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자리에 앉아 천 개의 공간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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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자리에 앉아 천 개의 공간을 만나다
  • 전남교육소식
  • 승인 2020.08.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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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송정~순천으로 흐르는 ‘경전선’
보성 광곡역을 지나는 무궁화호(아래). 경전선 철로는 전라도의 들쑥날쑥한 지형과 씨름하듯 휘감으며 나아간다.

오전 6시 13분 광주송정역, 다섯 량 크기의 경전선 무궁화호가 순천을 향해 움직인다. 묵직하고 느리다. 옆 레인에서는 서울로 가는 KTX가 쉬익~ 바람 가르는 소리를 내며 날렵하게 지나간다. 대략 스무 명 남짓한 승객들이 기차 안 이곳저곳에 몸을 부린다.

모든 여객 수단은 공간의 풍경을 둘로 나눈다. 하나는 안쪽이고 또 하나는 바깥쪽이다. 둘이 거느린 풍경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바깥쪽은 빠르고, 안쪽은 느리다. 

고속버스나 비행기의 안쪽 풍경은 사실상 바뀌지 않는다. 출발지에서 함께 한 사람들이 종착지에서도 그대로이다. 바깥 또한 그 변화가 제한적이다. 변화하고는 있으되 그것을 인지하는 창이 바깥 풍경을 온전히 전달하지 못한다. 너무 빠르거나, 너무 높거나, 단조로운 직선이기 때문이다. 결국 고속버스나 비행기에게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세계는 출발지와 종착지뿐이다.

기차는, 그 중에서도 전라도권역 경전선 무궁화호라면 다르다. 넓은 창이 느리게 움직이는 바깥의 풍경들을 온전히 안쪽으로 초대해준다. 정차하는 역마다 누군가는 바깥으로 사라지고, 또 누군가는 안쪽으로 등장한다. 이동하는 공간의 안과 밖이 부단히 변화하는 셈이다.

경전선 무궁화호에 오르면 한자리에 앉아 천 개의 공간을 만날 수 있다. 무궁화호의 느림은, 바깥쪽의 마을들을 찬찬히 되새김질 할 생각의 시간을 선물로 준다.

전라도 내륙의 지형은 산과 들과 강이 끊임없이 반복된다. 경전선 철로를 깔던 20세기 중반에는 이 자연장애물들을 직선으로 돌파할 기술도 자본도 부족했다. 그래서 철로는 들쑥날쑥한 지형과 씨름하듯 휘감으며 나아간다. 덕분에 풍경은 훨씬 입체적으로 다가온다. 느리고 굽어서 변화를 체감하는 강도가 쌔다. 

광주송정역에서 순천까지 가는 데 두 시간 반 가까이 걸린다. 동력으로 움직이는 교통수단 중에 가장 게으르다. 단선 철로인 탓에 마주 보고 달리는 기차는 규모가 있는 역에서 교행 해야 한다. 어느 때 타더라도 한번쯤은 반대편에서 오는 기차가 지나가도록 멈춰서 기다려 줘야 한다. 이 느림은, 안쪽의 사람과 바깥쪽의 마을들을 찬찬히 되새김질 할 생각의 시간을 선물로 준다. 

벌교역을 지나는 기차

경전선 무궁화호 안에 앉아 있으면 시계는 대략 20년 전으로 후퇴하고, 눈앞의 색감은 거짓말처럼 흑 백톤으로 변한다. KTX나 비행기, 혹은 서울로 가는 우등버스에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화면들이 안팎에서 옛날 영화처럼 펼쳐진다. 

광주송정-서광주-효천-남평-화순-능주-이양­명봉-보성-득량-예당-조성-벌교-순천… 등이 바깥 화면의 시퀀스(영화의 이야기 단위)들이다. 할아버지, 할머니, 아줌마, 아저씨, 중학생, 고등학생, 처녀, 총각 등이 안쪽 화면의 컷들이다. 안과 밖이 포개지고 사람들의 말이 더빙되면 경전선은 이야기를 가득 품은 시나 소설, 또는 영화가 되어버린다. 

득량역에는 추억의 감성을 충분히 맛볼 수 있도록 역과 그 주변이 잘 정비되어 있다.  

기차가 훑고 지나가는 경전선 바깥들은 실제로도 이야기의 보물창고이다. 남평역은 임철우의 소설 <사평역>의 무대였다. <만다라>를 쓴 작가 김성동이 소년 시절 가출했다가 주린 배를 움켜잡고 내린 곳은 이양역이었다. 장돌뱅이 아들로 태어난 <월행>의 작가 송기원은 조성역을 무대로 온갖 부잡한 일을 벌였다. <태백산맥>의 염상구는 벌교역 철로에서 주먹 세계의 경쟁자인 ‘땅벌’과 결전을 치렀다. 순천역에 닿기 직전 오른쪽 바닷가에는 <무진기행>의 주인공이 무기력하게 걸었던 순천만 습지의 갈대숲이 펼쳐져 있다. 

