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는 '해양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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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는 '해양도'였다
  • 전남교육소식
  • 승인 2021.04.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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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와 인문으로 바라본 전남(中)

243호(흩어진 머리카락처럼 사방으로 흐르는 강물)에서 계속

택리지
택리지

이중환은 <택리지> ‘전라도’ 편에서 훈요십조의 전라도 배제 대목을 인용한 다음 “광주는 서쪽으로 나주와 통하고 풍토와 기후가 통창하여 예부터 경치가 훌륭한 마을이 많고, 또 높은 벼슬을 지낸 사람도 많았다.…… 대저 전라 온 도가 나라의 가장 남쪽에 위치하여 지방 물산이 풍부하며, 산골 고을이라도 냇물로 관개하는 까닭으로 흉년이 적고 수확이 많다”며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러나 지금은 지역이 멀고 풍속이 더러워 살만한 곳이 못된다”라고 결론을 내린다.

이중환은 스스로 “전라도와 평안도는 내가 보지 못하였다”고 밝혔다. 하지만 그는 전라도의 지형과 사람의 기질을 구체적으로 기술했다. 가보지도 않고 ‘아는 척’ 할 수 있는 근거는 무얼까.

이중환은 이익에게 학문을 배웠다. 이익은 이중환의 아홉 살 연상 팔촌 재종조부였다. 이익은 <택리지>의 서문과 발문, 그리고 이중환의 묘갈명까지 썼다. 둘은 남인으로서 당파를 맺었고, 혼맥으로도 얽혔다. 훈요십조-이익으로 이어지는 전라도 폄훼를 ‘베꼈다’고 의심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전라도 폄훼의 근거

흥미로운 점은 이중환 문장의 독특한 어법들이다. 전라도 사람은 경박하네, 간사하네, 어쩌구 저쩌구 한참 말하고 나서는 “그러나 인걸은 땅의 영기로 태어나는 것이므로 전라도에는 인걸 또한 적지 않다. 고봉 기대승은 광주 사람이고……”로 시작해 대략 20명의 전라도 인재들을 나열한다.

이런 식으로 한꺼번에 스무 명을 나열한 지역은 <택리지>에서 전라도가 유일하며, 지역별로 언급된 ‘인재’의 총 숫자 또한 전라도가 가장 많다. 그런데도 결론은 “훌륭하게 된 사람의 수효가 경상도에 미치지 못한다”이다.

전라도, 혹은 경상도에서 얼마나 많은 인재가 나왔는지는 알 수 없다. 관점과 기준에 따라 인재라고 여기는 범위가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눈여겨볼 대목은 인재를 열거해 놓고도 ‘그러나’ 인재가 없다 하고, 풍광을 칭송해 놓고도 ‘그러나’ 풍속이 더럽다고 하는 이중환의 모순되는 인식구조이다. 

알고 있는 긍정적 사실과 믿고 싶어 하는(스승에게 배웠거나 사회적 편견으로 습득한) 부정적 의견을 ‘그러나’ 류의 접속사로 연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택리지>의 권위는 튼튼하게 살아 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 하나가 ‘문서의 힘’이다. 과연 그럴까, 라는 질문이 있을 수 있다.

이 즈음 한 가지 밝혀야 할 사실이 있다. 지난호 <함께 꿈꾸는 미래>에 인용한 독일 철학자 헤르더의 말*은 사실이 아니다. 정확히는 여섯 글자만 고쳤다. 전라도를 프랑스로, 경상도를 독일로 바꾸면 헤르더 본래의 말이 된다. 실제로 프랑스의 강은 전라도처럼 산발사하이고, 독일의 강은 경상도 물줄기가 낙동강으로 모이듯이 라인강 하나로 통합된다. 문서의 ‘힘’을 독자와 함께 경험해보고자 의도적으로 위조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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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노선 걸은 내해와 외해

고려 시대 지도
고려 시대 지도


잘 알다시피 전라도(全羅道)는 전주(全州)와 나주(羅州)의 머리글자를 따 지은 이름이다. 고려 전기까지 지금의 전남권역은 해양도(海洋道), 전북권역은 강남도(江南道)였다. 이때까지 ‘전라도’라는 말은 없었다. 

고려 중기 현종 9년(1018년)에 해양도와 강남도가 전라주도(全羅州道)로 합병되었다. 338년 뒤에 충청도가 태어났고, 377년 뒤에 경상도가 등장했다. 근래까지 이어져 온 행정 지명의 근원에서 ‘전라도’가 가장 오래되었다(경기도 제외). 그만큼 전라도는 중요한 지역이었다. 2021년 현재 전라도의 나이는 1,003세이다.

나주와 목포는 영산강 물길로 연결되어 있었다. 이물길이 신안의 흑산도 바다에서부터 목포-나주-광주로 이어지는 ‘영산강 문화권’을 창출시켰다. 산줄기는 문화를 단절시키지만, 물길은 문화적 차이를 발생시키면서 동시에 통합한다. 마치 오케스트라 협연처럼 ‘조화를 이루되 같아지지는 않는(和而不同)’ 문화적 풍미를 빚어내는게 물길의 특성이다.

영산강이 제기능을 다했던 시절, 나주는 곡창과 해양을 동시에 거느려 물산이 풍부했다. 경주든 개경이든 중앙정부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던 나주는 늘 독자세력을 구축했다. 지금의 시각에서는 나주의 너른 평야가 눈에 띄지만, 고대~중세까지 나주는 해양세력의 활동기반이었다. 해양은 다시 내해內海와 외해外海 둘로 나뉜다.

