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와 함께 한 227일간의 표류기 '라이프 오브 파이'

대략 50여 년 전, 시골어르신이 서울에 다녀왔다. 마을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어르신은 약간 거만한 자세로 서울 이야기를 들려줬다. 하늘 높이 치솟은 빌딩, 저절로 문이 열렸다 닫히는 엘리베이터, 없는 게 없는 백화점, 늘 맑은 물이 차 있는 화장실 등등. 마을 사람들은 감탄했다. 

어르신은 비장의 무기를 꺼내듯, 마지막으로 땅 속을 다니는 기차에 대해 이야기했다. 마을 사람들의 표정이 좋지 않게 변했다. 믿을 수 없다는 눈치였다. 면 소재지 말고는 바깥나들이를 한 번도 한 적이 없는 최고령의 할아버지가 버럭 화를 냈다. 

“듣자듣자 하니 사람을 뭘로 보고 그런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여? 우리가 아무리 촌사람이라고 무시하면 못써… 말 같은 소리를 해야지 원~” 할아버지가 혀를 끌끌 차며 자리를 뜨자, 몰려들었던 마을 사람들도 하나둘씩 일어났다. 

<라이프 오브 파이> 영화 포스터

긴 여행에서 돌아온 자의 경험담은 늘 ‘거짓말’ 시비가 붙는다. 이곳의 사람들이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저곳의 이야기다 보니 이해하기가 어려울 수밖에. 서울 다녀온 어르신의 ‘굴욕’은 결코 과장된 에피소드가 아니다. 관련하여 역사 속에서 가장 유명한 인사는 마르코폴로일 것이다. 

그가 ‘동방’을 여행하고 돌아와 한 이야기를 믿는 베네치아 사람은 없었다. 말끝마다 수백만, 수천만을 읊어대는 마르코폴로를 ‘백만선생’이라고 조롱했다. 죽기 직전, 친구들은 그에게 그동안의 거짓 허풍들에 대해 참회하라고 권했다. 마르코폴로가 답했다. “나는 아직 내가 본 것의 절반도 이야기하지 못했다.”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의 주인공 ‘파이’ 또한 시골어르신이나 마르코폴로와 같은 처지다. 인도에서 캐나다로 가는 대형 여객선이 폭풍을 맞아 침몰했다. 사람 중에는 주인공 파이(Pi)만이 구명정을 붙들어 살아남았다. 여객선에 실려 있던 몇몇 짐승들도 구명정에 올랐으나, 함께 오른 호랑이가 다 잡아 먹어버렸다. 

근래에 나온 BBC다큐멘터리를 보면 파이의 거짓말같은 체험담의 구할이 사실이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이제 구명정에는 파이와 호랑이 둘만 남았다. 사람과 호랑이가 싸우고 화해하면서 망망대해를 떠돈다. 떠돌면서 생사를 넘나드는 경험을 한다. 영화는 이 경험의 이미지들을 화면 가득 채워 보여준다. 여름 더위를 충분히 물리칠 만큼 놀랍고 흥미롭고 매혹적이다. 동시에 황당하다. 

파이의 표류 경험은 증거가 없다. 보상을 위해 조사 나온 보험회사 직원들은 파이의 말을 믿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파이는 짐승들을 사람으로 바꿔 재구성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러면 믿겠느냐?”고. 황당하지만 매혹적인 이야기, 그럴 듯하면서 팍팍한 이야기, 두 버전의 표류기가 등장한 셈이다. 

책을 내기 위해 인터뷰를 하는 작가 또한 ‘호랑이 버전’의 이야기를 믿지 않는 눈치다. 파이는 작가에게 질문한다. “두 이야기 중 어느 이야기에 더 끌리나요?” 잠시 생각에 잠긴 작가가 답한다. “그야…… 호랑이 버전이죠.” 

시골어르신과 마르코폴로와 파이에게는 두 가지 공통점이 있다. 하나는 여행을 다녀왔다는 것, 나머지 하나는 자신의 여행경험을 세상 사람들이 믿지 않는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다지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그들의 이야기는 모두 사실로 밝혀졌다. 파이의 이야기까지 진실이라고? 그렇다. 근래에 나온 BBC다큐멘터리를 보면 파이 이야기의 구할이 사실이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라이프 오브 파이>는 호랑이와 함께 한 227일간의 표류기를 담고 있다.

어딘가로 공간이동을 해야만 여행인 것은 아니다. 마을 뒷동산이라도 유별난 경험을 할 수 있다면 거기가 훌륭한 여행지이다. 거짓말로 오해할 만큼 놀랍고 매혹적인 경험, 거기에 여행의 이유가 있다. 

여행자의 ‘거짓말’을 받아들이자니 자존심이 상한다. 튕겨내자니 들은 이야기가 너무나 아깝다. 그래서 말하는 자와 듣는 자가 서로 타협해 문장 하나를 만들어냈다. “긴 여행에서 돌아온 자는 거짓말할 자격이 있다.” 

진실에 기초한 거짓말, 혹은 거짓말을 통해 진실에 접근하는 것이 픽션이나 소설의 기능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진실을 드러내는 수단으로 작동시키는 한 거짓말은 죄가 아니다. 

<라이프 오브 파이>는 거짓말과 거짓말할 자격에 관한 영화이다. 마침표를 찍지 않는 수학기호 파이 (π)처럼 무한대로 열려있는 상상력, 아주 매혹적인 거짓말, 다만 어느 때인가는 진실로 확인될, 그런 이야기들에 관한 영화이다. 학교와 집을 벗어나 ‘여행’의 경험을 제공하는 것이 방학이 존재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방학이 끝나고 난 첫 날 교실의 풍경이 멋진 여행에서 돌아온 학생들의 ‘거짓말들’로 가득하면 좋겠다.

글 이정우 

라이프 오브 파이 ㅣ Life of Pi (2012) 
● 장르_어드벤처, 드라마  ● 상영시간_ 126분 감독_이안  ● 출연_수라즈 샤르마, 이르판 칸  ● 등급_전체관람가 
전 세계 40여 개국 700만 부 이상이 팔리는 스테디셀러, 얀 마텔의 <파이 이야기>를 원작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태평양 한가운데, 호랑이와 함께 좁은 구명보트로 표류하게 된 소년이 겪은 227일간의 여정이 담겼다. 소설의 상상력을 수준높 은 CG와 3D 기술력으로 구현해, 2013년 아카데미 시상식 최다부문에서 수상(감독상, 촬영상, 시각효과상, 음악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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