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의 현대사를 품은 벌교 부용산

자그마한 산이다. 보성군 벌교읍 부용산은 우리 산하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산이다. 그 숲에 한국 현대사의 그늘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숲길을 오르다 부용산 시비(詩碑)를 만난다. 그늘진 그 역사로 접속하는 지점이다.

부용산 산허리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솔밭 사이 사이로 회오리바람 타고
간다는 말 한 마디 없이 너만 가고 말았구나 
피어나지 못한 채 붉은 장미는 시들었구나 
부용산 산허리에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부용산’은 박기동(1917~2005) 시인의 작품이다. 1947년 국어교사 박기동은 요절한 여동생을 부용산 자락에 묻고 내려와 이 시를 썼다. 이듬해 그는 목포 항도여중(지금의 목포여고)으로 옮겨갔다. 수필가 조희관 교장은 재능 있는 교사들을 초빙해 항도여중을 문화예술이 넘치는 교정으로 가꿨다. 광주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던 천재작곡가 안성현(1920~2006)도 항도여중으로 왔다.

(좌) 부용산을 쓴 천재작곡가 안성현 (우) 목포 항도여중 문예반. 맨 왼쪽 박기동 시인, 그 옆 조희 관 교장 (출처 : 논문 ‘목포 항도여중 문예지 ‘새싹’과 조희관 의 향기’- 이동순, <근대서지> 2015. 6월호)

안성현은 박기동의 시 ‘부용산’에 곡을 붙였다. 두 사람 모두 폐결핵으로 여동생을 잃었다. 그 아픔들이 고스란히 노랫말과 선율에 스몄다. 1948년 봄, 항도여중 학생들의 목소리에 실려 노래 ‘부용산’이 세상에 소개됐다. 치료약이 변변치 않던 그 시절엔 죽음도 흔했다. 항도여중의 천재 문학소녀 김정희도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친구의 죽음을 애통해하며 학생들이 부른 ‘부용산’은 강렬했다. 목포를 넘어 전남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역사의 격랑에 휘말린 비가(悲歌)

요절한 소녀들의 추모곡이 격랑에 휘말렸다. 1948년 가을, 이 땅에는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지 두 달만에 북쪽에도 단독정부가 들어섰다. 남북 분단을 반대하는 사람들, 자기가 속한 체제에 다른 전망을 가진 사람들로 신생국가는 휘청거렸다. 남한은 신제품 정부였으나 아직 완제품이 아니었다. 불안한 유동성의 시대였다.

첫 충돌이 정부 수립 전인 1948년 4월 3일 제주에서 시작됐다. 4·3사건이었다. 두 번째 충돌이 바로 1948년 10월 19일 전남 여수에서 벌어졌다. 여수 제14연대 군인들이 제주 국민들을 죽이는 데 동원될 수 없다며 봉기를 일으켰다. 이들은 분단 반대를 외쳤다. 2년 뒤 1950년의 6·25는 북한의 남침 사건인 동시에, 그간의 갈등이 위태롭게 쌓이다가 결국 한반도 전체에서 화산처럼 폭발한 전면전이었다.

부용산에서 본 벌교천. 벌교천은 읍내를 지나 남해 바다로 합쳐진다

제주4·3부터 여수·순천 사건, 6·25로 이어지는 그 통한의 시대, 많은 젊은이들이 산으로 쫓겨 들어갔다. 그 시절 ‘충돌’이 벌어졌다고 표현했지만 사실상 그들은 일방적인 수세에 몰렸다. 정부군의 화력이 집중된 남한 땅에서 소수의 게릴라들이 저항하기는 쉽지 않았다. 산으로 간 젊은이들은 ‘빨치산’ 이라고 불렸고 ‘산사람’으로 에둘러 불리기도 했다. 그들은 지리산, 광양 백운산, 화순 백아산 등을 전장으로 삼아 전투, 혹은 생존투쟁을 벌였다.

산속 젊은이들이 ‘부용산’을 불렀다. 인간답고 정의로운 나라를 꿈꾸며 나섰으나 문득 사상이니 체제니 하는 말들이 부질없게 느껴졌으리라. 산 아래 고향집 가족의 안부가 궁금했으리라. ‘부용산’의 구슬픈 선율과 가사는 묵직한 위로가 됐다. 노래 속 부용산은 여순사건 작전구역 내 에 실재하는 벌교의 부용산이자 고향집 뒷산이었고, 숨어든 산자락에서 마주한 눈앞의 봉우리였을 것이다.

