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의 교사 50여 명이 지난 5월 21~22일 이틀 동안 새롭고 깊게 강진과 만났다. 전라남도교육청이 2020년부터 시행하고 있는 ‘남도 민주평화길’의 아홉 번째 답사였다. 회를 거듭하면서 남도 민주평화길은 만족도가 남다른 직무연수 프로그램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번 강진 답사를 예시 삼아 일곱 개의 장면으로 남도 민주평화길의 의미를 살펴본다.

강진 병영면 전라병영성 성벽을 따라 걷고있는 답사단
강진 병영면 전라병영성 성벽을 따라 걷고있는 답사단

 

#1 다시 보고 깊이 보고 새롭게 보기

21세기 교사들이 19세기 다산 정약용의 강진 유배지를 더듬었다. 강진에 온 직후 살았던 주막집 사의재, 10년을 기거하며 저술에 힘쓴 다산초당, 벗을 만나러 오갔던 백련사 숲길을 걸으며 다산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다산에게 강진은 비상飛上의 공간이었다. 유배 직후 “이제야 겨를을 얻었구나!” 라고 말한 그는 18년 동안 500여 권의 책을 쓰며 18명의 제자를 길러냈다. 주막집 여인이 깨우쳐준 지혜도 꼼꼼히 기록하고, 자신의 저술에 참여한 제자들의 이름도 책 서두에 새겼다. 강진사람들은 다산의 학문세계를 북돋워주고 함께 완성했다. 답사를 마친 저녁, 참여자들은 다산연수원 강당에서 강의를 들었다. 통섭統攝, 창의創意, 애민愛民 … 강연자인 윤석호 연세대 교수는 강진에서 완성된 다산학의 태도를 이 세 가지로 요약했다. 오늘의 교사들 또한 갖춰야 하는 덕목이 아닐까 싶다.

다산초당에서 김남철 씨의 해설을 들으며(ⓒ이혜영)
다산초당에서 김남철 씨의 해설을 들으며(ⓒ이혜영)
백운동정원을 나오면 마주하는 월출산 차밭(ⓒ이혜영)
백운동정원을 나오면 마주하는 월출산 차밭(ⓒ이혜영)

답사단은 다음날 전라병영성 폐영지를 한 바퀴 걸었다. 조선시대 육군본부인 전라병영성은 강진의 경제적 도약에 큰 역할을 했다. 남해 일대로 연결되는 안정적인 교역로는 병영상인의 발달로 이어지고, 병영상인의 후예인 한 거부는 강진의 미래를 위해 강진농고현 전남생명과학고를 설립했다. 하지만 조선후기 대부분의 관료기구가 그러했듯이, 병영성 역시 주민 수탈기구로 전락했다. 1894년 동학농민군의 습격을 계기로 병영성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교사들은 부지런히 걷고 살폈다. 현장마다 깊이 있는 해설이 더해졌다. 답사 후 강의까지 들으니 더할 나위 없었다. 원숙한 교사들은 그간 익숙하다고 생각했던 강진을 다시 보았고, 젊은 교사들은 강진과 진지한 첫 만남을 가졌다. 지역사를 깊이 보고 다시 보고 새롭게 보기, 남도 민주평화길의 방식이다.

 

#2 강진다운 것, 지역과의 접속

저녁 강의 때는 <강진일보> 주희춘 대표가 나서 강진 병영상인 이야기를 들려줬다. 막간 공연자로는 강진 시민들의 음악동아리 ‘소리조아’가 나섰다. 박해현 초당대 교수는 임진왜란 때 강진 의병의 활약상을 소개했다. 전남생명과학고를 찾아갔을 때는 졸업생 김재영 씨가 5·18민중항쟁 때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1980년 당시 그는 고3이었다. 답사단은 5·18 때 강진 사람들이 활약했던 강진군청, 강진읍교회로 걸음을 이어갔다. 온통 ‘강진다운 것’이 씨줄과 날줄처럼 답사를 엮었다. 

역사를 모르고 찾더라도 강진은 멋진 땅으로 다가온다. 백련사 숲길은 더없이 고즈넉하고, 백운동정원의 조형미는 탄성을 뽑아내며, 월출산 자락 차밭은 탁 트인 장관이다. 남도 민주평화길은 한 발 더 나아갔다. 비경 속에 켜켜이 쌓여있는 역사, 문화, 사람을 불러냈다. 

답사가 무르익으면서 교사들은 다산과 강진사람, 이순신과 염걸 장군, 강진만과 청자 등의 연결고리를 이해했다. ‘님을 위한 행진곡’을 힘차게 부르는 ‘소리조아’ 회원들에게 임진년 강진 의병들이 포개어졌다.

