흩어진 머리카락처럼 사방으로 흐르는 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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흩어진 머리카락처럼 사방으로 흐르는 강물
  • 전남교육소식
  • 승인 2021.03.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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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택리지_ 지리와 인문으로 바라본 전남(上)

“물자를 옮기는 방도로는 말이 수레보다 못하고, 수레는 배보다 못하다. …(중략)… 배로 오가는 장사꾼은 반드시 강과 바다가 서로 통한 곳에서 이득을 얻고 외상 거래도 한다.”

<택리지> ‘복거총론’의 한 대목이다. 넓은 길이 없던 시절에 말이나 수레는 짐을 옮기는 ‘양’의 한계가 분명했다. 길의 표면이 울퉁불퉁해서 깨지기 쉬운 옹기나 도기 같은 물건들은 운반하기 어려웠으니 물류의 ‘질’에도 제약이 많았다.

1920년대 배가 들고나던 영산포 나루터(전남도청 제공)

기관차, 신작로, 포장도로 등 근대적 발명품들이 등장하기 이전, 강과 바다는 물류의 고속도로에 다름 아니었다. 여러 종류, 많은 양의 물건을 육로보다 안전하고 빠르게 운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청자와 옹기를 빚었던 강진의 가마터가 바닷가에 접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강과 바다가 ‘자연지리’라면, 수레·배·이득·외상거래는 ‘사람살이’에 속한다. 대략 18세기 중반 즈음 지어진 책으로 추정되는 <택리지>는 우리네 인문지리학의 출발점으로 평가받는다. 인용한 글귀는, 자연지리의 특성을 고려해 사람살이의 여러 양상들을 분석·해명하는 인문지리 문장의 전형을 보여준다. 

 

영산포에 등대와 홍어가 있는 이유

이 문장에 들어맞는 전라남도의 장소를 꼽는다면 ‘영산포’(나주시)가 적절할 것 같다. 근대 이전, 지금의 영산강은 영산내해(內海)로 불렸다. 목포 앞바다의 밀물이 영산강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왔다. 강이면서 동시에 바다였던 둘은 서로 긴밀히 내통했다.

영산포는 강과 바다가 통했던 영산강 항로의 출발점이자 종착점이었다. 조선 후기부터 일제시대까지 장사꾼들이 이득을 얻고 외상 거래도 하는 교역의 중심 공간이었다. 한 때 ‘조선의 상해’로 불릴 만큼 활기를 띠었다. 일제시대에는 지척에 있는 고도(古都) 나주보다 세력이 더 왕성했다.

2021년 영산포. 관광상품으로서 황포돛배와 등대, 홍어거리가 남았다.

목포 하구둑이 완공되면서 영산포는 쇠락했다. 잘 통했던 강과 바다가 단절됨으로써 배는 말과 수레(자동차와 기차)에 제 역할을 내 주었다. 영산포에는 1970년대 후반까지 배가 드나들었다. 전국 유일의 내륙 등대, 영산포 등대가 그 흔적이다. 영산포 홍어의 거리는 서남해안의 물산이 영산강 물길을 따라 나주권역까지 드나들었다는 강력한 증거이기도 하다. 문순태의 소설 <타오르는 강>에 영산포의 역동적이고 풍경이 잘 묘사되어 있다.

영산포를 거닐어 보자. 왜 저기에 등대가 있을까, 왜 일본식 건물이 이렇게 많을까, 왜 황포돛배가 관광상품으로 나룻터에서 손님을 기다릴까, 코를 움켜쥐게 하는 홍어냄새는 또 무엇인가…. 고구마 줄기처럼 이어지는 의문들을 푸는 방법은 인문지리적 관점을 갖는 것이다.

자연지리의 조건에서 사람살이의 골격이 만들어지고, 그 사람살이가 다시 자연지리에 변형을 주게 된다. 이 과정이 반복되면서 문화와 풍속이 자리 잡고, 사건이 생겨나며, 숱한 이야기들이 만들어진다. 출발은 자연이나 종착은 사람인 것이 인문지리이다. 영문으로 'physical geography'가 자연지리, 'human geography'가 인문지리이다.

 

산발사하의 땅을 둘러싼 상반된 해석

전남과 관련하여 우리네 역사 속 가장 유명한 ‘인문지리적 사건’은 ‘훈요10조 제8훈’이 아닐까 싶다. 지금의 전라남북도에 해당하는 ‘차령이남’의 “산형과 지세가 모두 배역하는 형세이며 인심 또한 그러하니 비록 양민이라 할지라도 마땅히 벼슬자리에 두어 일을 보게 하지 말라”는 게 이 문서의 주장이다.