신생국가 남한은 산사람들을 국민이 아닌 적으로 간주했다. 진압이나 해산 차원을 넘어 ‘토벌’의 대상으로 삼았다. 토벌은 벌레나 해충을 잡듯이 아예 없애고 박멸한다는 뜻이다. 한국전쟁기, 남한의 빨치산들은 인간으로 대접받지 못했다. 소수가 생포되고 다수가 스러져가 산자락의 흙이 됐다.

반공의 성벽에 깔린 노래, 그리고 창작자

총칼을 앞세운 전쟁은 끝났지만 음지의 사상전쟁은 계속 됐다. 남한정부는 국가보안법을 앞세워 강력한 반공사회를 만들어갔다. 빨치산들의 애창곡 ‘부용산’도 수난을 당했다. 노래 자체를 탄압할 수 없으니 대신 창작자들을 가만 두지 않았 다. 시인 박기동은 공안당국의 감시와 탄압에 떠밀려 1961년 교직을 떠났다. 임시직을 전전하면서도 틈틈이 시를 썼다. 형사들은 불시에 집에 쳐들어와 시들을 압수해가 버렸다. 가족들도 고초를 겪었다.

2000년 ‘밝아진 세상’에 부용산 중턱에 부용산 시비가 세워졌다.

견디다 못한 그는 70대에 홀로 호주로 떠났다. 혼자 작은 임대아파트에 살던 그는 86세가 되어서야 한국으로 돌아왔다. 사람들이 ‘부용산’을 발굴해 부르며 시인의 행방을 찾았다. 안치환 등 유명가수들이 노래를 리메이크해 불렀다. ‘밝아진 세상’에 얼떨떨한 그는 벌교 부용산에 시비가 세워지는 것을 보고 2005년 눈을 감았다. ‘부용산’에 2절을 지어 보탰으나 시집을 내고 싶다던 평생의 소망은 이루지 못했다.

작곡가 안성현은 어떻게 됐을까. 그는 1950년 9월 음악회 일로 평양에 간다며 길을 떠났다. 당시는 전쟁 중이었지만 남북한 왕래가 아직 자유로웠고 평양은 문화예술의 도시로 유명했다. 그가 떠난 직후 인천상륙작전이 전개되면서 남북한 왕래가 차단됐다. 광주에 홀어머니와 아내, 갓난 딸과 아들을 둔 안성현은 결국 돌아오지 못했다. 2006년 4월, 북한의 신문에 ‘민족음악가 안성현 선생이 87세로 타계했다’는 부고기사가 실렸다.

부용산 입구 월곡마을은 영화벽화마을로 단장돼있다.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이 영화로 만들어진 이후의 흐름이다.

아름다운 노래 한 곡에 분단과 전쟁의 흔적이 강렬하다. 부용산이 있는 벌교는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의 무대다. <태백산맥>은 바로 그 시기의 상처들을 생생히 다뤘다. 벌교읍 거리마다 <태백산맥>과 관련된 이름이 가득하다. 부용산 입구 월곡마을은 영화벽화마을로 단장돼있다. <태백산맥>이 영화로 만들어진 이후의 흐름이다. 싱그러운 부용산 숲을 내려와 알록달록한 벽화골목을 거닐며 떠올린다. 전쟁은 정말 끝났을까, 상처는 제대로 아물었을까. 그래서 우리는 진정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할 수 있을까.

부용산 아래 홍교. 이 다리가 시대의 맺힌 원들을 풀고 상생으로 가는 다리가 되길.

벌교는 뗏목다리라는 뜻이다. 벌교천은 읍내를 지나 남해 바다로 합쳐진다. 돌다리 홍교는 뗏목다리를 대신해 이편과 저편을 튼튼하게 이어주고 있다. 부용산 아래 그 홍교가, 시대의 맺힌 원들을 풀고 상생으로 가는 다리가 되길 빌어본다.  

글 이혜영 사진 최성욱

이 글은 이혜영의 책 <한국 민중항쟁 답사기_ 광주전남 편>의 내용을 재구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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