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마실_ 근대도시 목포의 어제와 오늘

목포는 123년 전 가을에 태어났다 . 명확한 출생일을 갖고 있는 도시다. 1897년 10월 조선 대한제국으로 국명을 바꾸고 지금의 목포항 일대를 개항장으로 지정했다. 개항장은 외국인이 드나들며 무역을 할 수 있게 허용한 구역이다. 그때가지는 부산, 인천, 원산 세 곳이 조선의 개항장이었다. 이들 도시가 해외 열강의 압력에 문을 연 것과 달리, 목포는 우리가 추세를 주도해 보려는 의지의 산물이었다.  

목포의 ‘기원’은 인적 드문 바닷가의 조선해군기지 ‘목포진’이었다. 목포진 언덕은 서해와 남 해를 연결하면서 무안, 해남, 진도 일대 방어에 최적지였다. 1439년 조선이 수군을 주둔시킨 이 후 오래도록 목포진에는 해군과 봉수대 관리 인력 정도만 살았다. 개항과 함께 천지개벽이 일어났다. 유달산 자락 목포진 주변 갯벌이 매립됐다. 그 위에 항구와 도시가 들어섰다. 일본인, 다른 지역 상공인, 조선 지주, 노동자 등이 기회의 땅 목포로 모여들었다. 

개항과 함께 천지개벽이 일어났다. 목포진 주변 갯벌이 매립되고 항구와 도시가 들어섰다.반듯반듯한 각국 거류지에는 주로 일본인이, 유달산 자락 움막촌엔 조선인이 살았다.
개항과 함께 천지개벽이 일어났다. 목포진 주변 갯벌이 매립되고 항구와 도시가 들어섰다. 반듯반듯한 각국 거류지에는 주로 일본인이, 유달산 자락 움막촌엔 조선인이 살았다.

시가지는 두 구역으로 개발됐다. 거리와 건물이 반듯반듯하고 깨끗한 각국 거류지와, 유달산 자락 이곳저곳의 조선인 거류지였다. 조선인 지역은 개발이라 말하기 무색한 움막촌이었다. 각국 거류지의 주민은 대부분 일본인이었다. 조선이 야심차게 구상한 개항장 도시지만 현실은 만만치 않았다. 19세기 세계는 이미 제국주의 열강들의 손아귀에 있었다. 일본은 동아시아를 단계별로 침탈했다. 조선은 1905년에 외교권을, 1910년에는 아예 국권을 빼앗겼다. 그 시대 약소국의 개항장은 국가 간 대등한 무역의 장이 아니라 기울어진 운동장이었다. 땅이 넓지 않은 목포는 갯벌을 계속 매립해 시가지를 늘렸다. 목포역도 간척지에 들어섰다. 전라도 곳곳에서 쌀과 면화가 기차에 실려 목포역까지 왔고, 목포항으로 옮겨져 수북이 쌓인 후 헐값에 일본으로 떠나 갔다. 

1895년 폐진된 목포진은 흔적마저 희미해지고 일본은 승승장구했다. 노적봉 기슭에 들어선 일본영사관은 당시로서는 매우 웅장한 유럽식 석조건축물이었다. 벽에는 욱일기 문양을 새겼다. 사실상 일본인 거류지인 각국 거류지와 목포항 일대를 내려다보며 세를 과시했다. 한일합방 후 일본영사관은 목포부청이 됐다. 건너편 동양척식 주식회사 목포지점도 수탈기관으로서 나날이 기세가 등등했다. 조선인들은 일본인 거류지에 자유롭게 출입할 수 없었다. 목포 시가지는 제국주의의 냉혹함을 제 몸에 형벌처럼 새겼다. 

어쨌든 근대는 교역의 시대다. 목포는 나날이 전성기를 갱신하며 ‘전남의 현관이자 물산집 합의 중심지’가 됐다. 20세기 초 전국 ‘3대항 6대 도시’의 하나로 불렸다. 광주가 전남의 행정도시로 개발되기 시작할 때 목포는 일찌감치 전남 대표 상업도시의 위상을 얻었다. 

목포진은 희미해지고 일본은 승승장구했다. 목포 시가지는 제국주의의 냉혹함을 제 몸에 형벌처럼 새겼다. (좌) 목포진 (우) 일본영사관

개항장 목포의 애환과 번영 

흔히 일제강점기 때 성장한 근대도시들은 ‘식민지 수탈기지’라는 애환의 상징으로 인식되곤 한다. 목포 역시 뼈아픈 설움의 도시로 여겨질 만하다. 하지만 도시는 사람살이의 그릇이어서, 주민들이 다시 도시의 얼굴을 재편한다. 목포항 부두 노동자들은 대부분 인근 전남 농촌지역에서 온 조선인들이었다. 그들은 치열했던 전라도 동학농민운동을 겪은 농민군이거나 그 후예들이었다. 농민군은 비록 패배했지만 반봉건 반외세를 기치로 구시대와 제국주의에 목숨 걸고 맞선 경험을 간직했다. 

