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혁명 광주 최초의 희생자, 강정섭

강정섭

총을 쏜 사람은 세 명의 경찰이었다. 그들은 학동파출소를 에워싼 시위 군중 1,000명을 향해 칼빈 실탄을 발포했다. 김남중이 6발, 이용수가 3발, 기해수가 4발을 쏘았다. 4·19혁명 당시 광주 최초의 경찰 발포였다. 

13발의 실탄이 발포된 후 시위대에서는 한 사람이 쓰러졌다. 열일곱살 젊은이 강정섭이었다. 그가 누구의 총에 쓰러졌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단지 발포를 한 세 명의 경찰이 4·19혁명이 끝나고 공동 제소되었을 뿐이다. 누구의 총에 맞았건 발포 명령을 내린 부당한 권력은 17세 소년의 생목숨을 그렇게 끊어 놓았다.

4·19혁명 때 광주의 시위를 주도한 것은 시민도 아니었고, 대학생도 아니었다. 어리고 어린 까까머리 고등학생들이 혁명의 복판에 섰다. 4월 19일, 광주 시위대의 공격은 이승만 정권의 하수인 노릇을 하던 파출소로 집중됐다. 성난 시위대는 돌을 들어 파출소를 공격했고, 시위대가 가장 많이 군집했던 금남로 일대의 파출소들은 모두 파괴됐다.

강정섭 기림비

강정섭은 조대부고 학생들이 이끌던 시위대에 합류해 학동파출소를 공격했다. 시위대는 경찰에게 세 가지 조건을 걸었다. ‘발포 금지·부정선거 원흉 처단·연행된 학생들 석방’이었다. 그러나 경찰은 저녁 8시 무렵 기어이 발포를 강행했다. 총소리와 함께 강정섭이 쓰러졌고, 당시에는 신원조차 확인할 수 없었다. 상황이 급박했다. 주위 사람들은 피를 철철 흘리는 그를 들쳐업고 전남대병원으로 뛰었다. 간신히 병원에 그를 눕혔을 때 강정섭의 양팔이 축 처졌다. 이미 사망한 뒤였다.

4·19혁명 광주 최초의 희생자가 나왔지만 경찰은 그의 신원 확인조차 거부했다. 특히 저녁 8시쯤 ‘사격을 한 적이 없다’고 언론에 발표하면서 그의 죽음 자체가 미궁에 빠졌다. 이미 죽은 강정섭은 서늘한 영안실에서 무연고자로 방치됐다. 무려 10일이 지난 4월 29일이 되어서야 그의 신원이 확인되었다. 백운동에 사는 17세 소년, 강정섭이었다. 

그의 죽음은 기폭제였다. 광주 4·19혁명 시위는 온 도시로 들불처럼 번졌고, 결국 성공한 민중혁명으로 우리 역사에 남았다. 소년이 목숨으로 세상을 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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