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 속 전남] 망국의 시대에 빛난 이름 없는 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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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 속 전남] 망국의 시대에 빛난 이름 없는 별들
  • 전남교육소식
  • 승인 2020.10.30 2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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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을 이끈 광주·전남의 학생들

1929년 10월 30일 오후 5시 30분 경. 광주에서 출발한 통학열차가 나주역에 도착했다. 통학생들이 열차에서 내려 걸어 나오는데 일본인 학생 몇 명이 광주여자보통학교 3학년 학생 박기옥·이금자·이광춘 등의 댕기 머리를 잡아당기면서 모욕적인 발언과 조롱을 하였다. 

그때 역에서 같이 걸어 나오고 있던 박기옥의 4촌 남동생이며 광주고등보통학교 2학년생인 박준채 등이 격분하여 이들과 충돌하 였다. 그때 출동한 역전 파출소 경찰은 일방 적으로 일본인 학생을 편들며 박준채를 구타 하였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의 발단이 된 ‘나주역 충돌’ 사건이다.(이상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에서 발췌, 재구성)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 안에 전시된 당시의 상황 재연 그림

사건은 11월 3일 항일 가두투쟁으로 이어졌다. 이 때부터 시작되어 이듬해인 1930년 3월 하순 재판 과정까지 조인인 학생들의 투쟁은 약 5개월 간 이어졌다. 외형상 조선학생과 일본학생의 ‘우발적’인 충돌이 항일운동으로 전환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엄혹한 식민지 시대에 ‘충돌’이 ‘항일’로 빠르게 전환되는 건 쉽지 않다. 조직적인 이면의 활동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충돌 이전, 1926년 비밀결사 성진회, 1928년 맹휴중앙본부 및 여학생 비밀결사 소녀회, 1929년 독서회중앙부 및 학교별 독 서회, 학생소비조합 등의 활동이 항일역량을 축적한 과정이었다. 이 같은 항일역량의 조직 화 과정과 후반기 옥중투쟁 시기 등을 포함 하면 광주학생독립운동의 기간은 1926년부 터 1931년까지 확장될 수 있다. 

대부분의 교과서들은 사건의 외형만을 간략하게 다룬다. 이 지면에서는 앞뒤 맥락과 주도적인 인물들을 중심으로 광주학생독립 운동을 살펴보고자 한다. 

 

성진회 결성, 그들이 부동정 하숙집에 모인 까닭

1926년 11월 늦가을 정취가 짙어가던 저녁 나절, 광주천변 옆 부동정에 위치한 최규창의 하숙방으로 청년들이 모여들었다. 이 하숙집은 광주고보 1회 졸업생 최동문의 집이었다. 모여든 청년들은 왕재일, 장재성, 안종익, 김광용, 국순엽, 임주홍, 최규창, 김창주, 정우채(이상 광주고보), 박인생, 정남균, 문승수, 정동수, 정종석, 김한필(이상 광주농업학교) 등이었다. 

이들은 이날 비밀결사 성진회를 공식 발족하고, 한국독립쟁취, 식민지 노예교육반대, 언론·출판·결사의 자유 등을 행동방침으로 정했다. 이들은 정기회비를 납부하면서 월 2회 격주 토요일 오후에 독서회를 진행했다. 그러나 창립 5개월 즈음, 조직의 기밀이 샐 것을 우려하여 성진회는 형식적으로 해체된다. 

학생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해 일제에 대항했다.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사업회 사진 제공)
학생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해 일제에 대항했다.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사업회 사진 제공)

장재성(장흥)과 안종익(광주), 박인생(제주) 등은 졸업과 함께 일본유학을 떠났고, 왕재일(구례)은 방직공장에 취업했다. 정남균(완도)은 농업학교를 졸업한 후 동아일보 완도지국 기자로 활동했다. 장재성박인생은 일본에서 재동경조선인유학생학우회에 참여했다.

1928년 광주고보를 졸업한 김광용국순엽은 북경유학을 갔는데, 그중 국순엽은 무정부주의자 운동에 참여했다. 장재성은 귀국 할 때마다 전남청년연맹에 참석했고, 일본유학을 포기한 1926년 이후 광주에 정착한 장석천 등을 비롯해 강해석, 지영수 등과 긴밀하게 교류했다.

성진회는 형식상으로 해체되었지만 재학생들은 만남을 이어갔다. 정동수(담양), 문승수(완도), 김한필(상주), 정종석(옥천), 최규창, 이동선, 김기주 등은 수차례 전남청년 동맹원들과 어울렸다. 정남균의 친인척 유치오나 김시성 등도 이들 모임에 참여한다. 

