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끝내 희망 새긴 전투적 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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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끝내 희망 새긴 전투적 서정
  • 전남교육소식
  • 승인 2020.12.31 2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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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자유를 노래한 혁명가 故 김남주 시인

교과서에 수록된 김남주 시
· 사랑은(중3 국어)
·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2015 개정 문학)

1994년 그가 세상을 떠난 후 나온, 그에 대한 첫 번째 평전 앞머리에는 ‘우리 시대의 진정한 혁명가 故 김남주 시인’이라 적혀있다. 마흔 아홉의 생에 10년 세월을 감옥에서 보냈다. 470여 편의 시 중 300여 편를 옥중에서 썼다.

해남군 삼산면 봉학리에 김남주 시인의 생가가 있다. 자그마한 집 두 채, 시인의 흉상과 즐비한 시비들, 그리고 ‘감옥’ 한 칸이 자리잡고 있다. 집 뒤쪽 대숲으로 가는 길에 반원 두 개가 어긋나게 이어진 둥근 시비가 있다. 왼쪽에는 ‘사랑은’이, 오른쪽에는 ‘자유’가 적혀 하나의 원으로 완성되는 구조다. 

 

사랑은 

겨울을 이기고 사랑은
봄을 기다릴 줄 안다 

기다려 다시 사랑은
불모의 땅을 파헤쳐
제 뼈를 갈아 재로 뿌리고
천년을 두고 오늘
봄의 언덕에
한 그루 나무를 심을 줄 안다. 

사랑은
가을을 끝낸 들녘에 서서
사과 하나를 둘로 쪼개
나눠 가질 줄 안다. 

너와 나와 우리가
한 별을 우러러 보며 

오직 인간만이 사과 하나를 둘로 쪼개 나눌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기에, 그런 인간이라면 겨울을 이기고 봄을 기다릴 수 있음을, 미래를 위해서 한 그루의 나무를 심을 수 있음을 노래한, 뜨겁고 아름다우며 희망에 넘치는 시가 ‘사랑은’ 이다.


저항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다 

김남주는 1946년에 태어나 해남에서 중학교까지 마쳤다. 평생의 친구이자 동지인 이강을 중학교 시절에 만났다. 광주제일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동네의 축하가 쏟아졌다. 농사짓지 않고 ‘펜대 굴리는’ 삶을 바랐던 아버지의 기대가 컸다.

하지만 고등학생 김남주는 깊이 절망했다. 친일문학가의 작품이 실린 교과서, 잘 사는 집 아이들이 태반인 학교 분위기, 1965년 박정희 정권의 굴욕적인 한일협정까지. 부조리투성이의 세상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결국 그는 자퇴를 선택했다. 

고등 교과과정을 독학으로 마친 김남주는 전남대학교 영문과에 입학했다. 대학에서 억압적인 사회질서, 모순투성이의 세상에 맞서는 길을 찾아보고자 했다. 영문과를 선택한 이유는 외국의 진보적인 책들을 직접 읽어보기 위해서였다.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 정권은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시켰다. 정당 및 정치활동도 금지시켰다. 이른바 유신체제의 출발이었다. 대학 4학년의 김남주는 피가 끓었다. 저항하지 않고서는 참을 수가 없었다. 훗날 “그것은 인간의 자존심이 문제였노라”고 김남주는 고백했다. 

그가 투쟁의 수단으로 선택한 것은 선언문 <함성>이었다. 김남주는 친구 이강과 함께 선언문을 작성했다. 유신 폭거에 대한 비판과 저항의지, 갑오농민혁명에서 4·19혁명까지 이어지는 민족사를 <함성>에 실었다. 500매 정도를 인쇄해 전남대와 시내 5곳의 고등학교에 뿌렸다. 유신체제를 반대하는 전국 최초의 목소리였다.

공안당국이 발칵 뒤집혔지만 두사람은 추적을 무사히 피했다. 이듬해 봄 두 번째 반유신 선언문 <고발>을 작성해, 전국 대학들에 배포하기로 했다. 그러나 서울에 잠시 머물고 있던 김남주에게 이강이 선언문 <고발>을 보내는 과정에서 들통나고 말았다. 1973년 3월 24일, 대학생 이강과 김남주에게 적용된 혐의는 국가보안법과 반공법 위반이었다.

 

칫솔대 갈아 새긴 옥중시 300여 편
 

10개월의 옥살이를 마친 두 사람은 학생 신분도 빼앗겼다. 친구 이강은 농민들 속으로 들어가고, 김남주는 광주에서 ‘카프카서점’을 열었다. 시인으로 등단한 그는 후배들을 양성하는 문화운동에 매진했다. 한편으로는, ‘혁명의 조직 없이 혁명의 성공은 없다’라는 점을 가슴 깊이 새겼던 김남주는 지하조직 ‘남조선민족 해방전선 준비위원회’(남민전) 활동을 시작했다. 

남민전을 통해 그는, 고통받는 민중들이 정당하게 대접받는 세상, 자유와 평등, 자주와 통일 세상을 이루고자 했다. 1978년 9월 4일 ‘남민전’ 활동을 시작하여 1979년 10월 4일 체포될 때까지, 1년이 넘는 생활 동안 김남주는 ‘남민전’의 기관지인 <민중의 소리>를 제작했다. <아세아아프리카 연감>을 번역하여 조직의 경비를 벌기도 했다. 

