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청전〉 다시보기

슬픈 이야기이며, 가슴 저미는 목소리였다. 명창 윤진철의 목에서는 핏대가 불거졌다. 심봉사였던 그가 눈을 뜨는 대목이었다. 맹인잔치에서 황후가 된 딸을 만나 “눈도 뜨지 못하옵고 자식만 팔아먹은 놈은 살려두어 쓸 데 없소, 당장에 목숨을 끊어 주오”라고 부르는데, 소리가 세상 밖의 영역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심장이 먹먹했다. 심청이 인당수에 몸을 던지고 그 만남까지 3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심봉사에게는 온몸이 지옥에 몸이 잠기는 날들이었다.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잃은 딸이었다. 동냥젖을 먹여 키운 딸이었다. 겨우 열다섯에 자신의 눈을 뜨게 하려고 공양미 300석에 몸을 판 딸이었다. <심청전>은 눈물로 범벅이다. 의도야 어쨌든 간에 결과적으로 자식을 팔아먹은 아비의 심정이 문장 마디마디에 박혔으니 눈물바람은 당연했다. 

그 심청이 실제로 역사에 존재했다는 말을 들었다. 심청이 태어난 곳은 곡성군 오곡면 송정마을인데, 거기 가면 심봉사가 청이 젖동냥을 했던 우물도 있다 했다. 쓸쓸한 가을에 심청을 만나러 송정마을에 가는 길, 부모와 자식이 이별하듯 나뭇잎들이 바람에 흩날렸다. 늦가을, 몸을 비운 곡성의 논들은 하염없이 처연했고 섬진강은 여름보다 더 퍼런 물결이었다.

하늘에서 본 곡성 송정마을(심청이야기마을)
하늘에서 본 곡성 송정마을(심청이야기마을)

 

<심청전>의 모태 ‘관음사연기설화’

곡성군은 심청을 주제로 매년 축제를 열고 있다. ‘심청한옥마을’도 조성해 그의 효행을 기리고 있다. 그러나 확실치 않다. 실제 심청이 곡성에서 태어났다는 완벽한 증거는 없다. 다만 그럴듯한 역사적 추론이 있을 뿐이다. 그 추론의 중심에 서 있는 기록이 <관음사 사적기>이고, 그 기록 안에 등장하는 ‘관음사연기설화’가 심청을 곡성 사람으로 기술한다. 

연꽃으로 다시 피어난 심청. 심청한옥마을 곳곳에는 심청전 이야기를 담은 동상들이 세워져 있다.
연꽃으로 다시 피어난 심청. 심청한옥마을 곳곳에는 심청전 이야기를 담은 동상들이 세워져 있다.
딸을 기다리는 아버지 심학규
딸을 기다리는 아버지 심학규

조선 영조 5년(1729)에 송광사의 백매선사가 쓴 ‘관음사연기설화’의 내용은 이러하다. 서기 300년 무렵 심청은 송정마을에서 태어났다. 심청의 본래 이름은 원홍장元洪莊이었다. 그의 아버지 원량元良은 앞을 보지 못했고, 젖동냥으로 아이를 키웠다. 원홍장은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철광석을 수입해 가던 중국 남경상인들에게 스스로를 팔았다. 중국 진나라로 건너간 원홍장은 사신을 만나 어찌어찌 훗날 황후가 되었다. 황후는 중국에서 고국과 아버지를 잊지 못해 불탑과 불상을 만들어 고향 곡성으로 보냈다. 그 불탑과 불상을 딸을 대하듯 손으로 어루만지던 아버지 원량이 번쩍 눈을 떴다는 내용이다.

이야기의 중심 뼈대가 <심청전>과 거의 흡사하다. 훗날 ‘관음사연기설화’에 더 많은 서사들을 덧대 <심청 전>이 탄생했으니, 원홍장이 곧 심청이라는 것이다. 역사적 신빙성도 적지 않다. 절의 사적기는 사실을 바탕으로 쓴다. 그러므로 ‘관음사연기설화’는 실제 있었던 일을 기록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심청한옥마을은 한옥펜션 및 연수세미나 장소로 이용되고 있다.
심청한옥마을은 한옥펜션 및 연수세미나 장소로 이용되고 있다.

