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가 쌓인 골짜기, 지리산 피아골

지리산 반야봉 중턱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구례군 토지면 외곡 삼거리에 이르러 섬진강 본류와 만난다. 대략 20km에 달하는 계곡, 피아골이다. 그 중간 직전마을까지 자동차 길이 닦여 있다.

이야기가 많은 골짜기이다. 가장 널리 알려지기로는 지리산 10경 중 하나로 꼽히는 단풍이 있다. 가을이 되면 산과 물, 사람까지 붉어진다 하여 ‘피아골 삼홍(三紅)’이라 한다. “피아골 단풍을 보지 않고는 단풍을 보았다 하지 말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계곡의 물줄기는 한 여름에도 얼음장처럼 차가워 몸을 오래 담그지 못한다. 큰 바위와 웅덩이, 폭포가 반복되는 계곡의 풍경은 저절로 감탄을 자아낸다. 여름에는 더위를 피하려는 사람들로, 가을에는 단풍구경 나온 이들로 골짜기가 가득 찬다.

 

하늘을 향한 촘촘한 계단, 다랑이논

다랑치논의 흔적. 계곡 입구에서 해발 650m의 농평마을에 이르기까지 비탈진 산자락에 논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풍광만 빼어난 게 아니다. 역사, 문화, 사람살이의 흔적도 계곡만큼이나 깊고 풍부하다. 걷든지 차량으로 이동하든지 끊임없이 눈으로 꽂히는 이미지는 ‘다랑치논(다랑이논의 전남 사투리. 이 글에서는 사투리를 살려 그대로 싣기로 함)’ 이다. 좌우가 모두 가파른 산이다. 그 산자락에 돌담을 쌓은 다음 흙을 부어 논을 만들었다.

지도의 등고선 마냥 논둑이 가로로 흐른다. 산을 오르는 촘촘한 계단처럼도 보인다. 가장 많은 계단은 130개에 달한다. 계곡 입구에서 해발 650m의 농평마을에 이르기까지 빈 땅 하나 없이 논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인근의 산동면 심원마을(해발 750m)을 ‘하늘 아래 첫 동네’라고 한다. 높이로만 따지면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마을의 완성도까지 고려한다면 농평을 ‘하늘 아래 첫 동네’라 해도 어색하지 않다. 심원에는 없었던 교회와 학교가 한 때나마 농평에는 있었고, 그 높은 산자락에서 논농사까지 지었던 것이다. 토지초등학교 농평분교는 1970년 개교해 2000년 3월 1일 문을 닫았다. 학교터에는 개인 별장이 들어서 있다. 여느 초등학교에서 볼 수 있는 통상적인 크기의 1/3 정도 규모로, ‘책 읽는 소녀상’과  ‘이승복 어린이상’이 고대의 유물처럼 남아 있다. 반갑고 예쁘다.

다랑치논을 만들려면 얼마나 많은 품을 들여야 했을까. 송기숙 교수의 ‘계산(<녹두장군> 제5권 ‘공중배미’편에서)’에 따르면, 한 달 보름(45일) 동안 돌과 흙을 천 번이 넘게 져 날라야 다섯 평짜리 논바닥 하나를 만들 수 있다. 다랑치논 치고는 ‘넓은’ 30평짜리 하나를 만들려면 아버지와 아들 두 사람이 일을 했대도 2년은 실히 걸린다. 겨울 한 철을 제외하고 날마다 일했을 때 그렇다는 것이다.

오늘날 피아골 다랑치논은 본래의 기능을 잃은 지 오래다. 녹차나무, 밤나무 등 경제수들이 심어져 있거나, 상업용 펜션 혹은 도회지 사람들의 별장이 논을 점령하고 있다. 물을 대어 모를 심은 논을 찾을 수 없다. 하지만 흔적은 분명하다. 그 흔적만으로도 논들은 충분히 경이롭다. 민중들의 집체예술인냥 웅장하고 아름답다.

 

겸양의 미를 말해주는 연곡사 세 승탑

연곡사로 향한다. 승탑(통상 ‘부도’)을 만나기 위해서다. 탑은 부처님의 거처다. 승탑은 큰 발자취를 남긴 스님들의 무덤이다. 탑이 절의 중심부에 자리한 반면, 승탑은 절의 옆이나 뒤에 앉혀져 있다. 부처님과 자리를 다투지 않는 겸양의 공간 배치이다. 하여 승탑을 만나는 길은 대체로 호젓한 오솔길이다. 걷는 즐거움이 쏠쏠하다.

