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극기가 바다에 펄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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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가 바다에 펄럭입니다!
  • 전남교육소식
  • 승인 2021.03.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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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의 땅 해방의 섬’ 완도 소안도

 

소안도 중심지인 비자리와 가학리 일대, 사실상 섬 전체가 항일운동 사적지인 셈이다.

지금은 물김의 바다이며 땅이다. 겨울부터 봄까지 소안도의 하루는 물김과 함께 빠르게 시작된다. 섬의 이름 소안所安처럼 모든 게 편안해 보인다. 100여 년 전에는 많이 달랐다. 섬 전체가 항일투쟁에 나섰고, 1920년대 6,000여 명의 주민 중 800명 이상이 일제에 의해 ‘불령선인’으로 낙인찍혔다. 일제강점기 36년의 시간 동안 소안도 주민들이 감옥에 갇힌 시간을 모두 합산하면 300년이 넘는다.

당시 항일독립지사들이 자주 불렀던 노래가 있다. 가사를 읽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먹먹해진다. 

 

섬 이름은 편안한 곳이지만 백성은 편안치 않고, 
산 이름은 학이 모이는 곳이지만 학은 오지 않네.

소안도에 조용히 어둠이 내리면 그 섬의 모든 것들은 항일의 역사를 품고 밤새 몸을 뒤척인다.

소안항 선착장에 내리면 금세 섬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다. 모든 섬, 모든 마을, 모든 집에 펄럭이는 태극기가 거대한 비석 하나를 지시한다. 거기 ‘항일의 땅 해방의 섬, 소안도’라고 적혀 있다. 조그마한 섬 소안도에서는 건국훈장을 받은 독립유공자만 21명이며, 무려 89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했다. 면 단위에서 전국 최대 규모다. 섬 전체가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걸었던 것이다.

 

투쟁의 시작, 토지반환소송

소안도는 함경도 북청, 경상도 동래와 함께 전국에서 가장 치열하게 항일투쟁을 전개한 3곳 중 하나다. 그 시작은 토지반환소송이었다. 조선시대 소안도의 토지는 모두 왕실이 소유한 궁방전이었다. 다만 경작권은 소안 면민들에게 있었다. 일제는 1905년 을사늑약을 체결한 뒤 조선 왕가의 환심을 사기 위해 소안도의 모든 토지를 사도세자 5대손인 이기용에게 소유권을 이전한다. 소안 면민들은 하루아침에 경작할 땅을 잃었다.

소안 면민들은 곧바로 토지소유권 반환소송을 진행한다. 싸움은 무려 13년 동안 계속됐다. 1921년 2월, 길었던 법정 투쟁 끝에 6,000명의 소안 면민이 승소한다. 그 싸움은 소안도의 운명을 결정했다. 토지반환소송을 계기로 모든 소안 면민들은 배움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승소를 기념해 면민들은 1만 454원의 돈을 모았다.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1억 원이 넘는다. 면민들은 모금한 돈을 들여 강학소 수준이었던 소안중화학원을 1923년 정식학교인 사립 소안학교로 승격시켰다.

사립 소안학교(왼쪽)와 소안도 항일운동기념관
사립 소안학교와 소안도 항일운동기념관

사립 소안학교는 ‘배움만이 살 길이고, 항일의 길’이라는 소안 면민들의 열망을 집결시켰다. 수많은 우국지사들이 교사로 근무하면서 소안의 어린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조선의 역사와 국어를 중심으로 가르쳤다. 일제의 축제일에 휴교하지 않았으며, 일장기도 게양하지 않았다. 그 결과 소안학교는 항일운동의 산실로 거듭났다. 

특히 소안학교에서 교육받은 학생들은 1927년 교사 송내호를 중심으로 비밀결사단체인 ‘일심단’을 조직했다. 일제는 눈엣가시였던 소안학교를 강제로 폐교시키고, 가담자들을 모두 감옥에 가뒀다. 소안 항일운동의 거목이었던 송내호는 목포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고문 후유증으로 지병인 폐결핵이 악화됐다. 병보석으로 겨우 석방됐지만 1928년 12월 끝내 사망했다. 그때 송내호의 나이, 겨우 서른넷이었다.

최근 복원되어 작은도서관으로 쓰이는 사립 소안학교(좌), 항일운동기념관에 전시된 독립운동가 기록과 학생문집들(우)
최근 복원되어 작은도서관으로 쓰이는 사립 소안학교(좌), 항일운동기념관에 전시된 독립운동가 기록과 학생문집들(우)

 

항일의 섬, 태극기로 부활하다

한때 소안도는 항일운동의 기억을 완전히 지웠다. 해방 후 이념대립의 광풍 속에서 소안 사람들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항일’을 소각해야만 했다. 보도연맹사건으로 많은 주민들이 죽임을 당했고, 아직도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사상 문제로 공적 기념의 영역으로 나오지 못하고 있다. 

소안항일투쟁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89년 동덕여대 이균영 교수가 <해방의 땅, 소안도>를 발표한 직후부터였다. 특히 2005년 도올 김용옥 선생이 직접 연출을 맡은 EBS다큐 <한국독립운동사> 10부작 중 ‘소안항일운동’ 편이 가장 첫머리에 방영됐다. 항일운동사에서 소안도가 차지하는 비중을 세상에 각인시킨 일대의 사건이었다.

소안도 항일운동기념탑

 소안면 바지리 복지회관 앞에는 ‘항일운동기념탑’이 서 있다. 1990년에 세워졌다. 그해 소안도의 항일운동을 이끌었던 송내호 선생 등 14명이 처음 독립유공자로 서훈됐다. 송내호 사후 62년 만의 일이었다. 감격한 주민들은 이번에도 자발적으로 돈을 모아 ‘항일운동기념탑’을 세웠다. 2003년에는 ‘항일운동기념관’이 문을 열었고, 사립 소안학교도 복원됐다. 소안도는 그렇게 천천히 역사에서 합당한 자리를 찾아가고 있다.

지금 소안도에 가면 태극기가 바다에 펄럭이고 있다. 소안도의 모든 집에는 1년 365일 내내 태극기가 걸려 있고, 잔잔한 포구의 바다 위에 마을이 담기면 태극기는 바다 위에서도 펄럭인다. 소안항에는 실제로 가로 18m, 세로 12m의 태극기가 바다에 떠 있다. 2,420개의 친환경 부표를 바다에 부착해 2020년 9월 제작했다. 태극기의 하얀 바탕색은 1,630개의 부표를 사용했다. 태극문양은 빨강 318개, 파랑 318개, 건·곤·감·리 괘는 158개의 검은색 부표를 하나하나 그물에 매달아 연출했다. 해방의 섬 소안도 사람들은 그렇게 항일의 기억을 살리고, 망각을 묻어 나가고 있다. 태극의 바다, 그 위에 소안도가 떠 있다.

소안도 포구에 설치한 대형 태극기 부표 

함께 보면 좋은 자료
다큐멘터리 영화 <소안의 노래>
상영시간_ 85분, 감독_ 김경자

소안도의 항일과 6·25전쟁의 아픔을 다룬 다큐멘터리다. 항일운동에 가담했던 사람들의 후손들과 6·25전쟁을 겪은 사람들과 그 후손들의 구술이 담겼다.

 

글 한경숙  사진 장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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