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한말의병-항일운동
민족운동 위에 핀 꽃, 나주학생독립운동

면면히 이어온 나주 의병

까마득한 옛날, 우리 조상들이 삭막한 중앙아시아 대륙에서 해가 뜨는 동방을 향해 차츰차츰 이동해오다가, 남쪽 바다로 예쁘게 뻗어 나온 반도를 타고 내려와 자리를 잡은 다음, 짐승을 잡고 열매를 따먹으며 삶을 유지해 오다가, 황무지를 일궈 농사를 짓기 시작한 지 수천 년, 그 동안에 겪었던 슬픔과 기쁨의 나날이야 천일의 밤을 새우며 이야기해도 다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는 동안 주변 민족들의 끊임없는 침략이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5백 년 전인 1592년, 섬나라 왜구들이 쳐들어와 삼천리강산을 쑥밭으로 만들었던 임진왜란은 역사상 유례가 없었던 참혹한 재난이었다.

나주역

그런 못된 짓을 저질렀던 왜구들은 20세기가 되자, 어느 사이에 서구문명을 받아들여 사나운 제국주의국가로 변모하더니, 또 다시 바다를 건너와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나라를 지키는 진위대를 해산시킨 다음, 36년 동안 이 땅을 식민지로 만들어 지배하였는데, 그 동안에 겪었던 치욕과 고통은 형용할 수 없이 가혹한 것이었다.

두 차례에 걸친 그들의 침략이 있을 때마다 우리의 조상들은 가족과 나라를 지키려고 목숨을 내던지고 싸웠다. 나주의 흑룡동에서 살고 있던 김천일 장군도 벼슬을 떠나 흑룡동의 고향에 머물러 있다가 왜구가 부산진에 상륙하여 서울을 향해 올라가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담양의 고경명과 화순의 최경회 등에게 통문을 보낸 다음 뜻이 높은 나주의 의사 양산숙, 양산룡, 임환, 서정후 등과 300명의 의병부대를 편성하여 나주를 출발 북쪽으로 올라가 수원을 점령하였다. 강화도로 건너가 서해바다를 통해 평안도 의주로 몽진해 있는 선조와 연결하면서, 행주산성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권율장군을 도와 적들을 물리치게 하였고,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서울로 들어오는 길을 이끌어 주었다.

나주청소년수련관과 소녀상

그러다가 남쪽으로 이동하는 왜군들의 뒤를 쫓아 진주성으로 들어가 3만의 군사로써 10만의 적을 맞아 혈전을 계속하다가 방어선이 무너지면서 아들 상건과 더불어 장렬하게 순국하였는데, 장군의 혼령은 지금 나주의 정렬사에 봉안되어 있다.

그런 임란의 수난을 겪은 지 500년이 흘렀다. 우리에 앞서 서구문명을 받아들여 동양의 제국주의국가가 된 일제가 다시금 이 땅으로 건너와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등 온갖 횡포를 부리기 시작하였다. 나주의 유생들과 향리들 그리고 농민들은 장성의 기우만. 기삼연 등과 동맹을 맺고 유서 깊은 나주의 향교에 모여 전 주서 이학상을 의병장으로 추대하여 전라도 최초의 항일의병을 조직하였다. 의병들은 먼저 개화를 한답시고 일본의 앞잡이 노릇을 하고 있던 나주감영을 습격하여 참서관 안종수와 순검들을 살해하였다.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비

 

하지만 일제는 1905년 을사보호조조약을 강요하여 국권의 대부분을 빼앗은 다음 1907년 고종임금을 퇴위시키고 군대를 해산시키게 되자, 나주의 의병들은 남도전라도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들과 연대하여 격렬한 항쟁을 계속하였다. 동학혁명군 출신 김태원과 그 아우 김율, 박민수 형제, 나성화 권택, 최우평, 김율, 노병우, 조정인 등 수많은 의병장들이 남도 각지를 누비며 항일투쟁을 이어갔다.

그렇게 끈질기게 저항했건마는 역부족이었다. 끝내 한일합병이 되어버리자, 나주의 지사들은 중국과 시베리아 등지로 망명하여 독립투쟁을 전개하였고, 3.1운동이 일어나자 전기 의병의 지도자 김창균의 아들 김철 선생은 광주와 서울을 돌며 투쟁을 조직 지도하였고, 나주에서는 농민들이 각지의 장날을 이용하여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외쳤다.

 

나주학생독립운동

1920년으로 들어와 전국 각지에서 자주와 독립을 외치는 민족운동과 사회운동이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이곳 나주에서는 1929년 10월 30일 광주로 통학하고 있던 조선인학생과 일본학생들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 전국적인 민족운동으로 확대되었는데 3.1운동을 이은 가장 격렬하고 범위가 넓은 민족운동이었다.

나주의 통학생들을 싣고 광주를 출발한 열차가 오후 5시35분 나주역에 도착하여 승객들이 개찰구를 빠져 나오고 있을 때, 일본인학교인 광주중학교 재학생 후쿠다슈죠, 다나카히데노리 등이 조선인 여학생 박기옥, 이광춘 등을 얕잡아 희롱하는 것을 목격한 광주고보 박준채가 나서서 나무라자, 일인학생들이 사과는커녕 도리어 반발함으로써 시작된 충돌은 이튿날까지 계속되다가 광주로 확대되면서 전국으로 이어지고 국제적으로 파급되어 나갔다.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

이 세상 모든 일에는 우연이란 게 없다. 예쁜 꽃이 피어 열매를 맺으려면 종자를 심어 싹이 트면서 뿌리와 줄기가 생기는 과정이 있듯이, 1929년의 학생독립운동은 임진왜란과 한말의 의병투쟁 그리고 끊임없이 전개되었던 선구자들의 치열한 민족운동의 바탕 위에 핀 꽃이었다.

이처럼 숭고한 나주의 항쟁정신은 근・현대사를 관통하며 면면히 이어져 대한민국 민주주의 발전의 자양분이 되었다. 이처럼 자랑스러운 나주 의병과 학생독립운동의 역사를 기억하고 계승하는 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책무이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라는 말처럼 우리 아이들이 나주학생독립 정신을 기억하며 미래의 희망을 키워가도록 도와야 할 것이다.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에 가면 바람개비와 에코백을 만들 수 있다.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 내 학생들이 쓴 메모

글 리명한, 사진 조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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