명저 <오래된 미래>를 쓴 생태학자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는 <행복의 경제학>에서 ‘지역 지식의 회복’을 강조했다. “지역 지식은 종합적인 동시에 특화된 지식이며, 자기 지역을 잘 배운 아이는 상호 연관성에 기인한 넓은 세계관을 갖게 된다”고 했다. 교사들이 강진을 체험한 것처럼 학생들이 자기 지역사를 배운다면, 그래서 저마다 ‘화순다움’, ‘신안다움’ 등에 대한 자기 정의를 갖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1980년 5·18 떄 시민군을 도운 강진농고 학생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김재영 씨(당시 고3)

 

#3 매혹적인 분량의 시간 ‘1박2일’

이틀 동안 답사버스는 강진만의 동쪽과 서쪽을 오르내렸다. 첫날 본 바다와 갯벌은 둘째 날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전날 강진만 일대 역사를 탐색했으니 점점 달리 보일 수밖에. 답사단은 이른 오전 전라병영성 성벽을 따라 걸었다. 갑오년 동학농민군이 병영성 공격을 위해 넘어왔다던 수인산, 그 너머 아침 해가 눈부셨다. 

과거 ‘도강현’과 ‘탐진현’을 합쳐서 오늘날의 ‘강진’이 됐다고 한다. 도강은 산이 발달한 북쪽 병영면 일대, 탐진은 들이 넓은 남쪽 강진만 일대이다. 답사단은 하루 그리고 반나절 동안 도강과 탐진을 더듬으며 강진역사의 자연적 원형을 체험했다.

남도 민주평화길은 1박2일 코스다. 금요일 점심 때 모여서 답사 1회차, 저녁에 3개의 강의, 토요일 오전의 답사 2회차, 오후의 답사 3회차 일정을 소화했다. 교사들은 “1박2일이 이렇게 알찰 수도 있구나” 하고 뿌듯해하며 돌아갔다. 시간의 체감은 상대적이어서,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그 느낌이 천차만별이다. 강진의 1박2일은 단연코 매혹적인 분량의 시간이었다. 한 지역을 깊게 보여주는 동시에 다시 찾아와 더 꼼꼼히 들여다보고픈 갈증도 안겨준다. 교사들의 갈증은 새로운 실천의 동력이 될 것이다.

코스 해설을 맡은 나주역사교육연구회 김남철 회장은 강진 답사의 방향을 ‘다산의 삶과 정신, 의향 강진의 정신, 자주와 민주의 정신’으로 정리했다. 1박2일 동안 세 가지가 압축적으로, 알차게 충족됐다.

강진 민주평화길 코스(각 코스당 반나절 소요)
강진 민주평화길 코스(각 코스당 반나절 소요)

 

#4 씨앗이 되는 사람들 ‘교사’

답사 신청은 순식간에 마감된다. 이번 강진 연수 역시 인터넷 접수를 개시하자마자 금세 정원이 차버렸다. 교사들 사이에 입소문이 난 탓이다. 그간 남도 민주평화길 답사에 참여한 이들의 소감을 발췌했다. 

“대서사시와 같은 연수” “한 번에 두 마리 토끼를 잡은 느낌” “관심 갖지 않으면 알 수 없는, 하지만 알아야 하는 속살 이야기를 생생하게 들었다. 나 스스로 추가 탐구 계획을 세우고 있다.” (이상 순천 답사 중) / “이렇게 가슴 뛰고 나에게 도전해보는 연수가 또 있었을까? 우리 아이들이 내 고장을 사랑하는 방법과 영역을 넓히도록 아낌없이 지원해야 겠다.” “우리 학생들과 함께할 수 있겠다는 꿈이 생겼다!” (이상 섬진강 답사 중)

이번 강진 참여자들의 단톡방도 여운을 잇고 있다. 인식의 확장, 새로운 시선, 전남 사람으로서 자부심, 새로운 강진 등의 키워드를 담은 소감들이 계속 올라오고 있다.

남도 민주평화길 체험자는 전남의 교직원들이다. 이들이 학교 현장으로 돌아가 학생들과 호흡한다. 교사와 학생의 2차 체험이 생성되고 증폭되고, 교직원들 사이에도 협업이 이루어질 것이다. 남도 민주평화길 체험은 씨앗이다. 아름드리 거목으로 자라날 우량 씨앗이다. 

병영상인에 대한 강의를 하고 있는 강진일보 주희춘 대표
병영상인에 대한 강의를 하고 있는 강진일보 주희춘 대표

#5 전남 교육공동체, 길로 뭉치다

 전라남도교육청은 2019년 9월 27일 ‘남도 민주평화길 프로그램 개발 협의회’를 열었다. 민선3기 전남교육의 역점과제인 ‘민주시민교육 강화’를 위한 체험교육 사업의 하나였다. 프로그램 교재 집필위원 등 30여 명이 참여했다. 그에 앞서 전남교육청은 22개 시·군 문화원으로 구성된 전남문화원연합회에 자문도 구했다. 

