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혁명의 별, 신안 가거도 사람 김부련

김부련은 신안군 가거도 사람이다. 가거도는 외로운 섬이다. 조선의 왕들은 가거도로 많은 선비들을 유배 보냈다. 가거도로의 유배는 삶과 거리가 멀었다. 가는 뱃길에 풍랑을 만나 바다에 빠져 죽으라는 숨은 의미도 포함돼 있었다. 그만큼 육지와 단절된 먼 섬이었다.

김부련이 역사의 중심에 선 것은 어쩌면 우연이었다. 그러나 그 우연이 목포 4·19혁명의 물길을 바꿨다. 삶은 때로 의도와 다르게 반전한다. 1942년 가거도에서 태어난 김부련은 초등학교 때 목포로 유학을 왔다. 집안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 귀한 장남이었다. 목포 중앙초등학교와 유달중을 나왔고, 고등학교는 서울 서라벌예술고등학교에 진학했다.

흑산면 가거도출장소 앞에 있는 김부련열사비

그날, 그 거리에 서지 않았다면 김부련은 상당히 이름을 날리는 화가가 되었을 것이었다. 4·19혁명의 주체는 학생들이었다. 당시는 글을 모르는 사람이 많았고, 고등학생만 되어도 식자 대접을 받던 시대였다. 4월 19일, 김부련은 ‘이승만 독재정권 타도’를 외치며 경무대로 향하는 시위 대열에 합류했다. 

그저 우연이었다. 시위대가 경무대로 향한 것도, 김부련이 경무대로 향하는 시위대에 합류한 것도 미리 계획된 움직임이 결코 아니었다. 다만 혁명의 군중 속에서 모두가 자유를 느꼈을 뿐이었다. 경무대에 도착한 시위대는 이승만 대통령과의 면담을 요청했고, 경찰은 곧바로 무차별 발포를 시작했다. ‘피의 화요일’의 시작이었다.

시위대의 앞에 있었던 김부련은 경찰의 총에 맞고 쓰러졌다. 그의 나이 겨우 열아홉이었다. 

김부련의 죽음은 목포를 움직였다. 김부련의 시신은 4월 26일, 서울에서 기차로 목포역으로 운구됐다. 그 소식을 접한 목포 시민들은 목포역으로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그 숫자가 무려 2만 명을 넘어섰다.

오후 1시 20분 김부련의 시신이 목포역에 도착했다. 그러나 경찰은 목포 시민들에게 김부련의 시신을 인도하지 않았다. 격분한 시민들은 목포경찰서를 급습했다. 특히 목포경찰서장 최중욱과의 면담을 통해 “경찰은 모든 간섭과 불법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서약을 받아냈다. 김부련의 죽음은 4월 혁명의 중심에 목포를 세웠고, 그는 목포의 슬픈 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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