승탑은 가장 작은 탑보다도 더 작다. 크기에도 겸양이 반영되어 있는 셈이다. 다만 승탑은 조각 기술에서 특별하다(통일신라시대 만들어진 승탑이 그러하다. 고려대부터는 소박한 양상으로 변한다). 특히 연곡사 동승탑(국보 53호)의 비례미와 정교함은 최고로 꼽혀 ‘승탑의 꽃’이라 불린다.

왼쪽부터 소요대사탑, 북승탑, 동승탑. 세 탑을 통해 정교함의 미학을 비교할 수 있다. 동승탑의 비례미와 정교함은 최고로 꼽힌다.
왼쪽부터 소요대사탑, 북승탑, 동승탑. 세 탑을 통해 정교함의 미학을 비교할 수 있다. 동승탑의 비례미와 정교함은 최고로 꼽힌다.

탑을 비롯해 우리나라의 돌조각상들을 보고 서양인들은 비웃었다. 자신들의 조각이 훨씬 빼어나다는 것이다. 우리 돌을 만져 보고서는 서양인들이 손을 들었다. 서양 조각 대다수는 석회암 재료다. 연필칼로도 깎을 수 있다. 우리 돌은 화강암이다. 끌과 망치가 아니면 손을 댈 수 없는데다 결이 규칙적이지 않아 모양을 내는 데 훨씬 까다롭다. 그 어려운 일을 세계 최고 수준으로 해낸 조각이 연곡사 동승탑이다. 온전히 사람의 근육만으로 이토록 정교한 선들을 새길 수 있다니, 보면서도 믿기지 않는다.

북승탑(국보 54호)도 동승탑과 견줄 만큼 정교하다. 두 탑은 무덤의 주인을 알 수가 없어 동과 북 좌향으로만 이름이 지어졌다. 서쪽에 있는 승탑은 주인의 이름을 따  ‘소요대사’탑(보물 154호)이다. 소요대사탑은 정교함에서 앞의 두 탑에 한참 뒤처진다. 역설적으로 이 뒤처짐에 존재감을 드러낸다. 연곡사의 동·북·서 세 승탑은 정교함 등 그 미학을 비교하면서 관찰할 수 있는 흥미로움이 있다. 

 

구례 사람들이 지킨 의병장 이야기

소요대사탑 아래쪽으로 걸으면 ‘의병장 고광순 순절비’를 만날 수 있다. 담양군 창평에 살던 선비 고광순은 나라가 망국의 조짐을 보이자 항일의병 길에 나섰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 후에는 ‘호남의병장’이 되어 남원·광주·화순·순천 등지에서 일본 정규군에 맞서 싸웠다. 형세가 불리해지자 연곡사에 들어와 유격전을 폈다. 1907년 늦가을 일본군에 포위되어 집중포화를 받고 순국하였다.

의병장 고광순 순절비. 일제가 물러나고 전쟁이 끝난 후에야 구례의 필부필녀들이 십시일반으로 자금을 마련해 소박한 비석 하나를 세웠다.

의병의 시신을 수습하는 것만으로도 죄가 되던 시절이었다. 죽을 각오를 하고 고향 창평으로 의병장의 시신을 옮기도록 조치한 이는 매천 황현이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밖에 없었다. 

일제가 물러나고 전쟁이 끝난 후에야 의병장의 죽음을 겨우 추모할 수 있었다. 관의 지원을 얻기 어려운 시절이었다. 1958년, 구례의 필부필녀들이 십시일반으로 자금을 마련해 의병장이 순절한 장소에 소박한 비석 하나를 세웠다. 그래서 특별하다. 의병장 순국 100주년이 되는 2007년에 구례군이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단장했다.

피아골 계곡의 물줄기는 한 여름에도 얼음장처럼 차가워 몸을 오래 담그지 못한다. 발원지는 지리산 반야봉 중턱이다.

피아골을 찾으면 높은 산, 깊은 계곡, 짙은 숲에 압도된다. 그 높이와 깊이, 그늘의 농도만큼 아름답고 짠하고 슬픈 사연을 간직한 곳이 피아골 계곡이다. 시원한 물줄기와 붉게 타는 가을단풍은 자연의 선물일 것이다. 다랑치논과 연곡사 부도, 의병장 고광순의 이야기는 인간의 깊이를 생각해볼 수 있는 역사문화적 자산이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지키면서도 자연과 인문을 온몸으로 체험할 수 있는 곳, 올여름 마실돌기로 피아골 일대를 추천한다.
 

이정우  사진 마동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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