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 속 전남_ 박관현 열사

시대의 부름에 밀면서 밀리는 파도처럼 응답하는 사람들이 있다. 돌아보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그 응답이 세상을 바꾸기도 했다. 박관현이 그런 사람이었다. 그저 평범한 법학도였다. 그의 어깨 위에는 늘 가족이 올려져 있었다. 그는 영광 불갑면의 가난한 집안 5남3녀 중 장남이었다.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 법관이 되는 것은 그의 오래된 신념이었고, 온 집안의 꿈이었다.

‘들불야학’에 발을 들이기 전까지는 그랬다. 군대를 제대하고 전남대 법대에 들어와 오직 법전만 보고 살았다. 그랬던 박관현이 광천동(광주)의 노동자와 ‘들불야학’을 만나고 1년 6개월 만에 전남대 총학생회장에 당선됐다. 김대중과 함께 이름이 거론될 만큼 영향력이 있는 지도자가 됐다. 1980년 광주민중항쟁이 일어나고, 2년 뒤 박관현 열사가 감옥에서 세상을 떠날 때에는 시대의 꽃잎이었다.

이 나라 민주주의는 지는 꽃잎 위에 핀 꽃이었다. 그가 꽃잎처럼 떨어져 내린 그 길을 많은 사람들이 따라 걸었고, 그 길 위에서 마침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피어났다. 그가 저항의 역사에 발을 들여 놓았던 시간은 4년이 채 되지 않았다. 그 짧은 시간에 박관현 열사는 죽음으로 삶을 돌파해 시대의 심장이 되었다.

박관현 열사의 고향인 영광 불갑면에 세워진 '박관현열사비'. 2001년 생가 근처에 세웠다가 불갑농촌테마공원으로 이전되었다.
박관현 열사의 고향인 영광 불갑면에 세워진 '박관현열사비'. 2001년 생가 근처에 세웠다가 불갑농촌테마공원으로 이전되었다.

 

내 꿈은 이제 순임이입니다!

1978년 12월이었다. 윤상원을 비롯한 들불야학 강학들이 광주공단 노동자들의 생활을 파악하기 위해 실태조사를 기획했다. 거기 참여하기로 먼저 마음을 굳혔던 장석웅이 중·고등학교 동기동창 박관현을 잡아끌면서 열사의 삶은 궤도를 바꿨다. 광주공단 실태조사는 그해 12월부터 1979년 2월까지 66일 동안 진행됐다. 그 결과물이 ‘광주공단 실태조사 보고서’였다. 

<전남대학보>를 통해 기사 형태로 발표됐던 그 보고서는 세상을 뒤집어 놓았다. 노동자의 50%가 최저임금 이하였고, 월 3만5,000원을 받지 못하는 노동자가 27%를 차지했다. 노동자의 70%가 직업병 증세를 보였고, 전체의 22%가 하루 10시간 이상 일했다. 박관현은 실태조사를 통해 곪은 시대의 아픔을 자각했다. 그들을 외면하고 법관이 되어 ‘저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것’은 죄였다.

1979년 4월 박관현은 들불야학에 강학으로 합류했다. 들불야학에서 어린 공단 노동자들과 함께 하며 박관현의 꿈은 달라졌다. 더 이상 법관이 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꿈꿨던 세상은 누구도 차별 받지 않고, 일한 만큼 나눠 가지며, 각자의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는 나라였다. 박관현의 꿈은 1980년 전남대 총학생회장 선거 유세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박관현은 김대중과 함께 이름이 거론될 만큼 영향력이 있는 지도자였다. 1980년 4월 8일에 열렸던 전남대 총학생회장 선거 2차 유세에는 대학생 1만 명이 운집할 정도였다(사진2·3). 총학생회장으로 당선된 그해 오월, 광주에서는 신군부의 정권 찬탈을 반대하는 ‘민족민주화 성회’가 열렸다(사진1). 박관현 열사는 이를 진두지휘했다. 출처ⓒ전대신문
박관현은 김대중과 함께 이름이 거론될 만큼 영향력이 있는 지도자였다. 1980년 4월 8일에 열렸던 전남대 총학생회장 선거 2차 유세에는 대학생 1만 명이 운집할 정도였다(사진2·3). 총학생회장으로 당선된 그해 오월, 광주에서는 신군부의 정권 찬탈을 반대하는 ‘민족민주화 성회’가 열렸다(사진1). 박관현 열사는 이를 진두지휘했다. 출처ⓒ전대신문

10·26과 함께 찾아온 ‘서울의 봄’으로 민주화의 열망이 불면서 전남대는 학도호국단 폐지와 함께 총학생회 부활을 논의했다. 그 중심에 섰던 인물이 박관현이었다. 여러 차례 진행된 공청회에서 그는 총학생회 부활의 정당성에 대해 역설했으며, 단숨에 전남대의 유명인사로 급부상했다. 그리고 주변으로부터 총학생회장 출마를 강권 받는다. 그 권유가 결국 시대의 부름이었고, 박관현은 응답했다.

