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과 현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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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편이냐고 묻는 질문에 대하여
한국전쟁과 현대문학

 

전쟁 전에는 남한의 대학생이었다. 전쟁 중에는 북한군으로 낙동강 전선에 나갔다가 유엔군에게 잡혀 포로가 되었다. 휴전이 되고, 남과 북 양측은 서로 제 나라를 택하라고 권유했다. 주인공은 제3국을 선택했다.(<광장>, 최인훈, 1960년 발표)

식민지에서 해방된 ‘조선’은 독립국가 건설의 열망이 넘쳤다. 열망은 두 갈래로 나뉘었다. 둘의 갈등은 서로를 죽이는 전쟁으로까지 극단화했다. 어느 쪽으로도 통합되지 않았다. 휴전 이후 두 열망은 남쪽과 북쪽에 각각 자리 잡았다. 체제의 고착에 따라 개인들도 선택을 강요받았다. 선택한 이들도 있었으나 선택하지 못한 이들 또한 적지 않았다. 한쪽은 광장의 구호가 넘쳤고, 개인의 내밀한 사적 에너지를 뭉갰다. 다른 한쪽은 사적 욕망을 부추기면서 광장의 연대를 막았다. 광장의 연대와 사적 에너지의 소중함을 모두 필요로 했던 주인공은 선택하지 못했다. 제3국으로 가는 선박에 몸을 실었으나, 그곳은 조국이 아니었다.

어두운 방안으로 건장한 사내들이 들이닥쳐 전짓불(손전등)을 비추면서 ‘어느 편이냐?’고 묻는다. 대답에 따라 생사가 갈릴 수 있다. 그런데 말할 수 없다. 전짓불 간섭 때문에 그들이 누구인지 알 수가 없어서다. (<소문의 벽>, 이청준, 1971년 발표)

전쟁 중에 선택은 목숨을 건 도박과도 같다. 어느 쪽이 좋은 것인지, 옳은 것인지 알 수 없는 이들은 단지 살기 위해 선택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조차 용납하지 않았다. 선택을 강요한 이들이 ‘어느 쪽’인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청준은 질문의 폭력성을 ‘전짓불 공포’라는 문학적 장치로 극화했다. 지금이라고 해서 전짓불 공포가 사라졌을까? 여전히 휴전중인 한국사회는 편들기에 따라 불안과 안전 사이를 오고 간다.

전란의 여파로 친할머니와 외할머니가 ‘친할머니집’에 함께 살고 있다. 친삼촌은 ‘빨치산’으로 행방불명되었고, 외삼촌은 ‘국군’으로 전사했다. 친할머니와 외할머니의 갈등 때문에 손자인 나는 불편하다. 그런데 어느날…. (<장마>, 윤흥길, 1973년 발표)

수많은 청년들이 자신의 선택지를 따라 목숨을 걸고 전쟁의 한복판으로 뛰어 들었다. 남은 혈족들은 ‘연좌’의 굴레에 신음했다. 형제간의 싸움이라는 전쟁의 비극은 일상의 삶까지 비틀었고, 깊고 예리한 상처를 남겼다. 상처는 세대를 넘어서까지 이어졌다. 

<장마>의 주인공인 ‘나’는 “할머니가 좋은지 외할머니가 좋은지” 질문을 받는다. “둘 다 좋다”는 대답조차 선뜻 할 수 없는 고통스러운 시간이 흐른다.

목숨줄을 쥔 채 ‘어느 편이냐?’고 묻는 질문은, 오직 생존만을 위해 인간의 존엄을 스스로 버리는 내부 폭력을 작동시킨다. 단순한 사고로도 목숨을 잃을 수는 있다. 전쟁은 제 손으로 자신의 존엄을 약탈한다는 점에서 가장 극악한 폭력이다.

세 편의 소설은, 수준 높은 언어로 ‘어느 편이냐?’고 묻는 질문의 폭력성을 고발하고 있다. 세 작품의 공통된 성찰은 이것이다. 답에 따라 어떠한 불이익도, 혹은 이익도 없을 때만이 폭력 아닌 질문일 수 있다는 것이다. 과연 우리는 그렇게 하고 있는지, 그것을 질문하는 작품들이다.  

 

글 이정우(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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