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바다를 사랑한 한국 대표 화백 김환기

가느다란 푸른 점들이 별의 행로처럼 둥글게 궤도를 그리며 점점이 박힌다. 미세 한 푸른 점들은 흰 선을 이루며 확장을 거듭한다. 점 하나는 먼지이고 바람이고 나무이고 사람이며, 또한 별이다. 수많은 점과 점이 무한대로 확장되며 선을 이루고 결국 ‘우주’에 닿는다. 김환기 화백의 작품 ‘우주’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사람이 사는 공간은 끝없이 확장되고, 삶은 아득해진다. 

김환기, Universe 5-IV-71 #200, 1971, 코튼에 유채, 254x254cm ⓒ(재)환기재단·환기미술관

점이 그린 흰색 원들은 파장을 거듭해 결국 김환기 화백이 가고자 하는 곳에 안착한다. 미국 뉴욕에서 ‘우주’를 그리며, 그가 닿고자 했던 그곳은 안좌도의 푸른 바다였을 것이다. 그에게 우주는 모든 생을 통해 늘 갈망했던 안좌도의 바다와 이음동의어였다. 가느다란 서예용 붓으로 무수한 푸른 점을 찍어 만든 작품 ‘우주’는 시공을 넘어 안좌도의 푸른 바다에 닿은 후, 다시 행로를 바꿔 아주 천천히 우리에게로 왔다. 

지난해 11월 23일 크리스티 홍콩 경매에서 김환기 화백의 작품 ‘우주’는 8,800만 홍콩달러, 우리 돈으로 131억 8,750만원에 낙찰됐다. 한국 미술품이 낙찰가를 기준으로 100억 원이 넘는 금액에 경매된 것은 ‘우주’가 처음이었다. ‘우주’는 김환기 화백의 작품 중 가장 큰 추상화이고, 유일하게 두 폭으로 구성된 작품이다. 


푸른빛, 고향 안좌도를 향한 갈망의 색 

 

김환기 화백의 그림에 푸른빛은 고향 안좌도를 향한 갈망의 색이었다.

한국 미술은 김환기 화백을 빼놓고 논의될 수 없다. 지금까지 가장 비싸게 경매된 한국 미술 작품 10점 중 9점이 김환기(1913~1974) 화백의 작품이다. 그는 신안의 작은 섬 안좌도에서 태어나 유년기를 보냈고, 그곳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안좌도에서 끝도 없이 펼쳐진 바다를 보며 김환기 화백은 그림의 세계를 꿈꿨고, 그의 그림 속에는 안좌도의 바다가 늘 들어앉아 있었다. 김환기 화백의 그림에 푸른색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푸른빛은 고향 안좌도를 향한 갈망의 색이었다. 

지금은 누구라도 언제고 마음이 동하면 김환기 화백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신안에 천사대교가 놓여 아주 쉽게 안좌도에 들어갈 수 있다. 안좌도에는 국가민속문화재 제251호로 지정된 ‘김환기 생가’가 있다. 원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김환기의 생가는 현재 신안교육지원청 소유다. 김환기 화백은 1913년 그 생가에서 3남5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신안의 작은 섬이었지만 아버지의 재력은 상당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생가를 지을 때 백두산에서 소나무를 직접 운송해 지었을 정도였다. 

김환기 화백 생가

집안의 기대를 온몸에 받았던 어린 김환기는 1927년 안좌도를 떠나 서울 중동중학교에 입학했고, 1931년 일본으로 자비 유학을 떠났다. 그리고 스무 살이던 1933년 니혼대학교 예술학원에 입학해 체계적으로 미술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고향을 떠났지만 안좌도의 바다는 그와 한 몸으로 연결돼 있었다. 서울과 일본 유학 시절 간혹 고향에 오면 그는 하염없이 안좌도의 푸른 바다를 서성였고, 그 과정에서 얻은 이미지들을 그림으로 옮겼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 

1957년 9월의 일이다. 프랑스 니스방송국에 출연한 김환기 화백은 근원과 마주 하는 질문을 받았다. “가장 그리워하는 한국적인 풍경이 무엇이냐?”는 것이었다. 그는 매우 짧게 답했다. “고향 안좌도의 지독히 푸른 하늘과 바다.” 더 이상 부연설명도 하지 않았다. 김환기 화백이 평생을 그린 예술 세계 역시 그 답변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다. 

그는 고향의 푸른 하늘과 바다를 ‘가장 한국적인 것’으로 연장해 나간다. 세상은 어떤 형태로든 모두 통하게 되어 있고,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는 게 김환기 화백의 지론이었다. 김환기 화백은 말했다. “나는 동양 사람이고 한국 사람이다. 내가 아무리 비약하고 변모한다 해도 내 이상의 것은 할 수 없다. 내 그림은 동양 사람의 그림이요, 한국 사람의 그림일 수밖에 없다”고. 

프랑스 파리 생루이(섬) 아뜰리에에서의 김환기, 1957 ⓒ(재)환기재단·환기미술관

김환기 화백은 초기 달항아리에 천착했다. 1935년 그의 이름을 세상에 처음 알린 그림 ‘종달새 노래할 때’는 한복을 입은 여인이 달항아리를 머리에 이고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걸어오는 모습을 담고 있다. 그에게 달항아리는 가장 한국적인 것이었고, 고향과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의 상징이었다. 

달항아리에서 벗어난 후 그가 주로 그린 것은 ‘달’이었다. 표현방식도 달라졌다. 구상화법을 버리고, 달의 둥근 이미지만을 여러 방식으로 변주하며, 삶의 근원과 원형을 찾는 추상화법으로 변모했다. 1970년대 뉴욕에 거주하던 김환기 화백은 매일 밤하늘을 바라보며 별을 하나하나 헤아렸다. 그의 그림에서 별은 하나의 점으로 표현됐고, 붓으로 무수히 점을 찍어 이미지를 만들어 나갔다. 점이 우주였다.

김환기 화백은 자신이 화폭에 그렸던 무수한 점들 속으로 걸어 들어갔고, 먼지는 먼지대로 재는 재대로 남겨둔 채 스스로 소멸했다. 머나먼 타국 땅 뉴욕에서 그가 마지막 남긴 메모는 이러했다. “꿈은 무한하고 세월은 모자라고.” 

한경숙  사진 환기미술관·신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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