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붙이지 못한 역사, '여순사건'

1948년 10월 19일 밤, 여수 서쪽 구봉산 자락 군부대 14연대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김지회 중위를 비롯한 40여 명의 군인이 출동명령 거부를 선언했다. 금세 2,000여 명으로 불어난 봉기군은 바닷가를 따라 시내로 행군했다. 

이들은 날이 밝기 전 여수 시가지를 접수하고, 기차를 타고 이웃 도시 순천으로 진출했다. 경찰이 막으려 나섰지만 역부족이었다. 순천 주둔군도, 광주에서 급파된 진압군도 봉기군에 합류해버렸다. 수를 불린 이들은 광양, 구례, 곡성, 보성, 벌교, 고흥 등으로 뻗어나갔다.

봉기군은 ‘제주토벌출동거부 병사위원회’라는 이름으로 성명서를 발표했다. “조선 인민의 아들인 우리는 형제를 죽이는 것을 거부하고 제주도 파병을 거부한다”라고 주장하고, ‘동족상잔 결사반대, 미군 즉시 철퇴’라는 두 가지 강령을 선언했다. 

그 무렵 바다 건너 제주도는 생지옥이었다. ‘단독선거 단독정부 수립 반대’를 외친 제주도 도민들을 무차별로 잡아 가두고, 육지에서 극우단체 청년들을 데려다 ‘테러의 자유’를 줬다. 도처에서 폭행, 강간, 고문이 난무했다. 

제주는 피바다가 됐다. 1953년 한라산 출입금지령이 해제될 때까지 7년 동안 최대 3만 명이 죽었다. 제주 인구 10분의 1이었다. 조천면(지금의 제주시 조천읍) 북촌리는 한날한시에 주민 400여 명이 총살을 당했다. 이 통한의 7년이 바로 제주 4·3사건이다. 여수 14연대는 제주도민 학살을 거부했던 것이다. 

이승만 정부는 ‘반란군’ 진압을 위해 여수와 순천 일대에 거의 모든 병력을 쏟아 부었다. 10월 23일 순천을, 10월 27일 여수를 마지막으로 진압할 때까지 총 15개 연대 2만 5,000여 병력을 동원했다. 휴전선과 제주도 병력을 제외한 거의 전부를 전남 동부에 집결시켰다. 

육·해군 합동 진압군이 여수항 앞바다에서 상륙을 시도하며 박격포를 쏘는 등 네 차례 시가지를 공격했다. 여수는 이틀 동안 불에 타 결국 잿더미가 됐다. 특히 시내 중심부인 중앙동과 교동 일대는 완전히 폐허가 됐다. 미군 보고서는 ‘도시의 4분의 1을 파괴시켰다’라고 기록했다. 10월 27일 오후, 정부는 여수를 완전히 진압하고 14연대를 해산시켰다. 

 

침묵으로 차례를 기다리는 이들 
 

사태는 9일 만에 끝이 났다. 그러나 진압이 끝나면서 여순사건은 다시 시작됐다. 진압군과 경찰은 봉기군에 협력한 주민들을 색출하기 시작했다. 군인들이 지리산으로 퇴각하며 거쳐 간 산골에까지 들이닥쳤다. 색출과정은 폭력과 죽임이었다. 주민들을 모아놓고 그 자리에서 총살하거나 잡아갔다. 그가 동조자인지 아닌지도 분명치 않았다. 
 
미국 잡지 <라이프> 도쿄지국장이었던 사진기자 칼 마이던스는 한국으로 건너와 여순사건을 기록했다. 1980년 5·18 때 독일인 위르겐 힌츠페터 기자가 있었다면, 1948년 여순사건 때는 미국인 칼 마이던스가 있었다. 그는 운동장의 모습을 회고했다. 
 
