참조
5) 김용옥이 쓰고 백동마을에 세워져 있는 <신소재동기> 참조 

저작권자 © 전남교육소식 함께꿈꾸는미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