 

광주사범학교 학생들의 궐기 

 

1927년 2월 광주사범학교에 다니던 기숙사생 윤형남이 밤늦게 독서실에서 공부하던 중 일본인 체육교사 가토에게 구타당하고, 민족 차별 망언을 들었다. 이에 3학년 진급을 앞둔 하의철, 박무길, 이동선, 정귀석을 중심 으로 40여 명의 기숙사생들이 교사 배척운동을 전개했다. 이후 이들은 광주청년동맹 강해석과 지용수의 지도를 받아 광주농업학교 및 광주고보생들과 모여 사회과학연구모임을 진행한다. 

당시 광주사범학교는 3년제 학교로 이 들은 모두 1928년 3월 졸업과 함께 전남지 방 보통학교 교사로 발령 받았다. 비밀독서회 활동은 후배들인 임종근, 김기주, 최상호, 김태영, 임종대, 김필재 등이 계속 이어갔다. 그 후 1929년 7월 강달모, 이신형 등을 중심으로 광주사범학교 독서회가 결성됐다. 

 

학생맹휴와 장재성의 역할

 

1928년 여름 광주는 맹휴(동맹휴학)의 열풍지대였다. 사건은 6월초에 광주고보 5학년이자 송정청년회 소속 이경채가 항일격문을 발송한 것이 발각되어 체포되고, 학교당국 으로부터 퇴학당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시작됐다. 이 과정에서 광주고보 교장은 학교 규칙 위반을 이유로 3백여 명을 무기정학 내지 퇴학 처분했다. 

이에 학부형회가 학교당국과 교섭을 하지만 갈등은 더욱 심해졌다. 학생들도 학교 당국에 반발하면서 맹휴 상태가 장기화됐다. 당시 정동화, 서재익, 최규창, 이만동, 김기권  등은 맹휴중앙본부를 결성해 활동했다. 학교 당국에 협조하는 굴욕적인 학생들을 응징하고, 조선인 본위의 교육제도 등을 주장하는 격문을 살포했다. 결국 체포되어 각각 징역형을 받았다. 

당시 일본유학생 장재성은 일시 귀국하여 맹휴중앙본부 결성 등에 관여했다. 장재성은 체포됐지만 10일 만에 증거부족으로 석방 되어 곧바로 일본으로 떠났다. 여름 기간 동안의 맹휴는 늦가을 11월로 이어졌다. 광주여고보 학생들이 장매성을 중심으로 소녀회 를 조직한 것이다. 1928년 맹휴는 한 해 뒤인 1929년 광주학생운동의 예고편에 다름 아니었다.

1929년 봄학기가 시작되고 5월 하순 장재성은 일본유학을 중단하고 귀국했다. 그는 전위결사체 성격의 성진회와 달리 다수의 학생들이 참여하고 그들을 지휘할 수 있는 광주독서회중앙부를 비밀리에 결성했다. 또 한 김기권, 나승규 등은 학생소비조합을 운영했다. 이들은 1929년 11월 광주학생운동이 발발하자 저마다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광주학생독립운동 전후 주요 사건(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 홈페이지 참조)
광주학생독립운동 전후 주요 사건(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 홈페이지 참조)

 

오쾌일의 이름으로 작성된 항일격문 

 

1929년 11월 12일 제2차 항일시위에서 광주시내에 실명으로 작성된 격문이 살포되었다. 장재성 등의 지휘를 받아 광주고보생 오쾌일김안진 등의 학생들과 함께 작성한 것이었다. 격문에는 반일운동뿐만 아니라, 식민지 국가폭력에 대한 규탄, 근대 시민사회 등장 이후 출현한 보편적 민주주의 요구사항까지를 폭넓게 담고 있었다.

당시 학생들이 요구한 내용들을 분류해 보면, ①조선인 본위의 교육제도 확립 ②민족 문화와 사회과학연구의 자유 ③교우회 자치권 및 학생단결권, 직원회에 학생대표 참석권 ④학부형회 개선 ⑤집회·출판·결사의 자유 ⑥검거자 즉시 석방 및 탈환 ⑦일본편향 재향군 인회, 소방대, 청년단 해체 ⑧조선민중 궐기, 학생대중 궐기, 청년대중 궐기 등이다. 격문은 당시 신흥사조로서 사회과학연구가 확산되었음을 보여주는 문건이다. 

 