프로그램을 본격 개발할 때는 교육지원청, 시·군청 문화관광과, 문화원, 대학, 박물관, 광복회, 지역신문사 등과 협력했다. 운영 T/F팀으로는 시군 담당 장학사를 비롯해 박병섭(전남 동부권), 김남철, 박해현(이상 전남 서부권) 씨가 활약하고 있고, 전라남도교육연수원 정성일 교육연구사가 실무를 책임지고 있다. 

2020년 10월 16일 남도 민주평화길이 첫걸음을 뗐다. 첫 회의를 연 지 1년 만이었다. 오는 6월 4일 열리는 화순 답사는 10회 째가 된다. 박해현 초당대 교수는 “역사적 평가를 받은 인물을 50%, 새로 발굴한 인물을 50%로 해서 지역당 10곳 정도로 코스를 짰다”고 소개했다. 김남철 씨는 “어떤 답사지는 그 일대를 세 번 헤맨 끝에 발굴하기도 했다. 지역민들도 모르고 있는 경우였다”고 회고했다. 이들 운영 T/F팀은 전 답사를 함께 하며 각 지역 전문가와 더불어 현장 해설을 맡는다.

남도 민주평화길을 걷는 사람들은 전남의 교사들이다. 매회 40~50명씩, 3년 동안 모두 합치면 1,200여 명이 된다. 그 길을 내고 가꾸는 사람들은 이보다 훨씬 많다. 아니 셀 수가 없다. 전남 교육공동체가 남도 민주평화길 위에서 만나고, 손을 잡고, 함께 걷고 있다.

강진읍 남포리 4·4만세운동사적비 앞에 선 답사단
강진읍 남포리 4·4만세운동사적비 앞에 선 답사단

#6 지리산에서 시작해 3년 동안 22개 시·군

남도 민주평화길은 2020년 가을 지리산 등반으로 1회를 열었다. 39명의 교사들이 지리산 백무동에 모여 천왕봉으로 향했다. 남한 내륙의 최고봉을 오르내리는 길, 힘들었지만 아무도 포기하지 않았다. 남도 민주평화길 순항의 예고편이었다. 이어서 순천, 나주, 보성, 목포 답사가 줄줄이 열렸다.

올해 답사는 4월 17일 섬진강 자전거 종주로 시작했다. 이후 고흥, 장흥, 강진 답사가 열렸고 6월에는 화순, 해남, 담양이 이어간다. 내년까지 3년간 22개 시·군을 모두 순회할 예정이다.

지리산, 섬진강, 영산강을 다룬 점이 이채롭다. 전남은 강, 산, 들, 바다가 저마다 넉넉히 발달한 지역이다. 특히 강은 농본시대 풍요의 근간이자 통합의 인프라였고, 산은 지역과 지역 사이를 경계 지으면서 유독 격동의 역사를 품은 공간이었다. 

전남 서부의 영산강, 동부의 섬진강, 그리고 역사의 산으로 손꼽히는 지리산은 전남역사의 공간적 뼈대라 할 수 있다. 이처럼 남도 민주평화길은 전남역사의 무대를 총론과 각론으로 교차하듯이 살핀다. 전남의 의로운 역사, 풍성한 문화를 촘촘하게 엮은 얼개에 다름 아니다.

 

#7 답사교육의 새 길을 여는 전남교육청

올해 2월, 전남교육청은 남도 <민주평화길 체험학습 자료집-목포·나주·화순 편>을 발간해 일선 학교에 배포했다. 현재는 여수·강진·장성 편을 제작하고 있다. 순천교육지원청은 지난해 순천 답사길을 기초로 5개의 세부적인 코스를 만들었다. 전남교육청은 이 답사프로그램이 초등학교 지역화교재에 반영될 수 있도록, 그리고 각 시·군 교육지원청 등이 자기 지역 코스를 활발히 운영하고 진화시킬 수 있도록 권한다. 

서울을 포함해 여러 지역이 비슷한 답사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지만 대체로 답사에 그친다. 전남교육청은 생생한 활용과 변주까지 시도하고 있다. 역사문화 답사교육 분야에서 전남이 새 길을 닦고 있다. 앞으로 남도 민주평화길은 초·중·고 현장체험활동, 수학여행, 야영수련활동 프로그램 등으로 운영될 것이다. 

남도 민주평화길의 궁극적인 답사자는 학생들이다. 3년 동안 교사들이 먼저 ‘사전답사’를 하고 있는 셈이다. 전남 학생들이 전남인으로서 자긍심을 갖고 민주시민으로 자라는 과정, 남도 민주평화길이 그 성장기를 함께 써내려간다.

전라병영성 성벽의 구조를 살펴보는 답사단(ⓒ이혜영)
전라병영성 성벽의 구조를 살펴보는 답사단(ⓒ이혜영)

글 이혜영 사진 마동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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