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전남] 황토

파릇하게 싹튼, 대략 15cm 안팎 길이의 보리 잎을 넣어 된장국을 끓인다. 소가 여물을 먹듯, 된장물에 익힌 보리 잎을 아삭아삭 씹어 삼킨다. 부드러운 풀향이 입안 가득 번진다. 곧 봄이 올 것 같다.

충청도가 고향인 지인은 보리된장국을 몰랐다. 전남 동부 쪽 친구도 보리된장국이 낯설다 했다. 장흥-화순까지가 보리된장국의 전남 동쪽 경계다. 간혹 보성에서도 보리된장국이 발견되기는 하나 예외 없이 장흥-화순 접경지역이다. 전북의 경우 영광과 닿아 있는 고창을 제외하고는 보리된장국이 없다. 보리된장국은 전남 서남권의 음식인 셈이다. 왜 그럴까.

답은 황토에 있다. 황토의 영향이 미치는 곳까지가 보리된장국을 먹는 곳이다. 황토 영향권을 벗어나 자란 보리는 새순이라 하더라도 잎이 뻣뻣해 된장국 재료로 적절치 않다고 한다. 음식 좀 하시는 전남 서남권 ‘어머니들’의 일관된 주장이다.

정확히는 적황토이다. 누르스름한 빛깔을 띤 황토는 전국적으로 분포해 있다. 무안과 그 인근 지역(영광, 해남, 영암 등)의 논밭에서 확인할 수 있는, 거의 붉은색에 가까운 적황토가 ‘전라도 황토’라고 할 수 있다. 적황토가 부드럽고 진한 향을 띤 보리 잎을 대지 위로 밀어 올리는 것이다.

비옥한 황토를 지닌 무안군 무안읍

 

적황토의 축복 품은 무안

전라남도에서 황토를 가장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곳은 무안이다. 무안의 약 70%에 이르는 땅이 선명한 붉은색을 띤 적황토이다. 자연스레 황토는 무안을 대표하는 상징으로 쓰인다. 그래서인지 무안의 특산품이나 이벤트 앞에는 황토가 붙어 있다. 황토양파, 황토마늘, 황토자색고구마, 황토갯벌축제 등등.

이중 가장 널리 알려진 무안의 특산품은 양파일 것이다. 무안의 바닷가에 접하는 구릉성 산지 밭 대부분을 양파가 점령하고 있다. 전국 양파 생산량의 20%가 이곳에서 나온다. 양파 겉을 감싸고 있는 껍질과 붉은 황토밭의 색감이 절묘하게 일치한다.

무안 양파는 “단단하고 아삭하며 즙이 풍부하고 단맛이 강하다. 구릉지의 흙과 그 곁의 바다 덕이다.*” 적황토가 풍부하게 품고 있는 각종 미네랄에 바다 바람이 제공해 주는 게르마늄이 무안 양파를 ‘명품’으로 만든다는 설명이다.(황교익, <네이버 지식백과>)

어떤 밭작물이든 황토 재질의 흙에서 잘 자란다는 건 농사의 상식이기도 하다. 또한 황토는 바다에서도 자신의 존재감을 충분히 드러낸다. 세발낙지, 굴, 매생이, 키조개, 바지락, 주꾸미 등 영광에서 보성에 이르는 ‘황토갯벌’에 서식하는 어패류들이 ‘최고’라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더 있다.

마늘을 심고 있는 무안 사람들(ⓒ신병문)

흑산홍어가 최고로 꼽히는 이유

홍어 중 으뜸은 흑산홍어이다. 제주도에서 백령도에 이르는 남서해안 일대가 홍어의 서식처이다. 그러니까 흑산도에서만 홍어가 헤엄치는 것은 아니다. 흔히 말하는 ‘흑산홍어’는 알을 낳기 위해 흑산도 근해에 몰려들어 잡힌 홍어를 말한다. 때는 12월~2월에 걸친 겨울이다. 그 외 한반도 연안 일원에서 잡히는 홍어는 그냥 ‘국내산 홍어’이다. 흑산홍어 맛은 국내산 홍어와 큰 차이가 난다. 그 비밀 또한 ‘전라도 황토’에 있다.