정치적 입장과 인심의 근거를 ‘산형과 지세’에서 찾은 만큼 인문지리적 접근이라 할 수 있다. 문제는 산의 어떤 형태, 땅의 어떤 성질이 ‘배역’이라는 것인지 설명이 없다. 대략 700년 뒤 이익이 <성호사설>에서 ‘반궁수’反弓手 이론을 내 놓았다. 휘감아 도는 금강과 차령이남 땅의 모양이 한양을 향해 활시위를 당기는 ‘배역산세’라는 것이다.

태조 왕건이 943년에 직접 만들어 자손들에게 내려줬다는 ‘훈요10조’는 원본이 없다. <고려사>는 “처음의 태조가 만든 훈요십조는 병란(거란 침입, 1011년)으로 불타 없어졌는데 우연히 최항의 집에 소장되어 있음을 발견하고 현종에게 바침으로써 세상에 전해지게 되었다”고 밝혔다.

고려 운영의 헌법이랄 수도 있는 중요한 문서가 하필이면 개인의 저택에서 우연히 발견되었을까, 라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위조문서일 가능성도 충분히 있는 것이다. 관련하여 학계의 논쟁이 있으나 이 자리에서는 생략한다. 중요한 건 ‘문서의 힘’이다.

전라도 강 지도

훈요10조는 이익을 거치고 이중환이 받아들이면서 진실처럼 굳어졌다. 이익은 “전라도의 물길은 산발사하散髮四下하여 국면을 이루지 못하는 땅 …(중략)…인풍이 짐승처럼 교만하여 사대부가 귀의할 수 없는 땅이며, 차령 이북에 대하여 역세의 모양임을 부인할 수 없는 땅”이라면서 훈요10조를 업그레이드 시켰다.

‘산발사하’는 전라도 강물의 흐름이 흩어진 머리카락처럼 사방으로 뻗어 나간다는 뜻이다. 동진강, 만경강, 섬진강, 탐진강, 영산강 등 유독 강이 많은 전라도 땅의 실제에 부합한다. 같은 책에서 이익은 “경상도의 모든 강줄기는 낙동강 하나로 모여들기 때문에 인재가 많이 나는 공간”이라면서 전라도와 비교했다. 정 반대의 진단도 있다.

독일의 철학자 헤르더(1744~1803)는 <인류의 역사철학에 대한 이념>에서 “지세와 기호가 극단을 피하고 있기 때문에 전라도인의 인간적 기질도 중용적이며, 하천이 삼면의 바다로 유입되니 사람들의 가슴도 활짝 열려 있어 오는 자를 환영하는 해방성을 갖고 있다. 또한 주민을 낙천적, 사교적으로 만드는 은근성과 균형 잡힌 풍토로 인한 언어 논리 표현의 명석성이 뛰어나다.”고 말했다.

헤르더는 또한 강줄기가 하나로 몰려드는 특성으로 말미암아 경상도 사람은 고집이 세고 논리적으로는 극단을 취한다고 진단했다. 헤르더는 경상도보다는 전라도에 더 우호적인 입장을 보였다.

 

들, 산, 바다, 강, 바람을 통해 바라보는 삶

풍수지리는 말하는 이의 입장이나 목적에 따라 의미가 재구성되는 지식체계이다. 똑같은 사실을 놓고도 전혀 다른 의미도출이 가능하다. 사실을 바탕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풍수지리는 과학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반면 그 사실을 놓고 좀 더 엄밀한 증명체계를 거치지 않은 채 윤리적 결론을 이끌어 낸다는 점에서 종교의 특성도 품고 있다.

유사 학문이면서 동시에 유사 신앙이 풍수지리이다. 그래서 풍수지리는 인문지리학으로 넘어 가기도 하고, 기복신앙의 품으로 뛰어 들기도 한다. 이익과 헤르더, 누가 옳을까. 알 수 없다. 다만 헤르더의 주장은 알려지지 않았고, 이익의 주장은 널리 퍼졌으며, 이중환의 <택리지>로 모습을 바꿔 또 나타났다. (다음호에 계속)

<택리지> 등 몇몇 문서로 ‘전남택리지’ 연재를 시작했다. 인문지리의 특성을 엿보기 위해서다. 묘자리 잡는 데나 쓰이는 낡은 생각 즈음으로 폄훼된 풍수지리도 끌어 들였다. 사람의 삶을 중심에 놓는다는 점에서 풍수지리는 서양의 휴먼지오그래피보다 훨씬 오래된 인문지리적 사상임을 말하기 위해서다.

향후 연재를 통해 전남의 들, 산, 바다, 강, 바람과 먼지 등을 살피면서 삶과 사람의 양태들을 이야기할 계획이다. 안타깝거나 아름다운 사연, 습속이나 문화의 기원, 마땅히 가져야만 하는 자긍심의 근거 등을 말하고자 한다. 다만, 다음호까지는 총론 차원에서 이번 연재의 주제들을 끌고 가 마무리 짓고자 한다.

 

글 이정우  사진 장진주, 전남도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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