왕건과 손을 잡은 나주의 호족들은 내해 세력(연안=해안선~강길)이라고 할 수 있다. 완도와 신안의 섬들을 거점 삼아 당나라와 교역했던 장보고는 외해 세력(먼바다~중국)이었다. 후삼국 초기 견훤의 수하로 들어간 능창(일명 수달)의 활동무대는 압해도를 중심으로 한 지금의 신안군 섬들이었다. 외해 세력의 계승자라고 할 수 있다.

장보고와 완도 앞바다. 전남 서남해안의 섬들은 국제해양 교류의 플랫폼 역할을 했다. 9세기 즈음 장보고는 이 플랫폼에서 최고 강자였다. 우리보다 중국과 일본의 역사서에 장보고를 더 상세히 기록했다.(ⓒ최재경)
장보고와 완도 앞바다. 전남 서남해안의 섬들은 국제해양 교류의 플랫폼 역할을 했다. 9세기 즈음 장보고는 이 플랫폼에서 최고 강자였다. 우리보다 중국과 일본의 역사서에 장보고를 더 상세히 기록했다.(ⓒ최재경)
완도군 장도. 장군의 섬이라는 뜻을 지닌 청해진의 본영이다. 중국-신라-일본으로 이어진 동북아시아 ‘지중해’의 해적을 소탕하고 교역로를 개척한 거점이다.(ⓒ최재경)
완도군 장도. 장군의 섬이라는 뜻을 지닌 청해진의 본영이다. 중국-신라-일본으로 이어진 동북아시아 ‘지중해’의 해적을 소탕하고 교역로를 개척한 거점이다.(ⓒ최재경)

 

바다에서 땅으로, 전라도의 탄생

나주와 개경의 호족들이 공유한 이해관계는 ‘연안과 내륙’이었다. 왕건과 나주 오씨가 손을 잡은 건 연안세력의 합종인 셈이다. 견훤과 능창이 횡으로 연대했으나 능창이 너무 일찍 패배했고 죽었다. 1018년, 해양도가 사라지고 전라도가 탄생한 것은 외해 세력, 곧 진정한 의미의 해양세력이 독자성을 상실한 때라고 볼 수 있다. 동시에 민족의 시야가 바다에서 땅으로 옮겨간 사건이었다. 전주와 나주가 호남 곡창지대의 중심이어서 통치의 거점으로 삼은 것이다.

전라도 성립의 원시단계에 그 이름이 ‘해양도’였다는 사실은 1천년이 지난 지금에도 많은 생각에 잠기게한다. 전라도는 한반도와 중국, 일본을 아우르는 ‘지중해’의 중심지 위상을 지니고 있었다. 유럽의 ‘지중해’에서 로마는 번성했지만 카르타고는 몰락했다. 로마와 카르타고 운명의 중간 즈음에 서서 늘 위태로운 시절을 보냈던 곳이 한반도의 ‘해양도’였다.

신안군 가거도에서는 일본 오키나와(355㎞), 중국 절강성(390㎞)보다 서울(402㎞)이 더 멀다. 독도, 백령도, 마라도와 함께 국경 기점이다. 전남 서남해안의 섬들은 먼 바다를 경영했던 외해세력(장보고, 능창)의 보금자리였다.(ⓒ마동욱)
신안군 가거도에서는 일본 오키나와(355㎞), 중국 절강성(390㎞)보다 서울(402㎞)이 더 멀다. 독도, 백령도, 마라도와 함께 국경 기점이다. 전남 서남해안의 섬들은 먼 바다를 경영했던 외해세력(장보고, 능창)의 보금자리였다.(ⓒ마동욱)

산, 들, 강, 바다 등 터전이 풍요로웠다. 그 풍요의 산물들이 여러 갈래의 강줄기와 너른 바다를 통해 세계와 만났다. 부의 산실이자 문화교류의 핵으로서 ‘지중해의 거점’이 될 수 있었던 배경이다.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전라도는 또한 권력쟁투의 치열한 싸움터이기도 했다. 까닭에 “지역이 멀고 풍속이 더러워 살만한 곳이 못된다” 는 이중환의 진술은 여전히 남아 있는 전라도 독자성(해양성)에 대한 두려움, 열린 개방성에 대한 이해부족으로 읽을 수도 있다. 중앙정부의 정치권력에 기대어 사는 보수적인 사대부 귀족의 ‘부러워서 짜증나는’ 진술로 보이는 것이다.

더 넓은 세계와 교류하면서 타문화를 받아들이는 개방성, 그것을 꾸준히 실현하고 이어갈 수 있는 내부의 탄탄한 생산력이 전라도 정체성identity의 뿌리라 할 수 있다. 그 뿌리가 개혁적인 선비들(임제, 위백규, 하백원 등), 새 세상을 꿈꾼 사상가(정도전, 정약용 등), 한말의 병, 동학농민을 길렀고, 해방전후 시기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온 민족·민주항쟁에 양분을 제공했다. 전라도의 풍토가 전환시대의 맨 앞자리에 언제나 ‘전라도 사람’들을 배치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다음호에 계속)


정도전과 정약용은 각각 충청, 경기 출신이다. 그럼에도 ‘전라도 사람’으로 묶었다. 관련하여 더 많은 전라도 사람들을 소개하면서 다음호에 근거를 밝히고자 한다.

글 이정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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