1980년 4월 8일에 열렸던 총학생회장 선거 2차 유세에는 전남대 학생 1만 명이 운집했다. 박관현의 연설은 학생들의 가슴에 꽂혔다. “내 꿈은 이제 판사도 아니고 변호사도 아닙니다. 내 꿈은 이제 순임이입니다. 순임이는 내 어머니입니다. 아니, 여기 모인 우리 모두의 어머니입니다. … 우리의 역사는 노동자·농민의 역사입니다. 노동자와 농민이 역사의 주체이고 역사를 이끌어가는 희망입니다. 나는 그래서 내 어머니인 순임이를 내 양심으로 삼아 살아갈 것입니다.” 박관현이 호명한 순임이는 들불야학 1기 학생 조순임이었고, 박관현은 64%의 압도적 지지로 당선됐다.

살아남은 자의 미안함과 부끄러움

1980년 오월, 신군부의 정권 찬탈을 반대하는 움직임이 전국에서 일었다. 특히 광주에서는 5월 15일 광주시민 2만 명이 전남도청 앞 광장에 모여 ‘민주화성회’를 열었다. 박관현은 이 행사를 진두지휘했고, 16일 횃불시위에서 연설에 나섰다. 광주가 횃불을 든 이유에 대해 그는 “이 나라 민주주의를 꽃 피우기 위해서”라고 선언했다. 그는 이 연설로 대학생들의 우상에서 광주의 지도자로 거듭났다.

전국에서 들불처럼 시위가 번지자 신군부는 예비검속으로 재야인사와 대학생들을 마구잡이로 잡아들였다. 5월 18일 오전 8시 예비검속을 피한 박관현이 윤상원을 찾았다. 윤상원은 그에게 몸을 숨길 것을 권했다. 박관현은 꼭 살아남아 학생들과 광주를 이끌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살아서 두 사람이 만난 마지막 하루는 그렇게 저물었다. 박관현은 여수 돌산으로 몸을 피했다. 그해 6월 서울로 갔으며, 여러 곳에서 숨어 지내다가 공릉동 어느 공장에 위장 취업했다. 그리고 1982년 4월 직장 동료의 신고로 체포됐다.

그가 저항의 역사에 발을 들여 놓았던 시간은 4년이 채 되지 않았다.그 짧은 시간에 박관현 열사는 죽음으로 삶을 돌파해 시대의 심장이 되었다.
그가 저항의 역사에 발을 들여 놓았던 시간은 4년이 채 되지 않았다.그 짧은 시간에 박관현 열사는 죽음으로 삶을 돌파해 시대의 심장이 되었다.

그는 내란중요임무종사 혐의로 기소됐고, 징역 5년을 선고 받았다. 그는 최후 진술에서 이렇게 말했다. “광주에서 빠져나가 나 혼자만 살고자 했다는 사실을 심히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 언젠가 역사는 이 정권을 심판할 것입니다. 우리 시민들이, 아니 항쟁의 거리에서 빠져나간 부끄러움을 간직한 제가 시민들과 함께 심판할 것입니다. 구천으로 떠나가 아직도 너무 원통해 두 눈을 감지 못하고 있을 내 동포, 내 형제들의 영령에 부끄럽지 않게 분명히 우리는 정확한 심판을 해야 할 것입니다.”

감옥에서 박관현은 강했다. 1982년 7월부터 ‘5·18 진상규명’을 외치며 50일 동안 세 차례의 단식투쟁을 진행했고, 급성심근경색과 급성폐부종이 겹쳐 1982년 10월 12일 새벽 숨을 거뒀다. 그의 나이, 만29세였다. 그를 죽인 것은 단식이 아니었다. 먼저 떠난 동지들에 대한 살아남은 자의 미안함과 부끄러움이 그를 죽음의 길로 이끌었다. 그는 살아서 죽었지만 죽어서 살았다. 박관현의 29년, 역사 앞에 부끄럽지 않은 시간들이었다.

박관현 열사의 묘와 5·18민중항쟁추모탑. 이 나라 민주주의는 꽃잎처럼 떨어져내린 사람들 위로 핀 꽃이다.
박관현 열사의 묘와 5·18민중항쟁추모탑. 이 나라 민주주의는 꽃잎처럼 떨어져내린 사람들 위로 핀 꽃이다.

글 한경숙  사진 마동욱·전대신문·관현장학재단

 

관련 교육 자료
책 <1980년 전남대 총학생회와 박관현>(전남대5·18연구소, 202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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