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실

익어가는 매실
익어가는 매실

#장면 하나. 시아버지는 매실나무 2,000그루를 심었다. 섬진강이 내려다보이는 백운산 자락 언덕이었다. 해마다 여름이면 매실을 따고 달여 농축액인 고膏를 만들었다. 가끔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얀 급체 환자가 아랫마을에서 올라왔다. 시아버지는 따뜻한 물에 그 고를 풀어 마시게 했다. 아픈 이의 얼굴엔 곧 핏기가 돌았다. 약도 병원도 아득했던 시절, 시아버지의 고는 마을의 비상구급약이었다. 

#장면 둘. 며느리는 부산 국제시장에서 이 언덕으로 스물셋에 시집왔다. 끝없는 밭일에 한숨이 절로 났다. 좋은 계절, 예쁜 섬진강이 부아를 돋웠다. 가까이 열려있는 매실이 보였다. 흙투성이 호미든 손으로 애꿎은 매실을 바위에 찧어댔다. 분이 좀 풀리자 손이 눈에 들어왔다. 짓이겨진 매실에서 나온 물은 손톱 밑 때까지 빼줬다. 얼마 뒤 마을 돼지잡이 잔치 설거지에도 매실 물을 써봤다. 기름투성이 그릇이 잘 닦였다. 짚은 비할 바가 아니었다. 며느리는 무릎을 쳤다.

매실청, 매실고추장, 매실된장, 매실장아찌… 홍쌍리 씨의 장독마다 쓰임이 다른 매실이 가득이다.

매실은 평平이다. 오랫동안 평범한平 사람들을 두루平 편안케平 하는 약이자 음식, 생활용품으로 쓰였다. 사람들은 매실을 일상平의 삶으로 소비했다. <동의보감>도 매실의 성질을 ‘평平’으로 기록하고 있다. 매실은 만인의 열매였다.

옛 선비들은 열매보다 꽃에 더 마음을 준 듯하다. 매화를 사람사군자, 四君子으로 높이고, 친구세한삼우, 歲寒三友로 삼았다. 눈 속에서도 꽃과 향을 내는 생명력에서 ‘절개’를 뽑아 자신들의 이상으로 삼았다. 퇴계의 매화 사랑은 유별났다. 천원 권 지폐의 퇴계 초상 뒤편에 매화가 피어있는 이유다. 사대부들은 매화를 이념으로 소비한 셈이다.

어몽룡의 『월매도』. 창끝처럼 곧고 뾰족한 매화가지에서 선비의 강한 지조와 절개가 드러난다.(ⓒ국립중앙박물관)
어몽룡의 『월매도』. 창끝처럼 곧고 뾰족한 매화가지에서 선비의 강한 지조와 절개가 드러난다.(ⓒ국립중앙박물관)

사대부의 꽃, 만인의 열매를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시대다. 매실은 조미료, 차, 장아찌, 아이스크림, 술 같은 모습으로 우리 생활에 더 가까이 다가왔다. 흔하지만 쓰임은 남다르다. 정유인 광양청매실농원 부사장은 “알카리 대표 식품인 매실은 육식으로 산성화된 몸을 정화해준다”고 전했다. 땀이든 기운이든 잃을 게 많은 여름을 앞두고 매실차를 꾸준히 마실 것도 권했다.

처음 소개한 두 장면은 매실 산업을 이끈 광양의 식품국가명인 홍쌍리 씨 이야기다. 매실나무를 삶 가까이 뒀던 보통사람들의 경험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웃과 열매를 나누며 몸과 삶의 평平화를 평平등을 경작해 왔던 것이다.

매실청, 매실고추장, 매실된장, 매실장아찌… 홍쌍리 씨의 장독마다 쓰임이 다른 매실이 가득이다.
하늘에서 본 홍쌍리 씨의 매실장독

글 노해경  사진 마동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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