“한쪽에서는 그 (총살) 광경을 여자들과 아이들이 가만히 보고 있었다. 그중에서 나에게 가장 무서웠던 장면은 아녀자들의 숨 막힐 것 같은 침묵과, 자신들을 잡아온 사람들 앞에 너무도 조신하게 엎드려 있는 모습과, 얼굴이 옥죄어 비틀어진 것 같은 그들의 표정, 그리고 총살당하러 끌려가면서도 한마디 항변도 없이 침묵으로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이들이었다. 살려달라는 울부짖음도, 애처로운 애원의 소리도 없었다. 신의 구원을 바라는 중얼거림도, 다음 생을 바라는 한마디의 호소조차 없었다. 수 세기의 시간이 주어진다 해도 그들은 소리 내어 울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 
 
1980년 광주에 있었던 독일인 위르겐 힌츠페터 기자는 5·18을 상무관의 통곡소리로 기억했는데, 칼 마이던스 기자는 여순사건을 운동장의 침묵으로 회고했다. 여순사건 30여 년 후에도 부당한 권력이 자국민을 학살했다. 1980년에는 소리 내어 통곡이라도 할 수 있던 것이 그나마 나아진 점일까. 죽음 앞에서 한 조각 감정표현도 할 수 없을 만큼 공포가 압도한 시대는 과연 무엇일까. 

 

제대로 이름 붙이지 못한 역사 

‘여수·순천 10·19 사건(이하 여순사 건)’ 발발 1년 후 전남 당국은 희생자가 1만 1,131명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희생자 규모는 그 시점에서 멈추지 않았다. 체포되어 징역을 살다가 1950년 한국전쟁 때 처형된 사람들, 여순사건 연루자로 국민보도연맹에 가입됐다가 처형된 사람들도 있다. 여순사건을 오래 연구해 온 역사학자 주철희 박사에 따르면, 여순사건 관련 희생자는 이 세 유형을 합쳐 최소 1만 5,000명~2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2000년대 정부 산하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가 유가족 신청을 받아 피해자 1,963명의 사례를 조사 했다. 전체 피해자의 10% 정도 수치였다. 이중 군·경과 우익에 의해 죽은 경우가 84.9%, 소위 ‘반란군’과 좌익에 의해 죽은 이가 10.9%로 파악됐다. 

큰 사건이 일어나면 후대 역사가들은 그 사건을 연구하고 성격을 규정한 후 이름을 붙인다. 그런데 여순사건은 이름이 없다. 여순사건은 제대로 된 진상규명도, 명예회복도 없이 상처 그대로 갇혀 있다. ‘반란’과 ‘항쟁’ 사이를 오가며, 70년이 넘도록 ‘여순사건’ 또는 ‘여수·순천 10·19사건’으로만 불리고 있다. 

역사학자 도올 김용옥은 여순사건을 ‘여순민중항쟁’이라 호명하며 강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순사건은) 정의로운 항쟁이었다. 여기에 세부적인 시시비비가 있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 정국에서 국가의 공권력이 제대로 된 틀을 갖고 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런 짓을 저지른 국가는 해방정국에서 우리가 만들려던 국가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런 의미에서 (여순사 건은) 국가적 반성을 요구하는 사태이지 세부적인 시비를 따질 문제가 아니다. 새로운 민주국가의 건설 노정에서 여순 사건을 반드시 정당한 민중항쟁으로 대접해야 한다.” 


분단국가 남한의 잘못 끼운 첫 단추


해방 이후 독립국가를 건설하려는 다양한 ‘열망들’이 있었다. 그 열망들이 온전히 수렴되지 못한 채, 정통성을 두루 인정받지 못한 대한민국이 탄생했다. 새 나라의 청사진에 대한 의견과 이견은 충분히, 아니 당연히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이승만은 부족한 집권기반을 친일파로 채웠다. 동시에 ‘빨갱이’라는 적을 만들어내고 이견을 학살하며 자기 세력의 정치적 위기를 돌파해갔다. 