흑산도에서 만난 어부들은 “모래자갈하고 황토뻘이 섞인 요 흑산 어장이 홍어가 새끼 치고 사는 데 최고”라고 말한다. 더 구체적으로는 “긍께 흑산홍어 산란장을 앵카(닻)로 찍어보문 빨간 황토가 나와. 그런 디는 순 암놈만 와요. 가오리과라 회유성 어종이예요. 여그 선장님들이 그 길목을 잡는 것이제라. 옛날부터 순수한 감으로. 산란 때가 되문 꼭 와요, 순 암놈만……*” 이라면서 흑산홍어 맛의 근본을 황토뻘에서 찾았다. 칠레어장과 흑산어장의 위도가 엇비슷해 그나마 칠레산이 우리 입맛에 감겨오는 것인데, 다만 황토의 존재 유무가 서로 달라 흑산홍어의 비교우위가 확보된다는 말도 있다.(황풍년, <월간 전라도닷컴> 2013년 9월호)

홍어 요리 중 하나로 보리애국이 있다. 홍어 내장과 보리 잎을 넣어 끓인다. 보리 잎은 2월~3월 초반까지만 요리 재료이다. 봄기운이 가득해지면 너무 자라 쓸 수 없다. 흑산홍어와 보리 잎이 2월에 만나 홍어보리애국을 탄생시키는 셈이다. 전라도 황토가 내린 축복임에 틀림없다.

문학 작품에서 황토는 ‘전라도’이다. 왼쪽부터 조정래 소설 <황토>, 한하운 시집 <황토>, 김지하 시집 <황토>

고난 속에서도 품위 잃지 않는 생명력 상징

목포 출신 김지하의 첫 시집은 <황토>(1970)였다. <황토>에 실린 시 ‘황톳길’은 “황톳길에 선연한 / 핏자욱 핏자욱 따라 / 나는 간다 애비야 / 네가 죽었고 / 지금은 검고 해만 타는 곳…”이다. 시 속 ‘애비’를 ‘전라도’로 치환해 읽어도 무방해 보인다. 일제 치하와 군부독재 시절 전라도의 고난과 저항에 대한 시적 묘사로 읽을 수 있다.

함경도 출신 시인 한하운은 ‘문둥이 시인’으로 불린다. 그 자신이 한센병에 걸려 힘든 삶을 살았다. 한하운은 한센병에 걸린 이들의 처지를 ‘전라도길-소록도 가는 길에’(1949)라는 시로 읊었다. 힘들고 애잔한 정서가 가득하지만 결코 무너지지 않는 품격을 담고 있다.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로 시작해 “가도 가도 먼 천 리, 전라도길”로 끝난다. 한센병의 서러움을 묘사한 시이지만, 한편으로는 한센인들처럼 차별받았던 ‘전라도’를 떠올리게도 한다. 이 시의 맺음이 ‘전라도길’이 아닌 ‘경상도길’이나 ‘충청도길’이었다면 정서적 파장은 훨씬 덜했을 것이다.

보성 벌교 출신 작가 조정래는 “일제 말기부터 해방 전후, 그리고 한국전쟁을 거치며 아비가 각각 다른 세 자식을 키울 수밖에 없었던 한 여인의 굴곡진 인생”을 소설*로 썼다. “우리 근현대사가 안고 있는 문제들을 주인공의 삶에 투영된 모순과 부조리를 통해 보여” 주는 작품이다. 1974년 중편으로 발표한 소설을 2011년 장편으로 개작해 냈다. 제목은 <황토>다.(해냄출판사 서평)

이렇듯 문학 작품에서 ‘황토’는 고난의 상징으로 쓰인다. 동시에 결코 삶을 포기하지 않는 질긴 생명력의 은유가 ‘황토’이다. 황토가 전라도의 대표색이라는 점에서 황토의 상징과 은유는 곧 전라도를 지시한다. 고난 속에서도 품위를 잃지 않고 끝내 곧은 길을 찾는 건강한 생명력이 ‘황토=전라도’라 할 수 있겠다.

황토는 전국적으로 분포해 있는 흙의 한 종류를 일컫는다. 다만 진한 붉은색을 띤 적황토는 전남 서남권 고유의 흙이며, 황토를 대표하는 특별한 황토라 할 수 있다. 이 황토가 지닌 영향력은 매우 강해서 음식, 농수산물, 문학작품에 이르기까지 넓게 번져 있으며, 한결같이 전라도와 인연을 맺고 있다. 새로 시작하는 ‘키워드 전남’ 꼭지의 첫 번째로 ‘황토’를 선택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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