그래서일까. 목포항 부두 노동자들이 일본 상공인들에 대항해 벌인 파업과 노동쟁의는 전국 어느 개항장에서와 달리 신속하고 강력했다. 개항 직후인 1898년 2월부터 1903년까지 모두 여덟 차례의 쟁의를 벌였다. 목포 부두 노동운동은 일제강점기 노동운동의 출발점으로 평가된다. 

조선인 거류지의 중심인 목원동(북교·남교· 죽교·양동 일대)에는 자유의 공기가 넘실댔다. 낡은 관습이 남지 않은 신흥도시였다. 빈 도화지에 새로 칠한 그림이었다. 그런 땅에 미국인 유진 벨 등 기독교 선교사들이 정착해 양동교회, 정명여학교, 영흥학교 등을 일궜다. 이곳들은 항일시위의 출발지가 됐다. 기독교의 평등 가치는 동학의 세계관과도 맞닿았다. 인내천(人乃天), 사람이 곧 하늘이었다. 

당찬 부두 노동자들부터 새로운 가치를 흡수하며 성장한 젊은 도시민들까지, 이들이 목포의 표정을 만들었다. 수탈과 억압의 복판에 세워졌지만 목포는 성취하고 선도해가는 도시였다. 그런 바탕에서 문화예술이 꽃피었다. 1930년대 목포에서 만든 노래 ‘목포의 눈물’은 당대에 이미 국민가요가 됐다. 1940년대 말 노래 ‘부용산’이 만들어진 항도여중에는 문학 동아리가 활발했고, 학교마다 수준 높은 예술제들이 열렸다. 부유한 상업도시이자 문화예술의 도시인 목포의 위상은 해방 후에도 오래 유지됐다. 1960~70년대에도 영화 제작자들은 목포에 와서 영화를 찍고 목포의 극장에서 시사회를 열었다. 

항일·민주화운동이 넘실대던 목원동(좌)과 일본식 가옥과 유럽식 건축물이 곳곳에 남은 근대역사공간 유달동·만호동(우)은 역사여행지로 각광받고 있다.

유달동부터 목원동까지, 목포 근대마실 

목포 근대역사공간이 여행지로 각광받고 있다. 여행자 대부분은 일본인 거류지였던 유달동과 만호동 일대를 향한다. 곳곳에 남은 일본식 가옥과 유럽식 건축물이 이국적인 느낌을 물씬 풍긴다. 목포시는 옛 일본영사관, 동양척식주식회사 건물을 각각 목포근대역사관 1관, 2관으로 꾸려 옛 기록들을 전시하고 있다. 근대역사관 1관 아래에는 평화의 소녀상이 세워져 있다. 목포진도 옛 수군 만호청 일부가 복원돼 목포진역사공원으로 단장됐다. 

노적봉 공원에 올라 목포 구도심을 내려다본다. 목포는 1960년대 박정희 정부의 산업화 정책에서 소외되면서 급격히 쇠퇴했다. 지금은 전남 소도시 중 하나로 여겨진다. 온금동 산자락의 조선인 거류지는 번영의 열매를 누리기도 전에 현대의 쇠락한 언덕마을로 남았다. 시대가 쏜 화살처럼 흘러갔다. 100년 전 근대의 기억이 한 500년 전처럼 아득해 보인다. 

목포시는 옛 일본영사관, 동양척식주식회사 건물을 목포근대역사관으로 꾸려 옛 기록들을 전시하고 있다. 근대역사관 1관 아래에는 평화의 소녀상이 세워져 있다.

그럴 땐 목포의 원도심 목원동을 거닌다. 양동교회, 목포청년회관 등이 고풍스러운 석조건 물 그대로 남아있다. 이들 항일운동 거점들은 해방 이후 1970~80년대 군사독재 시기에도 목포 민주화운동의 무대가 되었다. 목원동에서 출발한 시위대가 목포역으로 나아갔다. 목포는 한국 민주화운동의 거목 김대중(1924~2009)을 길러냈다. 그와 함께 싸우는 시민들이 목포역 광장을 가득 메웠다. 일본식 불교사원인 동본원사 건물도 1987년 6월항쟁의 무대가 됐다. 

도시의 표정을 만드는 주체는 사람이다. 근 대 제국주의 약소국의 설움을 자유의 기질로, 이를 다시 현대 민주화운동의 에너지로 승화시켰다. 항구의 바람이 남다른 도시 목포에, 마실을 간다.

이혜영  사진 장진주 

저작권자 © 전남교육소식 함께꿈꾸는미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