송정마을에는 당시 중국 상인들과 교역을 했던 흔적들이 많이 남아있다. 철을 주조했던 흔적이 곳곳에서 발견되고, 마을을 품고 있는 공방산은 공 씨 성의 중국 상인이 살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특히 서기 300년 무렵 중국 <진서>에 원희元姬라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 사람이 원홍장일 가능성이 높다는 게 심청 연구자들의 공통된 주장이다. 비슷한 시기, 진나라의 불교학자가 저술한 <변종론>에는 “멀리 불상을 보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때는 진의 효무황제 시기로 중국학계는 일본과 한반도로 불상을 보내고, 스님을 파견한 것으로 해석한다. 

 

심청이 중국으로 향한 뱃길

서기 300년이라면 중국과 한반도의 무역로는 바다였다. 중국 상인들은 어떻게 내륙 깊숙한 곡성까지 들어왔으며, 무엇을 얻기 위해 송정마을에 왔다가 원홍장을 만났을까? 

당시 마한으로 가는 중국의 항구는 절강성 보타현에 있었다. 거기서 배를 띄워 해류를 따라 닷새면 중국 교역의 전진기지였던 소랑포(완도 금일)에 닿았다. 

완도에서 다시 배를 띄워 남해안을 돌아 섬진강을 따라 들어가면 금방 곡성에 올 수 있었다. 지금은 수량이 많이 줄었지만, 그 무렵 섬진강에는 여러 척의 배가 정박할 수 있는 포구인 ‘두포’가 있었다. 

완도에서 배를 띄워 남해안을 돌아 섬진강을 따라 들어가면 곡성에 올 수 있었다.
완도에서 배를 띄워 남해안을 돌아 섬진강을 따라 들어가면 곡성에 올 수 있었다.

중국의 상인들이 곡성까지 왔던 이유는 질 좋은 철이었다. 철이 국가의 명운을 결정하던 때였다. 철이 있어야 무기를 주조하고, 철이 있어야 농기구를 만들 수 있었다. 강력한 군대와 풍족한 양식은 고대국가를 일으키는 원천적 힘이었다.

곡성은 마한에서 가장 좋은 철이 생산되는 지역이었다. 곡성 철의 위상을 알 수 있는 선명한 물건도 남아있다. 서기 369년 백제가 왜에 하사한 ‘칠지도’다. 일본 이소노가미 신궁에 봉안돼 있는 ‘칠지도’는 백제가 하늘과 연결돼 있는 초월적 존재라는 징표이며, 그 권위를 형상화한 칼이다. ‘칠지도’는 곡성에서 생산된 철로 만든 칼이다. <일본서기>는 ‘칠지도’를 만든 철이 생산된 지역에 대해 “서쪽에 물이 있는 곳이다, 이곳을 ‘곡나’라 한다”고 기록했다. 지역의 서쪽에 섬진강이 있고, 옛 지명이 곡나인 곳은 곡성이다.

 

중국의 상인들이
곡성까지 왔던 이유는
질 좋은 철이었다.
철이 있어야 무기를 만들고
농기구도 만들 수 있었다.
곡성은 마한에서
가장 좋은 철을 생산했다.

심청은 앞이 안 보이는 아버지를 두고 죽으러 가는 길이 서러웠을 것이다. 남겨진 아버지 심학규는 뒤늦게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었을 것이다. 생이별한 아비와 딸의 삶 굽이굽이에 섬진강은 눈물처럼 흘렀을 것이다.

인당수는 북망산이었다. <심청전>은 익숙해서 그냥 읽었지만 돌아보면 대문 밖이 저승인 것처럼 매우 슬픈 소설이었다. 알고 보면 익숙한 것들이 가장 슬프다. 윤진철의 소리처럼, 곡성의 맑은 풍경처럼, 당신의 아버지처럼, 우리 안의 ‘심청’처럼….

글 정상철 사진 장진주

‘칠지도’의 철 원산지에 대해 곡성설과 충주설이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편집자주

관련 교과서
국어 초등학교 4-2, 국어 고1(미래엔)

저작권자 © 전남교육소식 함께꿈꾸는미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