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용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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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그늘에서 50년을 떠돈 노래
부용산

 

노래 <부용산>이 처음으로 세상에 나온 때는 해방 직후인 1948년 4월 11일. 장소는 목포 평화극장이었다. 당시 항도여중(현 목포여고 전신) 5학년생 배금순이 <부용산>을 불렀다. 항도여중 ‘가사실 충당을 위한 학예회’ 자리였다.

부용산 오리길에 /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 솔밭 사이 사이로 / 회오리 바람 타고 / 간다는 말 한 마디 없이 / 너는 가고 말았구나 / 피어나지 못한 채 / 병든 장미는 시들어지고 / 부용산 봉우리에 /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노래는 전라도 일대에 순식간에 번졌다. 그러나 한국전쟁 이후 ‘부용산’은 숨어 버렸다. 가수 안치환이 노숙자처럼 구전으로 떠돌던 ‘부용산’을 채집해 <노스탤지어>(1997) 앨범에 ‘작사·작곡 미상’으로 세상에 내놓았다. 무려 50년 세월이 흐르고서야 빛을 본 것이다.

목포여고에 세워진 부용산노래비(아래)와 보성 부용산 입구에 서있는 부용산 시비(위)

목포 항도여중에서 근무했던 음악 선생 안성현은 1948년 어느 날 국어 선생 박기동의 시작詩作노트에서 <부용산>을 발견했고, 곧바로 곡을 붙였다. 박기동의 <부용산>은 폐결핵으로 일찍 죽은 누이동생을 벌교의 부용산에 묻고 돌아와 눈물로 쓴 시였다. 그러니까 <부용산>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그리워하는 연가였다.

슬픔이 가득한 시절이었다. 노래는 전염병처럼 번졌고, ‘빨치산’에게까지 닿아 그들의 애창곡이 되었다. <부용산>이 발표되던 해 10월 여순사건이 터졌다. 제주도민 진압을 거부했던 14연대 군인들은 지리산으로 숨어들어 유격전을 전개했다. 해방 후 최초의 빨치산 세력이었다. 노래 속 ‘피어나지 못한 붉은 장미’는 이들이 스스로 짊어진 고난처럼 느껴졌다. 노래를 부르면서 빨치산들은 여순사건 작전 지역 내에 있었던 벌교의 부용산을 떠올렸다.

맨 오른쪽이 안성현 선생님(목포여고 디지털역사관 전시 사진)

안성현은 한국전쟁 중에 북으로 갔다. 월북이었는지, 억북이나 납북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빨치산이 즐겨 불렀던 노래이자 북으로 넘어간 안성현의 작품이 <부용산>이었다. 50년 가까이 떠돌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애달픈 연가라 할지라도 전쟁의 화마를 피해갈 수는 없었다.

안치환이 <부용산>을 양지로 이끌어 낸 이후 안성현의 항도여중 제자였던 어느 대학 교수가 오랜 세월 몰래 간직하고 있었던 안성현 작곡집을 세상에 내놓았다. 노래는 이동원-한영애로 이어졌다. 이 둘의 노래가 ‘원본 악보’에 근거한 것이었다.

2006년 5월 13일 북한에서 발행하는 <문학신문>은 “민족음악 전문가인 공훈예술가 안성현 선생이 노환으로 4월 25일 오후 3시 86살을 일기로 애석하게 서거했다”고 보도했다. <문학신문>은 “전라남도 나주군 남평면에서 태어난 안성현 선생은…… 민족음악 유산을 수많이 발굴, 정리해 민족음악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고 말했다. 전쟁의 그늘에서 50년을 떠돈 노래 <부용산>의 작곡가가 남평에서 나고 자랐다는 사실이 최초로 확인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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