김남주는 ‘남민전’ 활동으로 15년형을 선고받았다. 감옥에서도 김남주의 투쟁은 멈추지 않았다. ‘시베리아’라고 불리는 1.06평의 한 칸, 그마저도 뺑기통(변소)을 빼면 겨우 0.7평 정도 되는 광주교도소에서 그는 절규와도 같은 시들을 썼다. 

종이도 연필도 사용할 수 없었다. 우유갑에 칫솔을 날카롭게 갈아 시를 새겼다. 화장지에도 쓰고 편지지의 귀퉁이에도 썼다. 이 시들이 밖으로 나와 <진혼가> (1984), <나의 칼 나의 피>(1987), <조국은 하나다>(1988) 등의 시집으로 출판됐다. 

1988년 12월 22일 형집행정지로 가석방됐다. 9년 2개월 18일 만에 감옥 밖으로 나왔다. 석방을 요구하는 각계각층의 목소리, 1987년 6월항쟁의 영향 등이 작용했다. 옥바라지를 해주었던 ‘남민전’ 동지 박광숙과 이듬해 결혼식을 올렸다. 

고단한 투사가 누린 평범한 삶도 잠시, 1994년 2월 13일 췌장암으로 눈을 감았다. 결혼한 지 오 년밖에 되지 않았던 때, 고작 49세였다. 부인과 네살배기 아들 ‘토일’이를 남긴 채 였다. “월·화·수·목 일하고 금·토·일은 쉬는 삶”의 의미를 담아 아들 이름을 ‘김토일’로 지었다. 

 

김남주 시가 지금도 빛나는 이유 

세상을, 민중을 한없이 사랑했던 시인, 그 ‘사랑’이 가능하려면 ‘자유’가 필요하다는 것이 시인의 외침이었다. 사랑이 자유를 이끌어 내고, 자유가 사랑을 낳는다. 사랑과 자유는 각각 절반의 원이다. 만났을 때 비로소 완성된다. 생가의 시비 는 그것을 형상화한 것이었다. 


자유 

만인을 위해 내가 일할 때 나는 자유
땀 흘려 일하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이다라고 말할 수 있으랴 
만인을 위해 내가 싸울 때 나는 자유
피 흘려 함께 싸우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이다라고 말할 수 있으랴
만인을 위해 내가 몸부림칠 때 나는 자유
피와 땀과 눈물을 나눠 흘리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이다라고 말할 수 있으랴
사람들은 맨날 겉으로는 자유여, 형제여, 동포여! 외쳐대면서도
안으로는 제 잇속만 차리고들 있으니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제 자신을 속이고서. 


여러 번 반복되는 이 시의 질문 앞에서 우리는 부끄럽다. ‘자유’는, 적당히, 대충대충, 때론 군중 속에 숨어 근근하게 생을 이어가는 우리들의 등을 치는 호된 죽비이자 정수리 위로 쏟아지는 벼락이다. 

시간이 흘러도 김남주의 시가 여전히 빛나는 이유는 사람이 사람일 수 있는 보편적인 길을 노래하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은’에서, 그리고 ‘자유’에서 그 길을 확인한다. 두 시는 각각 시인의 서정과 혁명가의 격정을 대표하기도 한다.

한 해를 시작하는 1월. 누구나 한번은 해보는 새해의 결의와 다짐을 ‘자유’에서, 그리고 일 년 동안 결코 잃어서는 안 되는 인간다움을 ‘사랑은’에서 되새겨본다. 시인이자 혁명가인 김남주의 ‘자유와 사랑’은 미래를 꿈꾸는 자라면 누구나 끝끝내 지니고 가야 할 ‘희망’의 다른 이름인지도 모른다. 


글 최민임  사진 김남주기념홀 
 

김남주 시인을 만나는 몇 가지 방법

그가 잠들어 있는 곳은 5·18 망월묘지(구묘역)이다. 묘비에는 ‘온몸을 불태워 나라와 민족을 사랑한 시인의 영혼, 여기에 잠들다’라고 쓰여 있다. 광주 중외공원에는 시인의 흉상과 함께 그의 시 <노래>가 새겨져 있다. 전남대 인문대학에는 2019년 개관한 ‘김남주기념홀’이 들어서 있다. 시인의 일대기, 시집, 산문집, 번역집 등 25권의 저서와 ‘바람에 지는 풀잎으로 오월을 노래하지 말아라’ 등 옥중에서 쓴 육필 원고 6~7편 등이 전시돼 있다.

김남주 시인은 시대를 먼저 걸어 간 번역가이기도 했다. 번역시집 <아침 저녁으로 읽기 위하여>는 옥중에서 교도관 두 명에게 종이와 펜을 몰래 얻어 한 글자 한 글자 새기듯 번역해 놓은 작품집이다. 이 시집에는 베르톨트 브레히트, 루이 아라공, 마야콥스키, 하인리히 하이네 등 자신의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시인들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김남주를 만나는 또 다른 방법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이다. 안치환은 김남주 시인의 여러 편의 시를 노래로 불렀다. 2002년에는 <故 김남주 헌정앨범 안치환 6.5집 Remember> 를 발매했다. 유튜브로 ‘김남주 시인’을 검색하면 그에 관한 몇 편의 다큐멘터리를 볼 수 있다. 또 <자유>, <학살>, <이 가을에 나는> 등의 시를 시인의 목소리로 직접 들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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