기차 안쪽의 분위기도 만만치 않다. 천하의 앙드레 김이 온통 하얀색 옷을 입고 경전선에 오른다면, 그는 조금 유별난 논두렁 멋쟁이로 ‘전락’할 것이다. 혹여 안젤리나 졸리가 여행가방을 들고 자리를 찾아 두리번거린다 할지라도, 그녀는, 농촌총각에게 시집온, 상당히 예쁜 외국인 새댁이 될 것이다. 누구라도, 무엇이든,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는, 경전선이 강제하는 맥락의 힘은 그만큼 강력하다. 

순천역에서 내리니 낯선 문자메시지가 도착한다. “20분 이상 지연 도착해 사과 말씀을 드린다”면서 “1년 이내에 배상 신청을 할 수 있다”는 한국철도공사의 안내글귀다. 교행을 위해 득량역에서 25분가량 정차했었다. ‘뭐 그럴 수도 있죠, 괜찮습니다’, 라고 속으로만 답했다.

현재의 서부경전선은 경전선 전철화 사업이 완료되면 본래의 의미는 축소된다. 전철화 사업은 오는 2028년에 완성될 예정이다.
광주송정역에서 출발해 순천역까지 2시간 20분 걸린다.

광주와 순천을 오가는 외길의 경전선. 질박한 전라도의 마을들이 옛이야기처럼 웅얼대며 흘러가고, 그 마을의 사람들이 한 보따리의 이야기들을 이고 진 채 오르거나 내린다. 기찻길은, 마치 고샅과도 같아서, 덧없이 굽어 있고, 느리고, 그래서 평화롭다.

이 모든 말들이 믿기지 않거든, 한번 타보시라. 가능하면 여럿이 함께, 의자를 돌려 마주보며 가기를 권한다. 무한속도경쟁 시대에, 전라도 내륙을 횡단하는 이 굼벵이 같은 교통수단은, 출발지에서 종착지에 이르는 모든 풍경들을 높은 해상도로 소개해준다. 한 자리에 앉아 천 개의 공간을 만날 수 있다.

 

◎ 더 들여다보기

경전선 전철화, 부산~광주 2시간 24분 시대 ‘성큼’

 
경전선은 경상도와 전라도를 잇는다는 데서 만들어진 이름이다. 지금은 광주송정역~순천역이 기본 구간이다. 순천역에서 환승을 통해 삼랑진역까지 갈 수 있다.

시대의 변화와 함께 경전선 노선은 여러 차례 바뀌었다. 잘 나가던 때는 목포에서 부산진까지 한 번에 이어지기도 했다. 최근에는 승객이 너무 없어 폐선까지 검토됐다.

지금은 놀라운 ‘부활’을 준비하고 있다. 지난해 정부가 광주역~순천역 122.2km 구간을 전철화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전철화 사업이 완료되면 기차로 6시간 넘게, 자동차로 4시간 안팎으로 걸리던 광주~부산 이동시간이 2시간 30분대로 단축된다.

경전선 노선도
경전선 노선도

현재 공사가 진행중인 목포~보성 구간이 마무리 되면 목포~부산 구간 또한 기존 6시간 33분에서 2시간 24분으로 단축된다. 영호남 간 접근성이 크게 좋아질 뿐 아니라 물류비용 절감으로 남해안권역의 경제효과 또한 비약적으로 개선될 전망이다.

다만, 경전선 본래의 ‘의미’는 크게 축소된다. 서광주~광곡(보성역 직전) 구간이 사라지고, 보성에서 순천까지 가는 노선도 득량과 예당 등 일부가 없어진다. 대신 광주-광주송정-혁신도시-보성 구간이 신설된다.

경전선 전철화 사업의 완료 시점은 2028년이다. 느림이 주는 특별한 감성을 경험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현재 경전선은 하루 3회 운행된다(표 참조). 광주송정역을 출발한다면, 중간 어느 역(예컨대 득량역이나 벌교역)에서 내려 주변을 여행한 후 다음 기차를 타고 순천까지 가는 방법이 있다. 득량역에는 추억의 감성을 충분히 맛볼 수 있도록 역과 그 주변이 잘 정비되어 있다. 벌교역의 경우 낙안읍성이나부용산 등 주변관광 요소들이 풍부하다. 하루 3회 열차시간표를 잘 활용하면 느려서 깊이 있는 특별한 여행을 기획할 수 있다. 

 

글 이정우  사진 장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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