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으로 죽음을 이긴, 이순신과 호남 사람

1597년,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은 명량(울돌목, 해남 화원반도와 진도 사이 해협)에서 13척의 배로 330척에 달하는 왜군을 격퇴했다.

1592년 음력 8월 14일, 이순신 장군은 한산도에서 왜군을 크게 섬멸했다. 그가 사용한 전법은 학익진(鶴翼陣)이었다. 조선군 6척이 일단 왜군에게 거짓으로 패하고 달아났다. 왜군은 일렬로 늘어서, 도망치는 조선의 전함을 전속력으로 추격했다. 쫓는 왜군이 한산도 앞바다에 이르자 조선 함대는 적을 향해 갑자기 돌아섰다. 섬의 후 미에 몸을 숨기고 있던 조선의 전함들이 일제히 튀어나오고, 신속하게 완만한 V자 대형을 이뤘다. 학이 날개를 편 모양의 전법이었다. 조선 전함들은 왜군에게 무차별적으로 함포 사격을 가했다. 

완벽한 승리였다. 한산도해전에서 왜의 수군은 불과 2시간 만에 궤멸됐다. 47척의 배가 불타거나 격침됐고, 왜군 3,000명이 바다에 묻혔다. 조선 수군은 거의 피해가 없었다. 전사자는 19명이 전부였고, 부상자는 114명이었다. 전선은 긁힌 자국들만 남 았을 뿐 단 한 척의 피해도 없었다. 

이순신 동상

‘한산도대첩’은 전황의 물꼬를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돌렸다. 임진왜란이 시작되고 왜군은 육지에서 거칠 것이 없었다. 연전연승이었다. 그러나 바다에서의 싸움은 많이 달랐다. 이순신은 바다에서 완벽하게 이겼다. 서해안을 돌아 서울로 올라 가려던 왜 수군의 전략은 제해권을 잃으면서 좌절됐다. 

호남은 온전한 형태로 남아 7년 전쟁의 심장이 되었다. 호남이 홀로 살아 팔도에 군량을 댔고, 군사를 수혈했다. 호남이 없으면 국가도 없는 형국이었다. 한산도해전의 대패 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왜 수군에게 이순신과의 전투를 전면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다. 우회할 바닷길을 잃은 왜적은 경상도 해안에 틀어박혔다. 이순신은 한산도로 진을 옮겨 왜적의 숨통을 옥죄어 들어갔다. 나라의 심장인 호남은 오래 건재했다. 

 

호남이 없으면 국가도 없다!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을 미리 예견했을까? 알 수 없지만 추측은 가능하다. 전라좌수사가 되고 1년 동안 그는 해안 방비에 주력했다. 조선의 주력 전함인 판옥선을 새로 만들고, 포를 손질하고, 해자를 파고, 군사를 훈련시켰다. 특히 임진년 4월 12일,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겨우 하루 전에야 거북선을 완성했다. 전쟁을 대비한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그 때 이순신의 나이, 마흔 여덟이었다. 

7년 임진왜란 동안 이순신 장군이 신념처럼 품고 있었던 전법은 어쩌면 단 하나였다.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다. 호남이 없으면 나라 또한 없었다. 달리 말해 호남을 끝내 지키는 것이 전쟁에서 승리하는 이순신의 유일한 비책이었다. 이순신은 임진왜란 때 23번 싸워 모두 이겼다. 그 모든 싸움에는 항상 호남 사람들이 이순신 장군의 곁을 지켰다. 

이순신은 임진왜란 때 23번 싸워 모두 이겼다. 이 모든 싸움에는 항상 호남 사람들이 장군의 곁을 지켰다.
이순신은 임진왜란 때 23번 싸워 모두 이겼다. 이 모든 싸움에는 항상 호남 사람들이 장군의 곁을 지켰다.

부산포해전을 진두지휘한 79세의 늙은 장수 정걸은 고흥 사람이었다. 조선 수군의 강한 위력은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다. 주력전함인 판옥선을 만들었고, 환전·철익 전·대총통 등 강력한 무기가 정걸의 손을 거쳐 만들어졌다. 나주 사람 나대용이 거북선을 만들었고, 이순신이 가장 아끼는 장수였던 녹도만호 정운은 부산포해전의 선 에 섰다가 적의 총탄에 죽었다. 그는 영광 사람이었다. 이순신의 핵심 참모였던 송대립, 송희립, 송정립 삼형제도 고흥 사람들이었다. 조선 수군의 군량 등 살림을 도맡았던 종사관 정경달은 장흥 사람이었다. 그 무엇보다 이순신 부대의 수군 장졸과 노꾼 대부분이 호남 사람들이었다. 

 

한줄기 외로운 일자진으로 왜적을 맞은 ‘명량’ 

정유년(1597년) 4월 1일, 이순신은 옥문을 나왔다. 그해 3월 4일 의금부에 투옥 됐으니 거의 한 달 동안 고초를 겪은 셈이다. 그는 겨우 살아 길을 나섰다. 백의종군의 몸으로 그가 향한 곳은 ‘명량’이었다. 우둔한 임금은 그를 끊임없이 의심했고, 이순신이 가진 군대의 강성함이 두려워 자주 밤잠을 설쳤다. 그것이 그가 의금부에 투옥된 이유의 전부였다.

이순신은 더 이상 지킬 것이 없었다. 투옥된 그 짧은 시간 동안 이순신은 모든 것을 잃었다. 국가로 상징되는 임금의 마음을 잃었고, 자신의 바다와 군사도 잃었다. 전선을 잃고, 어머니를 잃었다. 다 잃고 더 이상 지킬 것이 없었다. 그러나 끝끝내 호남은 지켜야 했다. 전쟁이 시작되고 언제나 굳건했던 호남이 위급한 상황이었다. 칠천량 해전의 참패로 전라도의 바다가 뚫리면서 진주와 남원, 전주가 차례로 무너졌다. 왜군이 울돌목의 바다를 건너면 전쟁은 왜군의 승리로 끝날 것이 자명했다. 죽음이 뻔히 보이는 명량에서 이순신이 극진하게 지켜낸 것은 호남이었고, ‘호남’으로 상징되는 ‘백성’이었다. 

진도군은 울돌목에서 매년 가을, 당시 승리를 재현하는 축제를 열고 있다.

정유년 9월 16일, 이순신은 13척의 배를 이끌고 명량에서 왜군의 주력 전함 안 택선 133척과 맞섰다. 군세의 차이가 너무 극명해 싸움의 성립조차 쉽지 않아 보이는 그 전투에서도 이순신은 거짓말처럼 이겼다. 명량해전 전날 이순신은 병사들에게 말했다. “병법에 이르기를, 죽으려 하면 반드시 살고 살려 하면 죽는다고 하였다. 한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능히 당해 낼 수 있다 하였는데, 오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 너희들은 추호도 살려는 생각을 품지 말아라.” 울돌목의 거센 물살 위에서 이순신은 한줄기 외로운 일자진으로 왜적을 맞았다. 살고자 하지 않음으로써 기어이 죽음을 돌파하고자 했다. 

판옥선

적선 31척이 완파됐고, 91척이 파손됐다. 적 8,000명이 그 바다에 수장됐다. 명량해전의 참패로 서해안을 돌아 서울로 올라가려던 일본 수군의 전략은 좌절됐다. 조선은 잃었던 제해권을 다시 찾을 수 있었다. 이듬해인 무술년 11월, 이순신도 자신의 전선 위에서 죽었다. 그가 노량에서 죽던 날, 길었던 7년 임진왜란도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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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한경숙  사진 장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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