신간회 집행위원의 광주 방문과 광주학생투쟁본부 

제1차 학생시위(11월 3일)가 우발적 충돌이었다면, 11월 4일 이후 학생투쟁지도본부 조직 후 제2차 학생시위(11월 12일) 및 11월 하순 나주, 목포, 함평 등에서 전개된 학생맹휴나 시위는 치밀한 계획에 따른 것이었다. 항일운동의 전국화는 당시 이 운동의 성격을 보여준다. 초기부터 광주학생운동 지도부는 조선청년총동맹 및 신간회 본부 등과 연계하여 전국학생운동 조직화를 추진했다. 그렇게 해서 12월 서울학생시위, 1930년 1·2월 서울학생시위 및 전국학생시위가 가능 했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은 단지 ‘광주’의 학생들만이 참여한 운동은 아니었다. 1929년 말부터 1930년 초반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여파로 맹휴나 시위운동에 참여하여 구속된 각지의 학생들은 퇴학이나 정학 등의 처분을 받았다. 1930년 2월부터 1931년 6월까지 시위 및 저항운동과 관련되어 각지의 학생들이 투옥되는 등 고초를 겪었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은 ‘학생’들만의 운동도 아니었다. 이 경험은 1930년대 사회운동에 꾸준한 영향을 미쳤다. 광주학생운동 이 후 그 항쟁을 기념하며, 스스로 제2의 광주학 생독립운동을 표방하는 사회운동이 뒤따랐다. 광주학생독립운동 참여자들은 농민운동, 노동운동, 반제독서회, 공장파업 등에 참여했다. 그 여파로 각종 반일운동이 1930년대 초 반에도 전국에 여러 차례 이어졌다. 

학생가두행진. 영화 '이름 없는 별들'의 한 장면(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 전시)
학생가두행진. 영화 '이름 없는 별들'의 한 장면(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 전시)

 

조선인 여학생들의 활약상 

광주학생독립운동 소식에 가장 적극적으로 반응한 것은 각지의 남녀학생들과 청년 단체였다. 호남권인 목포, 전주, 고창을 비롯해 서울, 개성, 청주, 원산이나 영변, 간도 등지에서도 광주의 학생들이 외친 조선인 본위의 교육제도 수립 및 식민통치 반대 등을 표방하는 항일시위를 전개했다. 

학생운동의 전국적 확산과정에서 두드러진 점은 여학생들이 집단적으로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는 점이다. 나주역 사건 등이 알려지면서 여학생들의 대대적인 백지동맹, 동맹휴학, 항일시위가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광주여고보, 전주기전, 목포정명여학교를 비롯해 서울에서는 이화여고보, 숙명여고보, 배화여고보, 경성여자상업학교, 동덕여학교, 실천여학교 등 많은 사립여학교 학생들이 시위 운동에 참여했다. 청주고등여고보, 평양여고보, 개성의 호수돈여학교 등도 적극 참여한 것을 볼 수 있다. 특히 1930년 1월 근우회의 지원을 받은 서울여학생만세운동은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영향을 받은 중요 사건이지만 그동안 상세히 알려지지 않았다. 

 

재판정에 선 학생들과 옥중투쟁 

1930년 2월 광주법원에서는 투옥된 지 3개월만에 법정에 등장하는 학생들을 보기 위해 학부형과 기자, 경찰 등이 몰려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이날 경성지방법원에서도 서울여학생만세시위 관련 재판이 진행됐다. 

일제는 이 재판의 성격을 ‘학생충돌사건’ 으로 국한하지 않았다. 이미 검거 범위가 학생을 넘어서 청년동맹, 소년동맹, 신문기자 등으로 넓어졌다. 재판은 또한 성진회 및 독 서회중앙부, 소녀회 사건 등 조직사건으로 집중되면서 치안유지법이 적용되어, 투옥된 학생들의 형량이 증가했다. 

학생들은 법정에서 자신들의 항일활동의 정당성을 역설했다. 감옥에서는 고문과 폭행에 맞서는 옥중투쟁을 전개하기도 했다. 이런 집단적인 옥중경험은 이후 광주학생운동 참여자들이 각 분야에서 항일운동의 새로운 주역으로 역할을 하는 기반이 된다. 

1930년 2월 투옥된 지 3개월만에 법정에 등장하는 학생들을 보기 위해 학부형과 기자, 경찰 등이 몰려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1930년 2월 투옥된 지 3개월만에 법정에 등장하는 학생들을 보기 위해 학부형과 기자, 경찰 등이 몰려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광주학생운동의 몇 가지 장면을 간추려 보았다. 체계적인 조직화 작업과 독립을 성취하기 위한 이론 연구의 노력들이 매 시기별로 다양한 영역에서 포착된다. 1929년의 ‘충돌’은 학생들의 참여를 전면화시킨 계기라 할 수 있다. 하루 이틀 떠들썩하다 끝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사람을 준비하고, 방향을 설 정하는 조직화 및 이론 연구의 기초가 있어 서 수많은 학생들의 참여가 가능했고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준비된 투쟁에 다름 아니었다. 

이들의 노력은 해방 후 건국 과정으로까지 이어진다. 안타깝게도 광주학생독립운동 의 주역들 대다수는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잊혀졌다. 당대의 청년학생들은 모두 세상을 떠났다. 오늘날 그들은 이름 없는 별이 되었다. 하지만 그 역사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다. 학생들을 움직인 동력은 “불의의 시대에 맞서라”는 소명이었다. 그럼으로써 불의가 완전히 소멸되기 전까지 학생운동의 역사는 언제나 현재진행중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 글 김홍길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사업회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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