반란이냐, 항쟁이냐를 떠나 여순사건은 ‘다른 열망’의 분출이었다. 다르다고 시키기 위해 ‘빨갱이’를 창조했다. 이렇게 창조된 ‘빨갱이’는 박정희-전두환 등 독재권력이 끊임없이 재활용했다. 지금이라고 해서 사정이 달라진 건 아니다. 

한국 사회에서 빨갱이는 가장 끔찍한 낙인이다. 빨갱이는 바른 말을 하려는 이들의 입에 재갈을 물렸다. 돌연변이를 잘 일으키는 바이러스처럼 빨갱이는 좌빨, 종북, 친북, 용공 등으로 변주돼 우리 사회의 합리적 토론과 이견의 조정을 방해하고 있다. 빨갱이 낙인찍기는 여순사건에서 본격 시작됐다. 여순사건은 분단국가 남한이 잘못 끼운 첫 단추다.

 

만성리 골짜기에서 여수 사람들이 돌을 던지는 이유

밤바다가 아름다운 도시 여수, 그 동편 끝자락에 검은 모래 해수욕장으로 유명한 만성리가 있다. 여순사건 당시에는 시내를 벗어나 마래터널을 지나야만 닿는 해안가 마을이었다. 진압군은 이 외진 곳에서 시내 사람들의 주목과 접근을 피해 학살을 저질렀다. 그런 장소들은 또 있다. 시내 북쪽 호명동에도 시신 암매장지가 있다. 1990년대 초 도로공사를 하던 중에 많은 유골이 쏟아져 나왔다. 봉계동 야산에서도 유골들이 발굴됐다. 앞으로 또 어디에서 발굴될지 알 수 없다.

만성리 검은모래해변 옆 길가에 여순사건 사적지 두 곳이 있다. 어디서나 흔히 있을 법한 야산과 골짜기에, 거
대한 죽음이 묻혀있다. 1948년 11월 진압군이 수백 명의 여수 주민들을 끌어다가 총살해 죽인 후 흙과 돌로  묻어버린 ‘학살지’다. 만성리 주민들은 그 서늘한 골짜기 옆을 지나가지 못했다. 여수 시내로 가는 지름길이었지만 빙 돌아서 다녔고, 꼭 지나야 한다면 추모의 뜻으로 돌을 하나씩 던져두었다. 학살지에 쌓인 돌들은 탑을 이뤘다.

근처에 있는 ‘형제묘’ 역시 학살터다. 형제가 묻혀 있는 게 아니다. 1949년 1월 진압군이 125명의 주민을 끌고와 총살하고 불태워버렸다. 시신을 5구씩 눕히고 그 위에 장작을 쌓듯이 또 5구씩 쌓아 올렸다. 5층을 이룬 시신더미가 모두 5개, 그렇게 125명이 불태워졌다. 기름을 부어 불을 붙인 시신 더미는 사흘 동안 탔다. 유가족들이 와보니 타버린 잔해들이 엉켜 있어 도무지 형체를 알아볼 수도, 분리해낼 수도 없었다. 형제처럼 다 함께 있으라고 그대로 큰 묘를 만들고 하나의 비석을 세웠다.

2008년의 일이다. 만성리에서 60주기 추모사업을 진행하는데 여수시는 희생이라는 말을 쓰기를 원했고, 시민단체나 지역민들은 학살이라는 단어를 주장했다. 완성된 비석은 비문을 기다리고 있건만 희생과 학살은 줄다리기를 거듭했다. 결국 추모사업추진위는 점 여섯 개의 말줄임표로 처리해버렸다. 60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정리하지 못한 사연과 입장이 답답한 묵묵부답에 담겨 있다.

 

글 이혜영 사진 장진주조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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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BS광주 유튜브 <랜선 역사기행 ‘여순 그리고 4·3’>
o 방송일: 10. 19.(월) ~ 10. 23.(금) o 내용: 서승 교수, 김태빈 한성여고 교사 등과 함께 하는 여수 14연대 주둔지, 마래터널, 형제묘, 순천 태백산맥 문학과 등 현장탐방 o 구성: 25부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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